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시선] 조경가 코챠콘(Kotchakorn)

김영민 논설위원(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 교수)
라펜트l김영민 교수l기사입력2020-08-25
조경가 코챠콘(Kotchakorn)


_김영민(서울시립대 조경학과 교수)



2005 봄

신들의 이름을 빌려온다는 태국 이름들은 매우 길고 발음도 어려워 우리는 모두 그녀를 코챠콘이라는 이름 대신 코치라고 불렀다. 눈이 무척 크고 항상 웃을 때 부끄러운 듯한 표정을 짓는 코치는 명랑해서 주변의 분위기를 밝게 만들었지만, 늘 어른스러워 말을 항상 경청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차분하면서도 밝고, 겸손하면서도 자신감이 있고, 우아하면서도 수수한 그녀를 선생들도, 친구들도, 심지어는 동네 가게 주인들도 모두 좋아했다. 

코치는 하버드 대학원에 오기 전 콜로라도의 조경회사에서 일했는데 나에게 회사작품집이 나왔다면서 보여준 적이 있다. 코치는 매우 정교하고 아름답게 핸드 드로잉을 보여주었다. 자하 하디드와 웨스트 8을 동경하며 손으로 그린 드로잉을 구시대의 유물 정도로 취급했던 나에게 그런 드로잉은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했다. 언젠가 벚꽃이 가득 핀 봄날 유학생들끼리 와인을 마신 적이 있었다. 모두가 벚꽃만큼 취기가 올라 걸었던 캠브리지의 비 오는 거리에서 좀처럼 술에 취하지 않던 코치가 취해 나에게 말을 했다. 

좋은 조경을 하려면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해. 그러니까, 너도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해.

나는 그 말이 내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말처럼 들려서 한참을 생각하며 길을 걸었다.


2013 가을

요시키가 서울에 방문했다. 대학원 시절 가장 친했던 요시는 동경대에서 스튜디오 수업을 하게 되어 우리 학교의 시설을 견학하고 싶다고 했다. 인사동의 한 막걸리 집에서 동기들의 이야기를 나누다가 코치에 대해서도 물어보게 되었다. 요시는 자기도 건너 들은 것인데, 코치는 졸업 후에 태국으로 돌아갔다고, 그리고 어마어마한 집안의 누군가와 결혼을 했다고, 조경을 계속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고 했다. 


2015 여름

우리 학교는 매해 여름 국제워크숍을 하는데 태국의 출라롱콘(Chulalongkorn) 대학이 그해 주최여서 방콕에 2주간 머물게 되었다. 코치는 출라롱콘 출신이었다. 나는 교수들에게 코치에 관해 물어봤다. 당연히 모두 주목받는 조경가인 코치를 알고 있다며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거의 10년 만에 만난 코치는 내가 기억하던 모습 그대로였다. 예전처럼 밝고, 어른스럽고, 겸손하고, 부끄러운 듯 웃었다. 그녀는 나를 툭툭이(Tuk-Tuk)를 태워 그녀가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를 보여주었다. 

Siam One Square는 상업몰이었는데, 설치 예술에 가까운 조형적 수직 정원이 중심이 되는 프로젝트였다. 몰 옥상에는 Siam Green Sky라는 옥상 정원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도시농업을 주제로 하였지만, 식재가 작물로 이루어졌을 뿐 기하학적 구성의 세련된 형태미가 돋보이는 설계였다. 자리를 옮겨 Suan Luang Square라는 프로젝트에 데리고 갔다. 기존의 도시 조직을 재생한 것으로 보이는 가로 공간은 아직 개장하기 전이었다. 회색 건물들 사이로 붉은색 프레임들이 설치되어있었고 색이 다시 입혀진 폐자전거들이 설치 미술처럼 걸려 있었다. 나는 그녀의 작업을 보고서야 비로소 예전에 본 콜라라도의 무난한 프로젝트와 목가적인 핸드드로잉이 그녀의 설계가 아님을 깨달았다. 그녀는 예리한 직선으로 공간을 과감하게 베어낼 줄 알았고, 태국의 태양처럼 강렬한 색을 발하는 설계를 하고 있었다.


Siam Green Sky ⓒLandprocess


Suan Luang Square ⓒLandprocess



해가 지자 그녀는 새벽의 사원이라 불리는 왓아룬을 바로 앞에서 볼 수 있는 근사한 레스토랑에 데리고 갔다. 그녀는 설계를 다시 시작한 지 오래되지는 않았다고 했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고, 자기가 설계를 한다는 것이 그리 쉬웠던 것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깊은 속내까지 털어놓을 만큼 친한 사이는 아니었기에 더 자세한 이야기는 물어보지 않았다. 


