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시선]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성종상 논설위원(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라펜트l기사입력2017-08-08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_성종상 교수(서울대 환경대학원)




정말로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    - 쌩떽쥐베리, 「어린 왕자」
보이는 것들이 보는 것을 가로막는다.  보여지는 것들이 보아야 하는 것들을 뒤덮는다.   
                                                                                                        - 윤해서, 「홀」(부분)

시각의 중요성
인간의 감각기관 중에 눈이 차지하는 비중은 80% 이상이다. 오감 중에서도 자극에 대한 반응이 가장 민감하고 빠른 것이 바로 시각이다. “몸이 열이면 눈은 아홉에 해당된다(眼十中九)”라는 말처럼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눈이 차지하는 역할은 절대적이다. 본다는 것은 순수한 지각행위 그 이상을 내포하고 있다. 앎이라는 지식은 물론, 욕망, 권력까지도 시지각 행위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통설이다. 영어에서 ‘I see’라고 하면 ‘알았어’로 해석되니 보는 것이 곧 안다는 인식행위라는 것이다.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라거나 “백문이 불여일견이다.”라는 말도 시각의 중요성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오죽하면 생을 마치는 것도 “눈을 감는다.”라고 했을까?

서구의 역사에서 눈과 시각의 위상이 급격히 높아진 시점은 르네상스라고 한다. 중세 때만해도 진리를 습득하는 최고의 방식은 암송과 경청이었다. 가만히 마음을 집중하여 외거나 듣는 것이 중시되었다. 하지만 인쇄술이 등장한 이후 대중 독서의 시대가 도래하게 되면서 교회 성직자나 지식인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갖는 진리 습득의 중요한 통로로서의 위상은 급격히 추락하게 되었다. 예술사로 볼 때 중세에서 르네상스로의 이행을 청각시대에서 시각시대로의 전환, 즉 ‘듣는 것’에서부터 ‘보는 것’으로 세계관이 바뀐 것으로 간주하는 것도 그 까닭이다.


한국정원의 멋 – 비가시성의 미학
학창시절에 교수님을 따라 담양을 답사한 적이 있다. 잡초가 무성하고 거친 돌부리와 자갈로 울퉁불퉁한 길을 걸어 도착한 소쇄원이나 명옥헌 같은 한국정원에서 교수님은 연신 ‘좋잖아?’, ‘멋있지?’라고 우리들에게 되묻곤 하셨지만 나는 솔직히 공감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작은 동산에 단촐한 정자가 하나 놓여 있고 어정쩡한 모양새의 연못으로 구성된 명옥헌의 뭐가 좋고 멋있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하긴 수간 자체만으로도 이미 독특한 질감과 조형미를 지닌 백일홍 나무들이 연못과 동산을 뒤덮고 있는 정경은 자못 아름답기는 했다.) 그런 의구심은 이어 방문했던 소쇄원에서도 가시지 않았다. 울퉁불퉁 돌부리가 드러난 흙길에 거칠고 투박하게 보이는 석축들, 아무렇게나 쌓은 듯한 담장, 그냥 있는 그대로인 듯 바위를 타고 흐르는 계류, 그 중간에 놓인 두 개의 건물.... 원래 있던 계류와 지형을 잘 활용한 자연스러움 정도 말고는 그곳이 어째서 한국을 대표하는 정원으로 평가되는 지 의아스럽기만 했다. 현장에서 들었던 천원지방사상에 의한 방지원도라든가 화계 등등의 공간 양식적 설명은 사실 너무 반복해서 듣던 레파토리여서 감동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진부함을 느낄 정도였다. 그것들은 당시 조경사 수업을 통해 접했던 중국과 일본의 정원에 비해서 구성요소나 장식물, 그리고 디테일에서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소박하고 특별한 것이 없어 보였다. 서구의 정원들에서 읽었던 비례나 균형감, 축과 대칭, 규모 등 고전적 형식미학이나 식물학에 입각한 다채로운 식재미와 비교해도 초라하기만 할 뿐이었다.

