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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과 식물 ; 자연을 닮아가면서 사는 사람들 _ 그림 속의 식물들

월간 환경과조경20085241l환경과조경

자연의 위대함을 받아들이는 모습은 나라마다 다르다. 서양에서 자연은 인간의 힘을 드러낼 수 있는 정복의 대상이었고 동양에서 자연은 찬탄의 대상이었다. 동양인들에게 자연이 찬탄의 대상이었다는 전제는 동일하지만 찬탄을 표현하는 형식은 또한 제각각이다. 중국 사람들이 과장적인 몸짓으로 드러냈다면 일본 사람들은 인공적이고 정교하게 드러냈다. 그래서 중국 미술은 필요이상으로 장식적이고, 일본 미술은 공예품처럼 인위적이다. 중국의 천안문이 그 크기와 현란함으로 사람의 혼을 빼앗는다면 일본의 히메이지성은 잘 만든 블록인형처럼 인공적이다. 그렇다면 한국 사람들의 표현 방식은 어떠했을까.

 

1. 손질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이 한국의 미
한국의 미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자연의 미’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의 손을 빌어 아름다움을 표현하되 손질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 그것은 마치 화장은 하되 전혀 화장한 것 같지 않은 자연스러운 얼굴이 가지는 아름다움과 같은 종류일 것이다.
그런 자연스러운 한국미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삼척에 있는 <죽서루>이다. 관동8경 중의 하나인 죽서루는 기둥과 기둥사이의 간격도 일정하지 않고 기둥의 배열도 서로 다르다. 또한 기둥의 높이도 제각각이다. 왜 이렇게 지었을까?
<죽서루>는 오십천 하구의 낭떠러지에 자리잡고 있다. 누각에 앉아 낭떠러지 바로 아래의 시퍼런 물을 내려다 볼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러다보니 높이가 서로 다른 바위 끝에 건물을 세울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누각을 짓는 솜씨가 참으로 절묘하다. 울퉁불퉁한 바위를 평평하게 밀어버리는 대신 각각의 바위에 맞게 기둥의 길이를 다르게 자른 것이다. 기둥의 하단부는 그랭이질하여 기둥과 바위가 서로 한 몸처럼 맞물리도록 배려했다. 이런 건축법은 바닥을 일자로 밀어버린 후 기둥을 똑같은 높이로 잘라서 마름질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수고와 노력이 필요하다.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자연에 순응해서 살겠다는 의지는 다양한 예술 형식을 낳게 되었다. 경주 남산 꼭대기 옛 용장사터에 있는 <용장사삼층석탑>을 보면 우리 선조들이 동일한 조건 속에서 얼마나 기발하게 그 조건을 변형시킬 줄 알았는가를 확인해 볼 수 있다.
우선 탑을 먼저 확인해보자. 탑은 맨 아래의 기단부와 중간의 탑신부, 그리고 맨 위의 상륜부로 구성된다. 이 구조가 우리나라 석탑의 기본골격이다. <용장사삼층석탑>도 이 규정을 토대로 세워져서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부가 올려졌고 상륜부는 결실되었다. 그런데 <용장사삼층석탑>의 매력은 기단부에 있다. 기단부의 하대석을 잘 다듬은 판석대신 산꼭대기의 자연암반으로 대신한 것이다.
어떻게 이런 발상을 할 수 있었을까.
이 탑은 통일신라 때 세워진 탑이다. 통일 신라의 수도였던 서라벌은 ‘한 집 건너 절이 들어서 있었다’고 할 정도로 불교가 융성했던 시대였다. 그런 도시를 지키고 있는 산이 바로 남산이다. 그러니까 남산은 불국토를 지키는 주산인 셈이다.
이 우주에 수많은 부처님이 계시듯 경주 남산에는 곳곳에 부처상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부처상이 많다고 해서 남산 자체가 불국토가 되지는 못한다. 이런 한계를 간단히 뛰어 넘어버린 발상이 바로 ‘탑’이었다. 남산의 바위를 탑의 기단부로 함으로써 남산 전체를 탑이 되게 한 것이다.
인간이 만드는 예술작품이나 조형물이 꼭 인공적일 필요가 없다는 사고방식. 어쩔 수 없이 사람의 손을 빌리더라도 인간의 손길을 최소화하고 자연스러움을 드러내야한다는 철저함이 <죽서루>와 <용장사탑>같은 독창적인 작품을 만들게 한 원동력이 된 것이다. 그것은 또한 어떤 경우라도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자연을 지키겠다는 이 땅의 사람들의 바람이자 생활방식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사는 곳에 꽃이 피고 나무가 자랐다. 자연을 삶 속에 끌어 들여 자연을 닮아가면서 살고자했던 사람들 속에 꽃과 나무가 자라고 새가 울었던 것이다. 이제 그 사람들이 살았던 마을로 내려가 보자.

