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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으로 숲에서

월간 환경과조경201310306l환경과조경

고라니 주검을 만난 것은 저녁 산책길에서였다. 콩 이파리가 아등그러질 정도로 자글자글 끓으며 영영 끝나지 않을 것 같던 한여름 불볕더위가 하룻밤 사이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없는 자리에 초가을 건들바람이 목덜미를 스쳤다. 산 기스락을 따라 돌며 늘쩡늘쩡 걸었다. 오랍뜰 텃밭에는 호랑나비와 제비나비가, 길섶에는 표범나비가 팔랑거리며 낮게 날아다녔다. 개울가 제방에 핀 개미취 보랏빛 꽃은 큰 슬픔이 무너져 내리듯 한꺼번에 피어올라 가만바람에도 흔들렸다. 한여름을 굳세게 살아낸 물총새가 날쌔게 날며 먹이 사냥에 딴생각이 없어 보였다. 다슬기가 자라는 개울에는 오리며 백로가 심심찮게 모습을 드러냈다. 수달이었을 짐승이 싸놓은 똥 무더기가 흩어지지 않은 채 오롯이 말라가고 있었으며 금꿩의다리꽃과 부처꽃은 여태도 생생했다.

개울 작벼리가 갈대숲으로 변한 뒤 작벼리를 떠나 소나무들을 파내고 또다시 흙을 파내고 있는 놀란흙 한가운데 아무렇게나 둥지를 튼 꼬마물떼새는 여전히 새끼를 위해 사람을 유인하는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힐끔힐끔 절박하게 인기척을 살피면서 종종걸음을 치다가 잠시 잠깐 멈춰 서서 찍찍 애끓는 울음소리를 냈다. 어미새가 향하는 반대편으로 가면 어설픈 둥지에서 놀고 있을 아기새들을 볼 수 있을 테지만, 굳이 그럴 일이 아니라고 물끄러미 어미새만 바라보고 섰다. 참새만한 붉은머리오목눈이, 뱁새가 까치만한 뻐꾸기새끼를 기르는 장면을 떠올렸다. 어떤 적의가 없는데도 볼 때마다 나를 침입자 취급을 하는 꼬마물떼새가 그럴 때는 고까웠다. 꼬마물떼새보다 먼저 걸음을 옮겼다. 새 울음소리는 쉽게 잦아들지 않았다. 비닐하우스 지붕 위에 제비 떼가 까맣게 내려앉았다. 논배미 한가운데 있는 비닐집이었지만 하고 많은 곳을 그냥 두고 하필이면 비닐하우스 지붕일까, 이러쿵저러쿵 말들이 많았지만 누구도 명쾌한 답을 하지 못했다. 그것은 어쩌면 ‘강남’이라고 불리는 저 먼 곳에서 해마다 봄이면 우리 집 처마 밑까지 다시 날아오는 그 유전적 배경을 알지 못하는 것과 닮았다. 우꾼우꾼 샛노랗게 벼이삭이 익어가는 냄새 때문이 아닐까 했지만, 어떠한 것도 다 지레짐작에 지나지 않았다. 미끄러지면서, 꼬꾸라지면서 마치 아이들이 떼로 엉켜 노는 것과 같이 제비 떼들은 비닐하우스 지붕을 새까맣게 뒤덮으며 지지배배, 복대겼다. 제비가 집을 짓지 않은 집주인은 오히려 안타까워하고, 제비가 집을 지은 집주인은 제비 똥 때문에라도 인상을 째푸리며 귀살머리쩍어했다. 참새 떼처럼 벼이삭을 훑고 다니지 않는 것만도 위안이라면 위안이었을까.

‘산중의 귀물은 머루와 다래 인간의 귀물은 나 하나라네.’라는 노랫말이 ‘강원도아리랑’에 나온다. 어쩌면 먹을거리가 흔하지 않았을 그 옛날 강원도 척박한 땅에 대한 비유이면서 실제이겠지만, 콩꼬투리가 여물어가고 있는 이즘 산골짜기를 헤덤벼치다 보면 심심찮게 머루덩굴과 다래덩굴을 만날 수 있었다. 이따금 갈참나무 줄기를 타고 오른 다래덩굴을 까치발이든, 장대를 치켜들었든 막무가내로 닿을 수 없는 거리 때문에 절망하면서도 군침을 삼키면서 희희낙락할 수 있었던 것은 다만 오종종하게 달린 열매를 치어다보는 기쁨 때문이었다. 언제나 그랬듯 다래덩굴 아래는 멧돼지가 파 놓은 구덩이들로 들쑥날쑥 어지러웠다. 다래는 사람보다 먼저 멧돼지들 먹잇감이었다. 말랑하게 익은 다래는 달곰하면서도 새곰하여 입안에 저절로 침이 고이게 했지만 멧돼지들 또한 이때를 놓치지 않을 만큼 영리했으므로 사람과 짐승들사이 먹이 다툼은 끊이지 않았다. 숲머리까지 솟아오른 갈참나무 꼭대기까지는 사람이든 짐승이든 접근하지 어려웠지만, 다 익은 열매는 저절로 땅바닥에 떨어지게 마련이었으니 발 빠른 멧돼지가 먼저 웃지 않았을까.

_ 김담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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