필자가 한국정원의 참맛을 조금씩 깨닫게 된 것은 그로부터 10여 년도 훨씬 지나서였다. 그 계기는 관심을 갖고서 정원이 위치한 땅과 그 주인에 대해 조금씩 공부하게 되면서 비롯되었다. 정원 주변의 산세나 형국, 물길의 흐름, 방위 등이 지닌 맥락을 살펴보거나 작정자의 생애와 삶을 들여다보면서 어느 순간 깨닫게 되는 공감 같은 것이야말로 그 정원의 의미와 미학을 이해하는 지름길이었다. 땅과 정원, 그리고 작정자와의 깊은 생태적·정서적·심미적 연관성을 조금씩 읽어 내게 되면서 저절로 깨닫게 되는 작정의 까닭내지 이유는 그 어떤 이론적 근거보다도 훨씬 더 설득력 있게 와 닿았다. 그렇게 하여 인조가 세 번이나 찾았으나 노모 봉양을 위해 응하지 않은 오희도와 그의 아들 및 후손의 대를 잇는 효와 강학의 정신을 이해하게 되면서 명옥헌은 이전과는 다르게 와 닿았다. 단촐한 정자이긴 하지만 명옥헌이 옥구슬 같은 물소리를 들으며 독서와 공부에 정진하기에는 참으로 적절한 장소라는 점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출세의 꿈이 좌절된 청년 양산보가 어릴 적 놀던 계류변에다 정원을 조영하기 시작한 까닭을 알게 되고, 그의 이념적 지향세계와 감수성 가득한 감각세계를 알게 되면서 소쇄원은 한 차원 다른 의미로 와 닿았다. 소쇄원의 구석구석에서 소학을 근본으로 한 그의 인품과 도덕심이 고스란히 담겨 있음을 깨닫게 되면서 소쇄원은 맑고 깨끗한 정신 가득한 철학의 장이자 문학의 정원임을 알게 되었다.


소쇄원. 깨끗하고 맑은 기운 가득한 철학의 장이고 문학의 정원이다. ⓒ성종상. 2002년 7월

명옥헌 배롱나무. 명옥헌은 이름 그대로 옥구슬 같은 물소리를 들으며 공부에 정진하기에
적격인 정원이다. ⓒ성종상. 2002년 7월


중국 소주의 졸정원. 온갖 기묘하고 화려한 요소와 장식들로 가득하다. 
ⓒ성종상. 2005년 2월


영국 새빌가든의 쥬빌리가든. 다채로운 식물로 화려한 색채 감각을 자극한다. 
ⓒ성종상. 2016년 9월

기실 장소에 담긴 정신세계를 알지 못한 채 공간의 물적 특징만으로 한국정원의 미를 간파하려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한국정원은 물적 차원이 아닌 보이지 않는 정신적 가치를 지향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형식미보다는 비가시성의 미가 존중되고 추구된 곳이니 시각이 아닌 마음으로 읽어야 제격인 것이다.


시각 득권의 시대
바야흐로 우리는 보이는 것이 느끼고 공감하는 것보다 우월한 시대에 살고 있다. 시각이 모든 감각, 감성을 압도하고 있는 것이다. 막강한 시각 파워는 마음, 정신, 상상력 등은 아랑곳 하지 않은 채 그저 상품이나 광고 혹은 구경거리를 일방적으로 쏟아낼 뿐이다. 각종 광고는 버스와 지하철, 엘리베이터 안까지 침투해 있고, 온갖 색과 문구, 빛과 영상이 연출하는 현란한 이미지가 거리는 물론 거실까지 장악하고 있다. 주위에 깊숙이 침투한 상업 광고와 건물을 온통 도배하듯 덮고 있는 간판들은 시각 중심의 우리 사회를 보여주는 단면이기도 하다. TV와 핸드폰, 그리고 인터넷은 우리의 일상 속 깊숙이 시각 이미지를 전달하면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런 정보과잉, 이미지 지배의 일상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자신이 지각과 인식의 주체라고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눈, 귀, 입 등의 감각기관은 생각하는 기능이 없고 인간본성과도 무관하다. 그러니 옳고 그름에 대한 기준이나 판단도 갖지 못한다. 그런 상태에서는 감각의 자극에 쉽게 끌려갈 수밖에 없다. 감각기관은 점점 더 강도가 높은 자극을 쫓게 되고 결국에는 외적인 자극에 더욱 의존하게 된다.


