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시선] 한국인의 관계지향의식과 생태

성종상 논설위원(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라펜트l기사입력2017-02-09

 

한국인의 관계지향의식과 생태


_성종상 교수(서울대 환경대학원)



우리는 늘 주변과 이런저런 관계를 맺으며 살고 있다. 주변이란 자연일수도 있고 인간 혹은 사회일수도 있다. 인간을 ‘환경의 동물’이라고 할 때는 전자에, ‘사회적 동물’이라고 할 때는 후자에 주목한 말일 것이다. 그렇게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주위와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다. “인간은 사회적 관계의 총체”라고 규정한 마르크스는 인간이 행위를 통해 환경을 만들어 내지만 그 환경은 다시 인간의 삶에 작용하여 인간을 만든다고 말한다. 이 관점을 좀 강조해보자면 어떤 이의 존재는 그가 타고난 본성이 아니라 그가 맺고 있는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고 할 수도 있다. 그만큼 사람이 살아가며 갖는 이런저런 관계―집이나 마을, 혹은 일터의 물적 환경과 가족, 친구, 이웃, 직장 등의 사회적 환경과 지속적으로 갖는 다양한 관계가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일상생활은 물론 심성과 성격 형성, 그리고 성취나 성공, 행복 등에까지도.

농경을 주업으로 살아온 한국인에게 중요한 것은 농토, 곧 땅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 생활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이었다. 특정한 물리적, 공간적 영역을 설정하고 정해진 계급 혹은 신분으로 일정한 사회적 위계를 정하는 것은 공동체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데에 있어서 매우 유효적절한 방편이 된다. 농토 중심의 지주와 소작농 관계, 그리고 양반-상놈이라는 신분계층이나 충-효라는 인륜에 근거한 가족 혹은 사람들간 관계가 오랫동안 중시되어 온 것도 까닭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말에서 존칭어법이 세계 어느 나라 말보다도 잘 발달되어 있는 것이나 사람들 사이에 예의가 유달리 중시되어 온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된다. 가족, 친구, 이웃 등의 작은 공동체에서부터 학교, 직장, 사회, 국가와 같은 큰 조직에 이르기까지 각 구성원의 관계는 각별히 중시되고 그 속에서의 역할과 평가가 개인의 개성이나 자질 보다 늘 우선적인 관심사로 간주되었다. 한 마디로 한국인은 지극히 관계지향적인 삶을 살아온 것이다. 학연, 지연, 혈연이라고 하는 초논리적 관계 의식이 때로는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나 김영란법이 세간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시행된 지 한참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는 현상도 관계 중시의 한국사회의 단면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한국인의 관계지향적인 성향은 여러 단편에서 쉽게 확인된다.


해남 연동마을. Ⓒ성종상. 2011년 10월

1. 어릴 적에 동네에서 필자는 이름이 그다지 필요 없었던 것 같다. 동네 어른들은 이름 대신에 ‘00댁 셋째 아들’로 부르곤 했고, 어느 때 부터인가 손 위 형이 좀 유명세를 타면서는 ‘00 동생’으로 부르곤 했다. 언젠가는 이름을 불러주겠지 하는 기대는 ‘너 이름이 뭐더라?’라는 말로 여지없이 깨지곤 했다. 그저 그 분들에게는 나라는 개체보다는 이미 알고 있는 마을 구성원, 즉 내 부모님이나 형과의 관계 속 일원으로 족했던 셈이다. 그 분들이 내 이름을 제대로 불러 준 것은 내가 성장하고 나서도 한참 뒤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곧 관계형성의 주체가 사라진 이후에까지도 별로 달라지지 않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2. 십여 년 전에 ‘우리 형’이라는 영화가 개봉된 적이 있다. 그걸 해외에 수출하면서 영어 제목 때문에 애를 먹었다고 한다. ‘our brother’라고 하려니 의미와 어감을 잘 전달하기가 어려워 논란 끝에 결국에는 ‘my brother’로 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우리는 형을 ‘내’ 형이라고 하기보다는 ‘우리’ 형이라고 한다. 동생이 한 명이든 여럿이든 그냥 복수형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의식하지도 않는 상태에서 형을 가족 전체 구성원, 곧 복수적 관계 속의 한 주체로서 간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 주는 게 아닌가 한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유달리 ‘우리’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  ‘우리나라’, ‘우리 동네’, ‘우리 학교’, ‘우리 집’, ‘우리 엄마’ 등등... 그런데 막상 ‘우리 남편’, ‘우리 마누라’라는 명칭까지도 있고 보면 우리가 무심결에 사용하는 ‘우리’라는 말이 오용을 넘어 터무니없는 정도까지라는 걸 새삼 알 수가 있다. 사실 ‘우리’라는 말은 ‘울(타리)’에서 온 것이라고 한다. 경계로 구분된, 동질적인 공동체라는 뜻이 강하게 담겨 있는 것이다. 역시 강한 공동체적 연대에 바탕을 둔 관계의식의 산물인 셈이다.

