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시선] 일상 속의 시간척도 - 식물의 속도와 기계의 속도

성종상 논설위원(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라펜트l기사입력2017-04-04

 

일상 속의 시간척도 – 식물의 속도와 기계의 속도


_성종상 교수(서울대 환경대학원)




‘빨리빨리’의 일상 풍경

‘빨리빨리’는 한국인 혹은 한국문화를 드러내는 말로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 중 하나이다. 옥스퍼드 사전에도 등재된 ‘ppa lli ppa lli’(빨리빨리)라는 단어는 한국에 살고 있는 외국인치고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가 된 지 이미 오래다. ‘빨리빨리’의 풍경은 다양한 지점에서 익숙하게 목격된다. 우리는 자판기 컵 나오는 곳에 손을 넣고 기다리다가 커피 마지막 방울이 채 떨어지기 전에 재빨리 낚아챈다. 엘리베이터도 타자마자 '닫힘' 버튼을 연달아 누른다. 컵라면도 채 3분을 참지 못하고 젓가락을 휘휘저어 먹으려 덤비곤 한다. 너나없이 그렇게 급하다보니 그걸 충족시켜주는 서비스나 제품도 잘 개발되어 있다. 굳이 식당에 가지 않아도 스마트폰 앱을 몇 번 터치하기만 하면 음식이 언제든지, 그리고 빠르게 집에까지 배달된다. 인터넷을 위시한 정보통신 속도도 세계 최고수준이다. 커피를 빨리 손쉽게 타서 마실 수 있도록 원두와 분말 크리머, 설탕을 한 데 섞은 ‘커피믹스’를 세계 최초로 상용화 시킨 나라이기도 하다. ‘빨리빨리’ 문화가 언제부터 우리에게 통용되어 온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불과 백여 년 전만해도 우리에겐 매우 다른 모습이 있었다는 점이다. 러일전쟁 당시 영국인 종군기자 잭 런던은 ‘조선사람 엿보기’라는 책에서 조선인 마부는 미리 다그치지 않으면 해가 중천이 될 때까지도 출발준비조차 않는다고 불평하고 있다. 조선 사람들이 재빨리는 커녕 ‘빨리빨리’하라고 다그쳐야 겨우 움직인다고 할 만큼 느렸다고 하니 오늘날의 한국인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하기야 내리는 비에도 마냥 느릿느릿 팔자걸음을 걷고 점잔을 빼던 조선선비들이 분명 우리네 선조임을 생각해보면 이 ‘빨리빨리’가 어느새 자리 잡은 건지 궁금해지기도 하다.




시간풍경(Time Landscape. Alan Sonfist. 1965-1978-present). 신대륙 발견 이전에 분포하고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진 수종들만 모아 뉴욕 맨하탄에다 식재함으로써 그 땅에 존재하고 있던 자연한경의 역사를 되살리고자 한 환경예술가 Sonfist의 작품이다. ⓒwww.alansonfist.com

그렇게 빨리 움직이는 데도 우리 주변은 늘 바쁘기만 하다. OECD국가 중 우리나라는 두 번째로 일을 많이 하고, 통근과 통학 시간은 가장 길다. 그렇게 바쁘게 일을 하는데도 우리는 늘 시간에 쫓긴다. 하루가 24시간으로 정해져 있으니 어쩔 수 없이 노동 외 시간, 곧 먹거나 자거나 노는 시간을 줄이거나 쪼갤 수밖에 없다. 모자란 잠을 출퇴근 버스에서 때우고 밥 먹는 시간도 아까워 후딱 해치워 버리거나 아예 거르곤 한다. 너무 바빠 생존에 필수적인 시간까지 줄일 수밖에 없는 이른바 ‘시간부족(time poor)’에 빠진 사람이 노동인구의 42%나 된다고 한다(2015년 2월 18일 SBS 8시 뉴스). 현대에 들어와 폭발적으로 증가한 정보량이 시간부족의 주요한 원인이라는 점은 아이러니컬하다. 우리 시대에 정보는 양이 많을 뿐만 아니라 속도도 매우 빠르다. 뉴욕 타임즈의 하루치 기사는 17세기 영국인이 평생 접한 양보다도 더 많은 정보를 담고 있다고 한다. 국내 한 통신사의 주고받는 문자량도 1일 약 1억 3천만 건을 넘는다고 한다. 핸드폰이나 인터넷으로 지구 반대편에 있는 이들과 실시간으로 소통할 수도 있다. 스마트폰은 그런 무궁무진한 정보의 세계에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해준다. 바야흐로 우리는 정보홍수, 자극과잉의 세계에 살고 있는 셈이다. 감각적인 자극과 정보는 넘쳐 나지만 정작 그것을 향유할 시간은 부족한 것으로 보인다. 자극의 양과 속도가 우리 뇌의 처리 능력을 이미 능가해 버린 게 아닌가 싶다. 쏟아지는 정보 홍수와 말초적 자극에 지속적으로 노출된 우리 감각이 마비될 지경에 이르고 있다는 점도 유의해야할 이슈이다.