 

2. 꽃을 상처내지 않는 꿀벌처럼
김홍도(1745~1806?)가 그림을 그리고 그의 동갑내기 친구인 이인문(1745~1824)이 화제를 쓴 <마상청앵도>는 사대부의 여유와 시정을 통해 봄날의 서정을 한껏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선비의 풍류와 봄날의 서정. 이런 주제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김홍도는 구도를 아주 단순화시켰다. 선비와 하인의 옷은 철선묘로 단순화시킨 반면 말과 갓과 풀과 버드나무잎은 선없이 담묵으로만 처리하여 대조를 이루게 했다.
여기서 선비가 봄을 즐기는 모습은 그저 바라보고 듣고 느낄 뿐이다. 꽃을 아름답다하여 꺾는다거나 꾀꼬리 소리가 청아하다하여 새장 속에 잡아 가두지 않는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상태를 변형시키지 않고 즐길 뿐이다. 꿀벌이 꽃에서 꿀을 따지만 꽃에는 상처를 입히지 않는 것처럼 선비 또한 봄을 즐기되 버드나무와 꾀꼬리에게 아무런 해를 주지 않는다. 이것이 우리들이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고 자연을 즐기는 방법이었다.
우리 나라 사람들만큼 여행을 좋아하는 민족이 또 있을까. 사계절이 뚜렷한만큼 계절마다 바뀌는 자연을 찾아 짚신이 닳아지도록 돌아다녔다. 조선 순조 때 홍석모가 지은 『동국세시기』와 김매순이 지은 『열양세시기』를 보면 상춘객들이 앞다투어 꽃구경을 떠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그들 또한 꽃에 상처를 입히지 않는 꿀벌처럼 꽃만 감상하고 돌아왔을 뿐이다. 풍란이 예쁘다면 통째로 캐다 자기 집 화단에 심어놓는 오늘날의 우리하고는 다른 모습이었다.

 

3. 우리의 삶 곁에서 꽃은 피었다 진다
꽃과 나비를 생각하면 곧바로 떠오르는 작가가 신사임당일 것이다. 율곡 이이의 어머니로 더 잘 알려진 신사임당은 시서화에 두루 능했다. 그 중에서도 여성의 섬세함을 잘 살려서 그린 <초충도>는 그림의 소재가 꼭 명산대천일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자신의 삶 곁에서 피었다 지는 꽃과 풀도 훌륭한 소재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해주었다. <수박과 들쥐>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소재이다. 한창 맛이 들기 시작한 수박을 두 마리 들쥐가 파먹고 있는 그림이다. 소재를 찾아 멀리 떠나지 않아도 눈을 들어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발견할 수 있다. 무덤가에나 야산에 지천으로 널려 있던 패랭이꽃도 마찬가지다. 이 그림은 운신이 자유롭지 못했던 조선시대의 여성이 자신의 한계 내에서 어떻게 자신의 꽃을 피워낼 수 있는가를 보여준 꽃같이 소중한 그림이다. 그래서 이 그림은 꽃보다 더 아름답다.

