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시선] 고대 히타이트 가상경관 제작일지 1편

김익환 논설위원(이스탄불 공과대학 조경학과 조교수)
라펜트l김익환 교수l기사입력2022-12-16

고대 히타이트 가상경관 제작일지 1편




_김익환 이스탄불 공과대학 조경학과 조교수



튀르키예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아나톨리아 지방은 동양과 서양, 그리고 아프리카가 만나는 장소인 만큼 고대부터 수많은 제국과 민족, 국가들이 끊임없는 흐름을 만들어 왔다. 그 중 대표 사례를 꼽으라면 고대 히타이트 제국일 것이다. 우리나라 의무 교육과정 중, 최초의 철기국가라는 공식과 함께 다들 한번쯤은 들어봤을 히타이트 제국은 기원전 1600년경부터 기원전 1178년까지 약 500년동안 아나톨리아 지방을 재패하고 이집트 왕국과 호각을 다루던 그 시절의 강대국이었다. 지금도 튀르키예 국토 전반에 걸쳐서 당시의 다양한 유적들을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그 와중에도 튀르키예 국토의 배꼽마냥 한가운데에 카이세리(Kayseri)라는 지역이 있다. 그리고 이곳에는 고대 시절 동양과 서양, 그리고 아프리카를 잇는 큘테페(Kultepe)라는 거대한 무역 도시가 있었다. 물론 지금 시점에서 보면 인구라던가 도시 규모가 보잘 것 없겠지만, 그 시절에는 가히 지금의 맨해튼이라고 할 만큼 크고 번성한, 그리고 본격적인 무역 도시였다. 수많은 상인들이 당나귀와 낙타의 등에 철광석이나 광물, 소금 등을 싣고 오가며 교역을 하던 장소였으며, 이집트의 거상들부터 저 멀리 북유럽과 아시아에서 넘어온 상인들까지 흔하게 볼 수 있는 활기찬 대도시였다.

현재 해당 지역은 앙카라 대학교 고고학과에서 관리감독을 맡아 일련의 발굴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다. 다만 부지가 원체 큰 데다가(진짜 말 그대로 도시 하나 사이즈다), 유물들이 끊임없이 나오는지라(여기를 걷다 보면 문자 그대로 유적이 발에 채인다) 수십 년에 가까운 발굴 계획에 따라서 차근차근 구역 단위로 발굴을 진행하고 있다. 참고로 아직 전체 발굴 현장의 5%도 채 발굴되지 못하였다고 한다. 게다가 규모가 워낙 크다 보니 앙카라 대학의 고고학팀이 직접 발굴을 주도하고 있지만, 전 세계 여러 국가로부터 펀딩을 받고 각국 대학교들과 협업으로 작업을 한다. 우리나라도 고려대학교가 주기적으로 찾아와서 발굴을 진행한다.


Kultepe 유적의 일부분 ⓒKültepe’deki kazılarda dini inanç sembolleri açığa çıkıyor - Kültür-Sanat haberleri – Sözcü 

그런 앙카라 대학에서 연락이 왔다. 큘테페 지역과 히타이트 제국의 고고학적 가치가 남다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이집트 고대문명과 같은 인지도가 없는 게 안타깝다면서, 대중 대상의 일련의 홍보 프로젝트를 진행하고자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시작으로, 발굴 현장을 입장하는 곳에 박물관을 짓고 이를 중심으로 고대 마을을 그대로 재현한 마을을 조성하고, 다양한 프로그램이 있는 테마파크 조성을 계획하고 있다고 하였다. 영화 쥬라기 공원 속의 테마파크에 가까운, 거대한 프로젝트였다. 이를 위하여 튀르키예 중앙정부는 물론, 카이세리 지방정부, 심지어 유럽연합(EU)으로부터도 펀딩을 받는다고 하였다. 향후 테마파크가 완공되면 지역 축제와도 연계를 계획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런 프로젝트가 시작되는 과정에서, 고대 도시의 가상경관을 만들어줄 수 있겠냐는 문의가 들어왔다. 박물관 방문객들이 HMD 장비를 착용하여 고대의 히타이트 제국의 거리를 걸으며 체험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요청이었다. 또한 해당 가상경관을 영상으로 편집하여 박물관 홍보 자료로 쓰고자 하며, 무엇보다도 향후 테마공원이 완공되면 만들어진 가상경관을 활용하여 보다 능동적인 게임 매체로 발전시키고 싶다고 하였다. 