우리는 그 동안 ‘빨리빨리’의 폐해를 적잖이 목격해 왔다. 와우아파트, 삼풍백화점, 성수대교 등의 붕괴사고, 세월호 침몰 등이 공공연하게 드러난 비극적 사건이었다면 세계 최고의 자살율과 이혼율, 경제수준과는 거꾸로 가는 행복지수,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보도되는 반인륜적 범죄 등은 우리 사회가 앓고 있는 아픔을 가감 없이 드러내주는 징후들이다. ‘빨리빨리’가 이들의 직접적인 원인이라 단정 지을 수는 없겠지만 중요하게 작용하였을 것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빨리빨리’의 한 속성인 ‘대충대충’은 거침, 둔탁함, 부실을 낳기 마련이고 ‘과속’ 혹은 ‘질주’는 난폭, 불법, 사고 등과 동의어이다. 과속과 질주가 주도하는 사회에는 섬세하고 부드러운 감성, 감수성보다는 성급한 감정노출이나 고성이 앞서기 마련이다. 공감, 소통, 배려보다는 분노, 좌절감, 우울감이 확대 재생산될 수밖에 없다. 작금의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크고 작은 부정적인 단면들도 사실은 모두 까닭이 있는 셈이다. 문제는 그렇게 아픈데도 우리는 아무렇지 않은 듯 살아가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지구 역사 속 초창기 식물의 진화를 주제로 한 시간의 경관. 2003년 로스톡 국제정원박람회.
ⓒ성종상. 2003년 8월


시간 생태계 - 식물, 동물, 그리고 기계의 속도

일상에서 수시로 접하는 대상이기는 하나 식물이 변화하는 과정을 우리가 포착하기는 쉽지 않다. 계절마다 옷을 갈아입으며 생장하고 있지만 정작 그 순간순간을 읽어 내기는 어려운 것이다. 기후나 토양 등 조건이 아무리 좋은 곳이더라도 식물 생장을 순간마다 알아채기란 어렵다. 눈으로는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느리지만, 식물은 잠시도 성장을 멈추지 않는다. 작가 한강은 <식물이 자라는 속도로 글쓰기>라는 최근작에서 질주하는 빠름의 현실에서 뒤처져 사람들의 시선에서 멀어진 이들의 삶을 주목한다. 질주 속에 휘둘리다가 끝내 광기로 표출하거나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을 얽매이곤 했던 이들이 그 굴레에서 벗어나 자기를 되찾는 과정을 차분히 묘사하는 그의 글은 우리에게 적잖게 와 닿는다. 세상 주무대에서 뒤쳐진 이들의 삶과 그 속의 애환은 ‘식물이 자라는 속도’로 차분하고 깊은 시선으로 들여다보지 않으면 제대로 포착하기가 어렵다.


식물의 시간속도는 비가시적이다. 영국 새빌가든. ⓒ성종상. 2016년 7월 

그에 반해서 동물은 빠르다. ‘동(動)’이라는 글자에 이미 내포되어 있듯이 동물의 기본 속성은 움직임, 곧 이동에 있다. 동물적 존재로서 인간 역시 이동을 생존의 요건으로 삼고 진화해왔다. 사람이 걷는 속도는 시속 4-5㎞이고 편안하게 달리는 속도는 8㎞라고 하니 사람의 신체이동 속도는 초속 1미터 혹은 2미터가 조금 넘는다. 그에 반해 군함조는 시속 421㎞까지 빨리 날며, 치타는 115㎞으로 달리고, 바다속 청새치도 시속 120㎞가 넘는 속도로 헤엄친다고 한다. 동물들이 이렇듯 빠른 속도로 달리도록 진화된 것은 순전히 살아남기 위해서이다. 말하자면 ‘동물의 속도’는 먹고 먹히는 생존경쟁을 위한 속도인 셈이다.

속도에서 대다수 동물들에 뒤지는 인간은 자동차나 비행기 같은 기계를 만들어냄으로써 동물보다 우위를 지키고 있다. 산업혁명 이후 증기기간을 위시로 한 기계문명은 처음에는 동물로서 인간의 신체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보조 장치 수준이었지만, 급속한 이동수단 및 기술발달로 인간은 지구상의 어떤 생물체보다도 빠르게 공간을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음속보다도 빠른 속도로 우주를 휘젓고 다닐 정도로 이동 속도와 그 공간범위를 무한히 확장해 나가고 있다. 하지만 정작 사람과의 사이는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위의 여러 문제와 연관 지어 깊이 생각해봐야할 숙제가 아닌가 한다. 일찍이 찰리 채플린이 <모던타임즈>에서 기계의 부속품으로 전락한 인간의 모습을 고발한 바도 있지만, 기계문명의 폐해는 생각보다 훨씬 더 깊고 파괴적이기까지 하다. 물질문명의 폐해와 그 해법을 여기서 다 논할 수는 없다. 다만 삶의 속도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기계위주의 속도에 의존한 삶에서 벗어나 동물과 식물의 속도까지 다양한 속도 차원을 일상 속에서 되살려낼 필요가 있지 않을까하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시간 혹은 속도의 재조정