 

4. 꽃에 담은 축복과 바람
붉은 태양이 떠 있는 산 아래 상서로운 구름이 흐르고, 기암괴석이 멋드러진 계곡 옆에는 새와 동물이 평화롭게 놀고 있다. 화려한 오방색이 주가 되는 10폭 병풍에는 우람한 소나무 그늘 아래서 학과 사슴과 거북이가 한가롭다. 현실에서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다.
이 그림은 <십장생도 10폭 병풍>이다. 늙지 않고 영원히 사는 ‘불로장생’의 염원과 바람을 담은 그림이다. 늙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에 더해 자손도 많고 잘 살고 건강하면 좋을 것이다. 자식들이 높은 벼슬과 명예까지 얻어 번창한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그래서 등장하게 된 것이 바로 ‘십장생’ 그림이다. 이런 바람은 왕에서부터 헐벗은 서민들까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바라던 사항이었다. 그래서 불로장생을 의미하는 그림은 해가 바뀔 때 ‘세화’로 그려져 임금이 신하들에게 내려주곤 했다.
<십장생도 10폭 병풍>이 불로장생을 위한 총체적인 소원이 담겨 있다면 <모란도 10폭 병풍>은 단일 주제만을 강조해서 그린 예라 하겠다. 모란은 일시에 피었다 일시에 떨어지는 꽃이다. 유난히 풍성한 꽃이 한꺼번에 피어나는 모습을 보면 꽃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까지 풍성함으로 그득해진다.
그래서 모란꽃은 부와 재물을 상징하게 되었다. 모란꽃처럼 풍성하게 피어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제비꽃이나 민들레꽃처럼 작고 여리여리한 꽃이 아니라 꽃잎도 크고 고혹적이어서 귀부인처럼 화려하게 피어난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매난국죽이 지조와 절개를 상징한다하여 선비들의 사랑을 받았던 것에 비해 십장생도와 모란도같은 ‘염원화’는 남녀노소와 계급을 떠나 모든 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이데올로기나 이념보다 사는 것이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살아가면서 예상치 못한 어려움에 부딪치게 되면 이념보다는 감성이 먼저였기 때문이다.

 

5. 세상에 못난 사람이 어디 있으랴
개심사의 종루는 한 눈에 봐도 어딘가 불안정해 보인다. 날렵한 맵시를 자랑해야 할 처마선은 균형이 맞지 않고, 아무렇게나 휘어져 있는 기둥은 네 개가 전부 제멋대로이다. 휘어지고 비틀어지고 상처의 흔적까지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그런데 이런 몰골을 하고 절의 맨 앞자리에서 당당하게 손님들을 맞이하는 건물이 바로 종루이다. 기둥이 비뚤어졌던 휘어졌던 상관없이 기둥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바로 그것이다. 못났으면 못난대로 비틀어졌으면 비틀어진 대로 감추지 않고 보여줄 수 있는 세상.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이 동등한 자격으로 살아갈 수 있는 세상. 그런 세상에서는 누구나가 아름다운 기둥이고 꽃이다.
우리 모두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잠시동안 내가 사는 공간을 빌려 쓰고 갈 뿐이다. 그 공간에 몸담고 있는 동안 내가 조금 불편하다고 해서 빌려 쓴 공간을 손상시켜서는 안될 것이다. <삼척 죽서루>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꽃이 아름답다하여 꺾어서는 안될 것이다. 다른 사람도 그 꽃을 보며 나와 같은 기쁨을 느낄 수 있도록 남겨두어야 한다. 김홍도의 <마상청앵>이 그것을 가르쳐 준다.
살아가면서 어떤 바람이 있다면 소박하게 기도해 볼 일이다. 그 기도가 장독대 위에 정화수 한 그릇을 떠다 놓고 손을 비비던 우리네 할머니들의 기도여도 좋다. 혹은 하늘을 찌를 듯 우람한 건물에 들어가서 고개를 수그리는 기도여도 상관없다. 건강하게 살아가게 해달라고. 행복하게 살아가겠노라고 다짐하는 기도여도 좋다. 단 그 기도 속에는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 모두가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야 한다는, 살아갈 수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어야 한다. 그 자세를 <개심사 종루>의 기둥이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것을. 이 봄에 피어나는 꽃을 보며 우리 모두가 꽃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기도여야 할 것이다.

 


글 _ 조 정 육 cho, cheong yook(미술사, 목원대학교 겸임교수)

 

조정육  ·  목원대학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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