박물관의 요청 사항들을 죽 살펴보고 있노라면, 가상공간의 장점을 모두 수반함을 알 수 있다. 첫 번째, 설계 및 제작이 실공간보다 상대적으로 용이하다. 토목 및 건설 등과 달리 거대 자본이 필요하지 아니하며,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 내에 완성된 공간을 제공할 수 있다. 두 번째는 확장성이다. 가상경관은 공간으로의 특성을 지니지만, 그와 동시에 매체, 미디어로의 특성을 공유한다. 실공간은 공간을 기반으로 다양한 파생상품이나 확장된 시장력을 확보하기가 상대적으로 힘들다. 하지만 가상경관은 매체의 특성을 지닌 탓에, 원본을 바탕으로 다양한 확장이 수월하다. 게임으로 발전시킬 수도 있으며, 홍보 영상으로 손쉽게 편집할 수도 있다. 필요에 따라서는 웹툰 혹은 영화 소스로도 쉽게 발전시킬 수 있다. 마지막으로는 접근성이다. 실공간에는 아무리 멋지고 완벽한 공간을 조성하더라도 방문객 수는 한정된다. 물리적 거리과 함께 다양한 기회비용을 극복해야만 한다. 그에 반하여 가상경관은 최소한의 장비와 온라인 연결만으로 누구든 쉽게 방문하여 해당 공간을 체감하고 느낄 수 있다. 조경학도라면 누구나 아는 미국 하이라인 공원의 연간 방문객은 약 800만 명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브 온라인(EVE online)이라는 SF 게임에서는 약 950만 명의 사용자들이 접속하여 우주 공간을 느끼고 있다. 

물론 각각의 공간들이 제공하는 경험의 질적 수준은 다르다. 다를 수밖에 없다. 오감을 활용한 실공간 체감과 모니터 너머로 펼쳐지는 공간 체감 사이의 격차는 상당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앞선 글들에서도 몇 번 언급되었듯이, 그런 경험의 차이는 기술의 부재로 인한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하다. 기술은 우리의 상식을 넘어 아득한 수준으로 지금도 발전하고 있으며, 실공간에서의 경험에 비견된, 혹은 더한 경험을 제공하는 가상경관의 도래는 상상 이상으로 가깝다.              

아무튼, 흥미로운 프로젝트였고 참여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리고 요청에 따라 시공 중인 박물관과 발굴 현장을 둘러본 뒤, 발굴 대장인 책임 교수와의 미팅에서 아주 신선한 부탁이 추가되었다. 바로 고고학적 고증을 적당히 무시해달라는 요청이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기존 고고학계에서도 VR 혹은 HMD 활용이 다양한 프로젝트에 적용 되었지만, 이들은 어디까지나 고고학적 정보를 보존하는 용도에 한하여 유효했다는 점이다. 즉, 3D 스캐너를 활용하여 유적의 정확한 수치를 파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가상경관을 만들면 물론 ‘철저하게’ 정확한 공간이 만들어지겠지만, 해당 데이터로는 연구와 보존 외의 목적, 즉 대중들에게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매체로의 발전이 힘들다는 지적이었다. 하지만 본 프로젝트는 고고학적 정보 보존이 목적이 아닌 고고학 테마파크를 만드는 것인 만큼, 고증에서 어느 정도 타협을 하더라도 방문객들에게 흥미를 유도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달라는 요청이었다. 어차피 고증에 관련된 내용은 따로 연구진들이 다루고 연구를 하고 있는 만큼, 철저하게 대중적 수요에 맞는 콘텐츠를 원하였다.     

즉, ‘연출’이 가미된 공간을 요구하였다. 현실의 정교한 복사본이 아닌, 사용자의 감정과 행위를 유도하는 연출된 공간의 설계. 이것이야말로 조경 설계가 그 진가를 발휘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겠는가? 기쁜 마음에 연구원들을 소집하고 작업을 시작하였다.(다음 화에서 계속)
글·사진 _ 김익환 교수  ·  이스탄불 공과대학
다른기사 보기
iikimss3@gmail.com

네티즌 공감 (0)

의견쓰기

가장많이본뉴스최근주요뉴스

  • 전체
  • 종합일반
  • 동정일정
  • 교육문화예술

인기통합정보

  • 기획연재
  • 설계공모프로젝트
  • 인터뷰취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