거친 질주의 시대, 지금 우리 사회는 속도의 재조정 혹은 재조직화가 필요하다. 마치 싸움이라도 할 듯이 거칠고 폭력적이기까지 한 삶의 속도를 좀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안정시킬 필요가 있다. 사실 변화와 발전이 더디던 시절 한국인의 특징은 은근과 끈기라고 할 만큼 여유롭고 차분함을 중시했던 적도 있었다. 오랜 세월을 거치며 수많은 외침과 어려움을 겪어 내면서, 그리고 사계절 바뀌는 자연에 적절히 적응하면서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은근함과 끈기를 길러 왔던 것 같다. 은근과 끈기가 느림과 지구력을 그 속성으로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면, 시간 척도로 볼 때 우리네 삶은 빠름이나 졸속보다는 느림이나 차분함에 더 가까웠던 걸로 보인다. 그러나 근대 이후 짧은 기간에 급속하게 물질문명에 접하게 되면서 우리 사회는 어느 사이에 ‘빨리빨리’를 앞세우는 문화가 주도하게 된 것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빠른 속도의 사회가 얻는 이점은 분명 적지 않다. 이미 30년 전에 앨빈 토플러가 예언한 바와 같이 정보화 사회에 들어갈수록 관건은 큰 것과 작은 것으로 나뉘는 게 아니라 빠른 자와 느린 자로 나뉘게 된다는 데 있다. 빠른 자가 승리자라는 사실은 그가 정보화 사회의 핵심 뉴 패러다임이라고 지적한 요점이다. 빠른 정보로 남달리 빨리 생각하는 자는 자연히 의사결정도 빠르고 행동도 빠르다. 그러니 빠른 자가 느린 자를 지배하게 되고 승리자로 살아남게 된다는 것이다. ‘생각의 속도’라는 제목을 가진 빌 게이츠의 책도 이 점을 강조한다. 그 점에서 한국은 ‘속도의 경제’로 무장함으로써 이제껏 치열한 국제간의 경쟁 속에서도 잘 살아오고 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하지만 속도가 일상을 지배하게 되면서 얻게 된 아픔과 그늘도 이미 앞서 본 것처럼 짙고도 크다.

그 치유 방안의 모색은 당연히 속도에 대한 성찰로부터 비롯되어야 할 것이다. 빠른 속도의 대립개념으로서 느림과 여유는 그 유력한 방안으로 제시된다. 마침 근래 와서 우리 사회에도 느림의 효용과 미학을 강조하는 현상이 자주 목격된다. 사실 느림은 웰빙의 핵심 가치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웰빙이란 몸과 정신적 상태가 안정되고 편안한 것을 기본으로 하기 때문이다. 기계의 속도가 아무리 빨리 움직이더라도 신체와 마음은 여유와 느긋함을 유지하도록 하는 것이 관건이다. 그런 점에서 이제는 어느 정도 성숙해진 걷기 열풍은 유효적절한 해법 중에 하나임이 분명하다. 같은 맥락에서 얼마 전에 시내 도로에서의 차량 주행속도를 60㎞에서 50㎞로 하향조정하고 2018년까지 이면도로를 포함한 전역으로 점차 확대해 나가기로 한 서울시의 교통 정책도 환영할 만하다. 프랑스 철학자 피에르 상소가 아홉 가지로 제시한 느림의 미학은 의미 있는 삶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참조할 만하다. 그가 느리게 사는 삶을 받아들이는 한결같은 삶의 자세는 ‘한가로이 거닐며 자기만의 시간을 가질 것’, ‘다른 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것’, ‘대상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때까지 끊임없이 받아들이고 음미할 것’, ‘일상을 재창조하고 새롭게 하는 공상의 시간을 가질 것’ 등등이다.  그가 제시한 해법이 듣기·걷기·꿈꾸기·기다리기·글쓰기 등과 같은 지극히 평범한 일상행위라는 점은 사실 놀랍지 않은가? 그러고 보면 의미 있는 삶을 찾고자하는 우리의 출발지점을 빠른 속도에서 내려와 차분히 일상을 되찾는 것에서부터 삼아야 하는 것이 아닐지...


유수부쟁선(流水不爭先). 앞을 다투지 않는 흐르는 물처럼 우리는 살 수는 없을까?
관악산 계류. ⓒ성종상. 2007년 5월
글·사진_성종상 교수 ·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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