간판으로 뒤덮인 상가 건물. 외면을 중시하면서도 이 정도의 시각환경을 방치하고 있다는 점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 성종상. 2010년 5월

지금 우리 사회에는 감각이 주도하는 현상이 쉽게 목격된다. 한국이 세계 최고의 성형술 나라로 간주되는 것이나, 초중고생 70%가 일상적으로 화장에 빠져들고 있으며, 젊은이들이 명품 복근을 만들기 위해 휘트니스센터를 찾는 열풍은 시각 중시와 무관하지 않은 단면들이다. 쿠킹, 쉐프, 먹방 등의 용어와 함께 방송과 출판계는 물론 개인 블로그나 소셜네트워크를 휩쓸고 있는 음식 열풍도 또 다른 감각으로서 미각 추구의 현상이라 봐야 할 것이다. 각자 취향으로서 감각을 추구하는 것이야 문제될 게 없고 그간 우리사회에 억압 내지는 잠재된 욕구가 자연스럽게 분출되고 있는 문화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문제는 눈과 입이라는 감각에 너무 지나치게 쏠리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좀 엉뚱해 보일지 모르나 필자는 최근 우리 사회에 심각한 문제로 대두된 미세먼지나 지하수 고갈, 나아가 삭막해진 인간관계 같은 문제도 그 같은 감각 중시와 무관하지 않은 현상으로 이해하고 있다. 오랫동안 국가 정책이나 사회 관심이 보이는 것에 치중하다보니 보이지 않은 것에 소홀할 수밖에 없었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보이는 것을 넘어 보이지 않는 것으로 
일찍이 맹자는 감각기관의 욕구를 경계하면서 본성을 지켜야 한다고 지적했다. 감각기관의 욕구가 너무 커지게 되면 감각적 자극에 마음을 빼앗기게 되고, 결국에는 인간으로서의 본성을 잃고 동물처럼 되기 쉽다고 갈파했다. 맹자의 경계는 동시대 한국사회에도 유의미하다고 본다. 지나치게 감각에 쏠리다보면 본질을 놓치기 쉽다. 보이는 것만 치중하다보면 보이지 않는 것을 소홀히 하기 마련이다. 그러고 보면 세상은 보이지 않는 것도 무수히 많다. 마음, 사랑, 소망, 믿음, 기억, 그리움, 지혜, 인연, 인정, 덕, 영혼, 영성, 기쁨, 행복 등등. 이들은 대체로 우리가 어느 사이엔가 잊어버리거나 잃고 살아가고 있는 가치들이기도 하다.

불교에서 다루는 생명체에 대한 개념으로 생(生), 각(覺), 사(思)가 있다. 식물은 생, 즉 살아 있는 존재이고, 동물은 생과 각, 즉 살아 있으면서 느낌을 지니고 있으며 사람은 생, 각, 사 즉 살아있으면서 느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우리 삶을 보다 두텁고 풍요롭게 하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것까지 제대로 간파해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본질적인 것, 감추어져 쉽게 볼 수는 없으나 이면에 존재하는 것,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을 감지해 내고 느끼는 것은 시각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이제라도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그것이 살아있으면서 느끼고 생각해낼 수 있는 존재로서 인간만이 지닌 본성을 제대로 되찾는 길이 아닐까?


글·사진_성종상 교수 ·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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