3. 미국의 저명한 사회심리학자 리처드 니스벳은 <생각의 지도>라는 책에서 동양과 서양의 다른 사고방식을 제시한 적이 있다. 동양인들은 부분 혹은 개인보다는 전체를 중시하고 개별 개체들도 하나하나의 속성 그 자체보다는 다른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파악하려고 한다. 이른바 맥락적, 통합적 사고방식을 취하는 것이다. 그런데 서양인들은 개인과 개체에 더 집중하여 그것들의 속성을 유형화하고 범주화함으로써 이해하려고 하는 분석적 사고방식에 익숙하다는 것이다. 예로 중국과 미국의 아이들에게 소, 닭, 풀을 보여주고 2개를 묶어 보라고 하면 미국 아이들은 ‘같은 동물로서 소와 닭’을 하나로 묶지만 중국 아이들은 ‘소와 풀과의 먹이 관계’에 주목해 소와 풀을 하나로 묶는다는 것이다. 개별 주체보다는 주변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성향은 중국이나 한국이나 별로 다르지 않다.

여기서 필자가 주목하고자 하는 핵심 키워드는 ‘관계’ 라는 말이다. 사실 ‘관계’는 생태학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생태에서 특정의 생물체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를 둘러싼 주위 환경과의 관계가 매우 중요하다. 일례로 하나의 식물이 자라기 위해서는 토양 속의 유기물이나 무기물은 물론 공중의 햇빛이나 수분, 공기 등의 모든 환경요인들과 생태적인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여야 한다. 생태학의 핵심 개념이라 할 수 있는 진화나 천이도 비생물체를 포함하는 생물계 전체 체계 속에서 개별 종이 지닌 관계구도를 떠나서는 설명하기 어렵다. 그만큼 관계적이라는 것은 생태계를 유지하는 데에 중요한 관건이 된다. 그런 점에서 한국인이 관계 지향적이라고 하는 사실을 달리 짚어 보면 생태적인 삶을 중시한다는 말로 대체할 수가 있다. 


단단한 바위도 생태적 관계만 잘 유지되면 좋은 생존의 터가 된다. Ⓒ 성종상. 2011년 5월 청산도 

우리는 자연과는 물론 사람들과도 생태적 관계를 중시하면서 살아왔다. 수천 년 이상 한 지역에서 생존해 오고 있는 것은 우리가 그만큼 자연과 함께 하는 생태적 삶의 방식을 지켜왔기 때문일 것이다. 십여 년 전에 필자 지인이 호주로 퍼머컬춰를 배우려 간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만난 퍼머컬춰의 창시자 빌 몰리슨에게서 충격적인 말을 들었단다. 그가 퍼머컬춰라는 새로운 개념을 생각하게 된 계기가 바로 한국의 농부와의 만남에서 비롯되었다고 했다고 한다. 홍성의 어느 농부가 집 앞의 작은 논만으로 천년 이상 동안이나 대대로 먹고 살아왔다는 말을 듣고서 깜짝 놀랐었다는 거였다. 좁은 농토에서도 대대로 삶을 지속하는 비법이 배설물-거름-작물생산으로 이어지는 순환농법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퍼머컬춰의 가능성을 확인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폐기물(배설물)을 거름으로 삼고 부산물(볏짚)을 가축사료로 활용하는 한국의 지속가능한 전통농법이 퍼머컬춰의 핵심이론을 실증해 준 셈이다. 하기야 미 농무성 관료출신 킹(F.W.King) 박사가 한국식의 순환농법을 접하고 경탄하여 쓴 책 <사천년의 농부>이 나온 지도 이미 1백년이 더 넘었다. 


