[녹색시선] 조경에 대한 우화

글_김영민 논설위원(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 교수)
라펜트l김영민 교수l기사입력2018-03-20
조경에 대한 우화


글_김영민(서울시립대 조경학과 교수)


개구리들은 우물 안에 살고 있었다. 개구리들은 늘 저들끼리 다닥다닥 붙어 앉아 우물 밖으로 보이는 하늘을 보고 꽥꽥거려왔다. 마지못해 먹어야하는 푸르죽죽한 이끼를 먹으며 가끔 우물 안으로 떨어지는 벌레를 먹기 위해 서로 싸우다 붉은 달이 뜰 때면 홀린 듯이 더 큰 소리로 꽥꽥거렸다. 우물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열병 같은 감정이 엄습하지만 그나마 우물 안에서는 이끼라도 먹을 수 있고 운이 좋으면 벌레도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실천을 망설인다. 한 지혜로운 개구리가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충고한다. 

“그나마 이 우물 때문에 지금까지 안전하게 우리가 살 수 있었던 거야. 물론 이 안에 있으면 먹이는 풍족하지 않겠지. 하지만 밖에 나가자마자 너희는 뱀들에게 먹히거나, 태양 아래에서 말라 죽거나, 배고픔으로 죽을 거야.”

열심히 허우적대고 있는 늙은 개구리의 앙상한 다리는 껍데기가 벗겨져 뼈가 드러나 있다. 이런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들으면 충고는 진실이 되고 우물은 세계가 된다. 그런데 어떤 개구리는 의문이 품는다. 나는 어찌하여 이 우물에서 살게 된 것일까? 이끼를 먹으며 가끔 떨어지는 벌레에 행복감을 느끼려고 생을 연명하는 것이 내 삶의 전부인가? 그런데, 나는 정말 저들과 같은 개구리인가?

처음으로 의문을 품는 그 순간이 바로 우물을 부수어야할 때이다. 그 때 비로소 우리가 유일하게 알고 있던 세계가 우리를 지켜주는 우물이 아니라 150년이나 먹은 거대한 괴수의 아가리 안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우물을 부수고 밖으로 나선 개구리들은 스스로가 개구리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새로운 발톱이 솟아난다. 날카로운 이가 드러난다. 깃털이 돋아나고 날개가 펴진다. 그들은 대지를 달리며 창공을 나르고 강줄기를 거슬러 헤엄치며 사냥을 한다. 

한 세계가 부서져야한다. 조경이라는 세계 안에서 살고 있는 이들은 갇혀있다. 조경의 일자리는 법규가 지켜주며 조경진흥법이 조경의 영광스러운 미래를 보장해주리라는 신념. 언젠가 정부에 조경직이라는 메시아가 도래하여 우리의 입에 풍족한 만나를 무한히 먹여 주리라는 허황된 희망. 센트럴 파크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조경의 고유한 가치가 존재하며, 그 가치가 불변하는 선이라는 허무한 믿음. 그들은 거짓된 신념, 희망과 믿음 안에 갇혀있다. 만일 법이 규정해주지 않아 조경가라고 불리지 못하고, 조경진흥법이 있어야만 생존가능하며, 조경직이 없어서 아무런 힘도 없고, 어느 먼 나라에서 옛날에 만든 가치를 그대로 맹신해야하는 존재라면 도대체 그런 하찮은 이들이 무엇 때문에 존재해야하는가? 개구리들의 메시아는 영원히 도래하지 않는다. 아무도 밖에서 구원해주지 않는다. 사실 메시아는 이미 도착했다. 그들은 스스로 그들을 지켜주던 세계를 부수어야 한다. 파괴하는 자는 새로운 발톱과 송곳니와 날개를 얻는다. 그리고 영광스러운 짐승은 개구리를 포식하는 자이다. 구원은 애초부터 없다. 개구리의 세계는 쓰러져야할 거대한 괴수의 껍질일 뿐이다. 

발톱과 이가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누군가가 조경을 필요로 한다면 이는 조경이라는 세계 때문이 아니라 조경이라는 무기 때문이다. 세계는 먹이를 사냥할 수 없는 개구리들을 위한 빈곤한 생존의 조건이다. 무기로 사냥을 하는 자는 세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내가 가진 발톱이 아니라면 잡을 수 없는 사냥감, 나의 송곳니로 가장 빠르고 효과적으로 잡을 수 있는 먹이들이 산재하기 때문에 조경가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 이유를 스스로 찾지 못하고 누군가가 알려주어 사냥을 한다면 짐승은 사냥개가 된다. 스스로 잡은 먹이를 주인에게 바치고 생존을 위한 삶만을 사는 노예의 짐승이 된다. 발톱이 있어도 세울 줄 모르며, 송곳니가 있어도 드러낼 줄 모르며, 날개가 있어도 날지 못하는 짐승은 하늘을 보며 울어야하는 시끄러운 개구리로 남을 수밖에 없다. 생각해보라. 주인이 할 가치가 없는 허드렛일만을 하고 있다면 당신은 세계에 갇힌 개구리이거나 무기를 깨닫지 못한 사냥개이다.  

낯선 세계를 목도해야한다. 조경의 가치가 외부에서 주어지기를 거부한다면 스스로 가치를 만들어나가는 길 밖에는 없다. 그 가치는 관습적으로 강요된 타인의 윤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가치는 무엇에 근거해야하는가? 그것은 오늘의 욕망이다. 그것은 자신의 욕망이며 동시에 시대의 욕망이어야 한다. 그 욕망의 종착지는 결정되지 않았고 결코 채워진 적이 없다. 스스로의 가치 위에 선 자는 내려앉을 세계를 파괴했기 때문에 끊임없이 대지와 창공을 배회해야하는 사냥꾼으로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는 부서진 세계의 폐허 위에 견고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다시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 주인을 살해하고 주인 행세를 할지도 모른다. 어떤 종착지에 다다를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욕망이 실현될 때는 죽음이 도래할 때뿐이다. 살아있는 한 갈증은 저주처럼 해소되지 않으며 갈증은 살아있음의 유일한 표식이 된다. 그 어떠한 경로를 택하더라도 스스로 직시한 욕망이 시대의 빈자와 공명할 수 있음을 깨닫는다면 낯선 가치가 태어난다. 그리고 그 가치는 시대의 가치가 된다.
_ 김영민 교수  ·  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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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mkim@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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