2016 가을

코치에게서 갑자기 이메일이 왔다. 서울에 얼마간 있을 것 같다고. 우리는 종로와 청계천을 걸었다. 그녀는 청계천보다 오히려 새로 정비된 종로 거리의 깔끔함과 관리상태에 더 큰 찬사를 보냈다. 한참을 걷다가 불교 신자인 코치를 위해 사찰 음식전문 레스토랑에 갔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최근의 프로젝트와 설계에 관해서 물어보았다. 늘 웃는 그녀는 이번에 그녀는 웃지 않았다.

요즈음은 조경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고 했다. 어려움이 많다고. 사회적 편견이라는 것도 있고, 집안의 문제도 있고, 개인적인 문제들도 있다고. 그래서 요새는 조경보다 심리치료에 관심이 많다고. 한국에 자주 오는 이유도 조경과 관련된 일 때문이 아니고 오히려 마음을 치료하는 여러 방법에 관한 공부 때문이라고 했다. 나는 편견과 문제가 무엇인지 궁금하기도 하였지만, 세세한 것들까지 물어볼 만큼 친한 사이는 아니라 물어보지 않았다. 

내가 아는 너는 훌륭한 조경가고, 나는 네가 조경을 계속했으면 좋겠어. 왜냐하면, 네가 조경을 계속한다면 대단한 작품들을 만들어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야.

코치는 다시 부끄러운 듯 웃었다. 지금 온 힘을 다해서 진행하는 Chulalongkorn Centenary Park라는 프로젝트가 내년에 완공되니 나중에 태국에 오게 되면 꼭 연락하라고, 완성된 작품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2019 봄

인터넷에서 최근 주목받고 있는 조경 프로젝트들을 찾아보다 낯익은 이름을 보았다. Chulalongkorn Centenary Park. 방콕의 빽빽한 도심의 야경 속에서 에메랄드 색으로 빛나는 공원 사진을 보고 숨이 막혔다. 거대한 오픈스페이스와 물을 나지막하게 땅속으로 묻힌 듯한 건물이 둘러쌓고 있었고 옥상은 녹색으로 채워져 또 다른 에메랄드의 띠를 만들어내었다. 공원은 시민들의 쉼터이자 물을 처리하는 저류지로서 수차례 홍수를 겪은 방콕의 전략적 도시기반시설이기도 했다. 공간적 개념보다도 사진에 보여는 디테일에 나는 놀랐다. 공공프로젝트에서 디테일을 섬세하게 다루기란 쉽지 않다. 설계가 아무리 잘 되었어도, 예산의 벽에, 관계자의 생뚱맞은 요구에, 행정적 문제에, 그리고 시공의 현실에 걸려 못 봐줄 프로젝트가 나오는 경우가 태반이다. 태국에서 이런 모든 어려움이 우리나라보다 더 수월하게 해결될 리는 만무했다. 코치는 이런 작품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부단히도 많이 싸워야 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Chulalongkorn Centenary Park의 전경 ⓒLandprocess 


Chulalongkorn Centenary Park의 이벤트 ⓒLandprocess

코치에게서 갑자기 이메일이 왔다. 연초에 광화문 광장 공모전에 당선된 것을 축하한다고, 이번에 한국에 가는데 혹시 당선안을 설명해줄 수 있냐고 물어보았다. 나는 그때 미국에 체류 중이어서 코치를 만날 수가 없었다. 함께 일을 했던 회사를 소개해 주었다. 이제 세계적으로 유명한 TED 펠로우를 알게 되어 영광이라고 농담 같은 덕담을 덧붙였다. 하지만 왠지 나는 그녀의 프로젝트를 칭찬하지는 않았다. 4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행정중심복합도시 상징광장의 시공 상태가 마음에 안 들었기 때문이었는지, 광화문 광장 공모전이 당선되고도 미국에 체류하는 바람에 제대로 참여할 수가 없다는 상황에 대한 불만이었는지, 아니면 그냥 코치의 작품에 샘이 났기 때문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그녀의 아름다운 프로젝트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2020 여름

올해 국제워크숍의 차례는 다시 태국의 촐라롱콘이었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우리는 원격으로 워크숍을 진행하게 되었다. 촐라롱콘의 책임 교수가 자랑스럽게 이번에는 대단한 특강을 준비했다고 말하면서 코치를 소개했다. 코치는 이제 유명한 조경가를 태국의 셀럽이었다. Chulalongkorn Centenary Park는 가장 권위 있는 ASLA 어워드를 포함해 수많은 상을 수상했다. Times지가 뽑은 2019년을 이끌 100인으로 선정되었으며, 하버드 대학이 뽑은 미래를 이끌 여성 동문 중 하나로 뽑히기도 했다. UN 회의를 비롯한 각종 국제회의에서 기후변화를 논의하는 태국의 대표이기도 했다. 

