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시선] 패배록(敗北錄)

김영민 논설위원(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 교수)
라펜트l김영민 교수l기사입력2020-06-10
패배록(敗北錄)


_김영민(서울시립대 조경학과 교수)



이것은 패배의 기록이다. 패배의 반성도 아니며, 다음의 승리를 위한 복기도 아니다. 비평은 더더욱 아니다. 가시지 않은 신열(身熱) 같은 감정의 잔재이며, 아무도 기억 못 할 안(案)에 대한 하찮은 애도일 뿐이다. 패배자의 개인적 시선에서 쓴, 지극히 주관적인 약 두 달간의 기록이다.

4월 10일. 바이런의 N에게서 전화가 왔다. 잠실한강물놀이장 공모전을 함께 하지 않겠냐고. 아직 사람들이 진가를 알아보지 못하는 백자 같은 N은 내가 가지지 못한 것들을 가진 조경가였다. 나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같이하자고 했다.

4월 20일. 지침서를 보고, 지난 계획을 읽고, 다시 지침서를 보고, 법규를 찾아보고, 사례들을 찾아보고, 대상지를 한 번 가보았다. 그리고 다시 지침서를 보았다. 아무것도 그리지는 않고 설계를 했다. 학생들과 논의를 하고, 설계를 생각했다. N과 미팅을 하고, 설계를 생각했다. 사례를 더 찾아보고, 다시 지침서를 보았다. 그리고 설계를 생각했다. 운전하면서 설계를 생각하고, 밥을 먹으며 설계 생각했다. 아무것도 그리지는 않았다.

4월 26일. 그림을 그리다가 어색함이 사라지지 않아 작은 도면으로 바꾸었다. 그랬더니 배가 고플 때까지 그림을 그릴 수가 있었다. 다시 어두워질 때까지 그림을 그렸다.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것과 다름이 없었지만, 그만해도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짧아진 색연필을 내려놓았다. 손톱이 푸르스름했고 내일은 큰 도면으로 바꾸어도 될 것 같았다.

4월 28일. 세 개의 안이 있었다. 나의 안은 마지막으로 보여주었다. N은 나의 안으로 가자고 했다. N이 안이 마음에 드니 배치도와 조감도부터 제출을 위한 프로덕션을 곧장 시작하겠다고 했다. 긴 논의는 하지 없었고, 별다른 이견도 없었다.

5월 11일. 연휴가 있었고, 그사이 세 번의 미팅을 했다. 이 주 동안 N의 팀은 설계를 거의 완성단계로 다듬어 놓았다. N의 팀은 3명이었고, 다른 긴박한 프로젝트들도 함께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놀라운 속도였다. N은 무리라고 생각되는 요소들을 꼼꼼하게 정리하였다. 우리 팀은 마치 하나의 자아를 가진 것처럼 앞으로 나아갔다. 우리는 지침을 다시 보고 우리의 약점과 강점을 점검하고 안을 고쳐나갔다. 아직 빈칸으로 남겨진 다이어그램들은 내가 채워 넣어야 했다.      

5월 27일. 일주일 전에 우리는 안을 제출하였고, 다섯 개의 결선작에 들었다. 결선작에 선정되지 않으리라고는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당선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남기지 않기 위해 마음을 다잡았다. 일주일 뒤에 발표가 있다. 

6월 3일, 10시. 경쟁자들은 심사위원 뒷자리에 앉아 서로의 발표를 볼 수 있었고 과정은 인터넷으로 중계되었다. 낯선 방식이었다. 처음은 동심원의 발표였다. 동심원은 언제나 모든 공모전에서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이다. 그러나 발표는 그리 매끄러운 느낌은 아니었다. 두 번째, 우리 팀의 발표자 N은 차분하게 말했고, 질문에는 짧게 대답했다. 나는 우리의 발표가 훌륭했다고 생각했다. 세 번째, 그룹한과 토포텍(Topotek1)의 안은 그 조합만으로 화제가 되었다. 안도 특별했고, 발표도 좋았다. 다만 자연정화에 대한 강조가 오히려 화가 될 듯싶었다. 여러 사무실과 전문가의 연합팀이었지만, 모두가 A 교수팀이라고 불렀던 네 번째 팀의 발표는 젊은 M이 했다. 안은 세련되고 파격적이었으나 현실적 문제점들이 날것 그대로 드러났다. 젊은 M은 발표로 약점을 충분히 가리지는 못했다. 다섯 번째, 건축과 교수인 S의 발표는 유쾌했다. 누가 보아도 공사비를 훌쩍 넘긴 안에 대해서 정작 발표자도 실현 가능성에는 큰 미련은 없다는 듯 자유롭게 발표를 했다. 