수확 중인 양파밭. 수확한 이후 남는 식물사체는 다시 거름이 된다.Ⓒ성종상. 2014년 5월 제주 삼방산 근처

하지만 근래 와서 한국인의 삶에서 관계의식은 예전 같지 않은 듯하다. 가족이나 친척간의 관계가 예전 같지 않다. 가정을 파괴하거나 인륜을 저버린 사건들도 심심치 않게 들린다. 어느 사이에 묻지 마 폭력, 학교폭력이니 왕따니 하는 말도 일상화되어 버렸다. 직장 속에서도 나홀로 족들이 급증하면서 혼밥, 혼술이니 하는 신조어가 등장한지 이미 오래이다.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초등학교, 아니 유치원 때부터 남보다 나은 학원을 찾아다니면서부터 ‘혼자’ 살기를 시작한 이들도 많다. 급팽창한 게임이나 인터넷도 그런 혼자만의 삶과 생존방식을 강화시켜주는 데에 적지 않게 기여하고 있는 걸로 보인다. 근래 들어 하도 심각한 사건들이 다발하다보니 어느 사이엔가 잘 드러나지 않고 있지만 세대간의 갈등 문제도 우리 사회에 심각한 문제인 듯하다. 적어도 내 주변에만 해도 부자간에 혹은 모녀간에 의견이 맞지 않아 힘든 가정들이 적지 않다. 가족 내 아버지 혹은 어머니의 존재와 역할에 대해 성찰해 보려는 시도를 담은 방송 프로그램들이 최근 인기를 얻고 있는 현상도 우리 사회에 이 문제가 만연해 있음을 반증해주고 있다. 인간사회에서 가장 기초를 이루면서 근간이 되는 가족 단위에서부터 소통과 공감이 부족한 것이다. 우리 사회의 정서 지형도에서 사람간의 ‘관계’는 어느 사이에 상처를 주거나 피곤한 것으로 간주되어 버린 게 아닌가한다. 우리 아이들의 관계지수가 OECD국가 중에 최저치로 거의 0점에 가깝다는 발표도 있다.



자연과의 건강한 생태적 관계가 깨어짐으로써 환경문제가 심각해졌다는 사실을 감안해 보면 사람과의 관계가 급격히 무너지고 있는 우리 사회는 어쩌면 앞으로도 당분간 더 심각하고 끔찍한 소식을 듣게 될 지도 모르겠다. 삶의 문화와 가치가 너무 달라져버린 동시대에 옛 방식을 되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간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것은 꼭 필요하고 또 시급한 과제라는 것이 필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가족 혹은 타인과의 관계 회복이 당장에 쉽지 않다면, 먼저 자연과의 관계부터 회복해 보면 어떨까? 그러려고 하면 훼손과 파괴를 너무 쉽게 저질러 왔던 저간의 건설 패러다임부터 바꾸어야 한다. 이 땅의 자연을 대하는 방식과 태도를 쇄신하여 잃어버린 자연과의 관계를 되살려 내어야 한다. 그렇게 자연을 되살려 내면서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는 것은 회복의 좋은 시작이 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 사회에 최근 등산, 걷기, 캠핑, 정원 등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고 있는 현상은 반갑기만 하다. 나와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자연과의 만남과 교감을 통해 마음을 얼마큼 치유하고 나면 다른 사람과의 관계회복도 가능해지지 않을까 한다. 건강한 자연과의 관계 회복이 바로 우리들의 건강과 행복에 직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새삼 유념할 필요가 있다. 마음을 다치고 상처를 입기 쉬운 우리 아이들에게 건강한 자연을 되찾아 주어야 한다. 개도 좋은 환경 속에서 마음껏 뛰놀게 하면 성질이 온순해지는데 하물며 사람은 오죽하겠는가? 이 대목에서 세심한 사고와 배려 깊은 조경인들의 실천이 우리 모두의 삶을 보다 건강하고 행복하게 해 줄 것이라고 필자는 믿는다.
글·사진_성종상 교수 ·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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