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 선생은 1901년 3월 13일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났다. 1919년 3·1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평양고등보통학교에서 퇴학당한 뒤 1921년 오산학교에 편입했다. 1923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고등사범학교에서 유학했으며 이 때 일본인 우치무라 간조의 영향으로 ‘무교회주의’ 신앙을 가지게 된다.귀국 후 오산학교 역사교사로 근무, 후학을 길렀으나 일제의 일본어교육 강요와 탄압 등으로 1938년 사직했다. 이후 송산농사학원을 운영, 공동체 육성을 실험하기도 했다. 또 ‘계우회(도쿄대 농학부 조선인 학생 독립운동 단체) 사건’ 등에 연루, 두 차례 옥고를 치렀다.해방 후 평북 자치위원회 교육부장으로 활동했으며 1947년 월남, ‘성서’ 강해 등을 진행했다. 1956년에는 용산구 원효로4가 70번지에 사택을 마련, ‘사상계’ 집필을 시작했고 1961년 발표한 ‘5·16을 어떻게 볼까’라는 글로 군사정권과 정면으로 맞섰다.1970년에는 4·19 10돌을 맞아 자택에서 진보적 평론지 ‘씨알의 소리’를 창간했다. 이후 1982년 도봉구 쌍문동으로 거처를 옮긴 뒤 1989년 여든여덟 일기로 사망할 때까지 민주·인권 운동에 헌신한다. 1979년, 1985년 두 차례에 걸쳐 미국 퀘이커 본부로부터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되기도 했다.올해 초 구는 원효로1·2동 일대 지역사 기록화 사업 과정에서 함석헌 선생 업적을 재확인했다. 지난 5월 용산문화원, (사)함석헌기념사업회와 기념공간 조성 방안을 함께 논의했으며 공사는 6월부터 석 달간 이어졌다.“사는 길이 결코 발끝에 있지 않고 저 먼 앞에 있다. 땅이 아니고 하늘에 있다. 지금 있는 것에 있지 않고 장차 올 것에 있다. 뵈는 것에 있지 않고 이치에 있다. 힘에 있지 않고 정신에 있다”- 함석헌 『너 자신을 혁명하라』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