특강에서 그녀는 Thammasat University의 옥상정원 프로젝트를 소개했다. Chulalongkorn Centenary Park보다 한층 더 세련되어지고 발전된 디자인이 돋보였다. 계단식 테라스로 구성된 거대한 옥상정원은 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녀는 어차피 옥상을 정원으로 꾸며보았자 엄청난 관리비가 들어갈 텐데, 그럴 바에는 생산이 가능한 작물을 심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벼야말로 태국의 모든 문화를 상징하는 식물이라고 말했다. 나는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 한국에서 모두가 열광하는 피에트 우돌프의 자연식 식재의 핵심도 사초인데, 결국 사초도 벼과 식물이다. 

그런데 프로젝트에서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한 부분은 식재도, 그린인프라도, 문화적 모티브도 아닌, 디자인의 조형적 독특함이었다. 분명 코치의 디자인적 조형성은 우리가 지금도 동경하며 따라 하는 미국과 유럽의 조경 언어와 달랐다. 강한 대칭적 구조와 장식적 패턴과도 같은 세부적 공간 언어들. 나는 그 공간에서 만다라의 구성을 따른 태국 사찰의 언어를 느끼기도 했으며, 태국의 직물의 기하학적 패턴들을 떠올리기도 했다. 어쩌면 태국성과는 관련 없는 조경가 코치의 독특한 언어였을지도 모르겠다.


Thammasat University의 구성 ⓒLandprocess


Thammasat University의 수체계 시스템 ⓒLandprocess


Thammasat University의 전경 ⓒLandprocess


2020 나의 조경

나는 젊은 조경가들이 모인 단톡방에서 코치의 작품들 링크를 올리며 왜 우리는 아직 이 정도로 강력한 조경작품을 만들지 못했는지, 반성 섞인 질문을 던졌다. 내가 굳이 작품을 언급하지 않아도 모두 이미 코치의 프로젝트를 알고 있었다. 

한 소장님이 태국에는 부유한 사람들이 많아 조경에 돈을 아끼지 않기 때문에 조경이 좋다고 했다. 나는 잘 모르겠다고 했다. 우리나라의 일인당 국민 소득은 태국의 4배 정도인데, 태국의 부자와 한국의 부자 중 누가 돈이 많을지, 누가 더 조경에 돈을 아끼지 않을지는 잘 모르겠다고. 누군가는 태국은 기후가 좋아서 식물 재료가 많고 식물 연출이 잘된다고 했다. 나는 그 역시도 잘 모르겠다고 했다. 코치의 작품들은 열대 우림의 화려한 식물로 장식되어있지 않다. Thammasat University의 식재 역시 조촐한 벼가 중심이다. 

이런저런 논의를 하다가 갑자기 코치도 태국에서 이런 이야기들을 들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원래 돈이 많아서, 집안이 좋아서, 명문대를 나와서, 미국에 유학을 갔다 와서, 외모가 좋은 젊은 여자라서, 그래서 좋은 조경이 나왔다. 다 헛소리다. 같은 조건을 갖춘 사람은 수없이 많지만 저런 작품을 만들어낸 사람은 코치 단 한 명이다. 내가 아는 코치는 결코 쉽게 조경을 하지 않았다. 타고난 재능과 주어진 조건으로 만들어진 프로젝트가 아니다.

우리의 조경가들이 코치보다 재능이 없다거나 열심히 하지 않았을 리는 없다. 내가 아는 한 모든 한국의 조경가들은 그 세계의 그 어떠한 조경가들보다 재능이 뛰어나며 치열하게, 진심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 물론 코치의 프로젝트가 꼭 우리의 프로젝트보다 낫다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유명세가 프로젝트의 우수함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아닌 태국의 조경을 세계가 주목하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이며, 이런저런 핑계를 찾으며 자신을 스스로 합리화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여전히 스스로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을 모르겠다. 한국 조경을 내가 논하는 것 자체가 주제넘은 일이기 때문에, 나에 대한 반성밖에는 못 하겠다. 내가 자조했던 최선은 최선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냥 이 정도까지가 최선이었다고 합리화를 했던 것이 아닐까. 설계가 좋은데 결과가 안 좋은 프로젝트는 헛소리다. 그것은 그냥 안 좋은 설계이다. 조경가는 그림뿐 아니라 그 결과까지, 그리고 그 이후까지 최선을 다해 책임을 져야 한다. 모든 프로젝트의 모든 단계에 온 힘을 다해야 한다. 

나는 앞으로 그래야 한다. 그래야 좋은 조경을 할 수 있다. 
글·사진 _ 김영민 교수  ·  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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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mkim@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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