6월 3일, 13시 30분. 예정된 점심시간을 한참 지나 모인 자리에서 심사위원장은 세팀을 결선에 올리겠다고 했다. 동심원, A 교수팀, 그리고 우리였다. 그때 건축가였던 심사위원이 우리 안의 문제를 지적하며 결선에 다른 팀이 올라가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한 심사위원이 현실성과 이용성 때문에 A 교수팀의 안보다 다른 안이 올라가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논의가 길어졌다. 나는 건축가가 가진 적의에 가까운 태도를 잘 이해할 수는 없었다. 기존의 수영장 구조를 유지해 새로움이 없다는 취지였지만, 우리 안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인지, 다른 안을 선호해서 그런 발언을 하는 것인지 정확히 파악되지는 않았다. 건축가가 주장을 굽히지 않자, 나에게 설명의 기회를 주었다.

 “기존의 수영장을 최대한 활용하라는 것은 지침에 여러 번 나온 사항이었고, 오히려 지침을 유일하게 지키면서 새로운 설계를 제안한 것은 저희 밖에 없습니다.”

지침을 이야기하자 그제야 건축가는 발언을 멈추고 지침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그 건축가는 지침을 처음 읽어보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사워원장이 그사이 정리를 해서 우리를 포함한 세 안을 결선에 올렸다.

6월 3일, 14시 30분. 경험이 많은 이들은 이미 공모의 무게 추는 동심원에게 기울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동안 유일하게 별다른 지적을 받지 않은 안이기 때문이었다. 공모에 당선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모든 안들을 압도하는 것. 다른 하나는 상대적으로 문제가 없는 안을 만드는 것. 프로의 공모에서 우열의 격차는 크지 않기 때문에 전자의 경우는 잘 일어나지 않는다. 후자의 방식을 따를 때 심사위원 중에서 적을 만들면 안 된다. 누군가 강력하게 반대를 하면 그 안은 가망이 없다. 이미 건축가는 적의를 드러냈고, 최대한 숨겼어도 그에 대한 나의 적의도 드러났다. 그리고 지침에 대한 나의 반론은 건축가의 적의를 잠재우기는커녕 불을 지폈다.

건축가는 재개된 논의에서 설계가는 지침을 운운하기보다 디자인을 통해 정당성을 보여야 한다고 야단을 쳤다. 이제 건축가를 설득할 수 있는 일말의 여지도 사라졌다. 사실 발표 때는 우리 안보다 A 교수팀의 안이 더 많은 문제점을 지적받았다. 그러나 그 디자인에는 문제점의 심각성을 감쇄할만한 대범함과 강렬함이 있었다. 우리가 직면한 더 큰 문제가 있었다. 가장 적은 지적을 받은 동심원과 설계의 방향이 유사하다는 점이었다. 동심원 안의 유일한 문제가 있다면 지루하고 무난하다는 점이었다. 한 심사위원이 동심원에게 물었다.

”저 안이 캐리비안 베이와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질문이라기보다는 특색이 없다는 지적이었지만, 잠실수영장이 저렴한 캐리비안 베이면 안 될 이유도 없었다. 결국, 우리의 안은 흥미로움에서는 A 교수팀에게는 밀렸고, 문제없음에서는 동심원에게 밀렸다. 우리는 적절히 흥미로운, 문제가 적은 안이었지만, 흥미로움을 지지하고 싶은 심사위원들과 문제없음을 지지하고 싶은 심사위원들 사이에서 우리의 안은 당선작은 아니었다.

6월 3일, 15시 30분. 동심원 4표, A 교수팀 4표, 우리는 2표를 받아 3위로 떨어졌다. 한 심사위원이 내용상으로는 결선에 올라가야 했을 작품이라고 말해주었고, 심사위원장은 우리에게 표를 던졌다고 위로를 해주었지만, 위로는 위로일 뿐이다. 그리고 공모는 당선작과 그 외의 패작(敗作)들로 나뉠 뿐이다. 공모에서 아름다운 패배 같은 것은 없다. 예상대로 최종적으로 동심원이 당선되었고, 우리는 패할만해서 패했다. 그뿐이다.

6월 5일. 3시. 이틀째 잠이 잘 오지 않는다. 두 달간 무겁고 무뎠던 개념과 감각을 최대한 날카롭게 갈다 보면 하나의 칼이 된다. 아무것도 베지 못한 칼날이 어디선가 웅웅거린다. 결국에 이 칼은 무뎌져 경험이라는 이름으로 사라질 운명이고, 다른 자리에서 다른 칼을 또다시 갈게 될 것이다.
















글·사진 _ 김영민 교수  ·  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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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mkim@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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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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