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역사를 담담히 바라본 존재는 ‘식물’ 아니었을까?”

[인터뷰] 덕수궁 프로젝트2021: 상상의 정원展 ‘면면상처: 식물학자의 시선’, 식물학자·식물세밀화가 신혜우 - 1
라펜트l기사입력2021-11-16

 

‘덕수궁 프로젝트 2021: 상상의 정원’展이 11월 28일까지 덕수궁 정원 및 전각에서 열린다. 네 번째를 맞이하는 ‘덕수궁 프로젝트’의 이번 주제는 ‘정원’으로, 정원을 매개로 덕수궁이 품은 역사를 돌아보고 오늘날 정원의 가치에 대한 생각할 수 있는 작품들이 준비됐다.

이중 덕수궁의 식물을 아카이빙한 작품이 있다. 식물학자이자 식물세밀화가 신혜우 작가의 ‘면면상처: 식물학자의 시선’이다. 작가는 전시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덕수궁에서 신혜우 작가를 만났다. 작품이 전시된 행각에 앉아 대화를 나누었다. 첫 만남의 어색함은 전시에 대한 깊은 설명과 함께 사라졌다.

신혜우 식물학자·식물세밀화가


‘면면상처 : 식물학자의 시선’ 소개 부탁드립니다.

근대기에는 서양의 여러 문물 이외에도 외래식물들이 이 땅에 들어왔어요. 식물을 체계적으로 분류하는 보편적인 학문으로서 식물학 역시 근대성의 발현이죠. 한국에 서양의 근대식물학이 도입된 것은 개항 전후로, 전통적인 사회질서체제의 원리이자 학문이었던 유학이 그 지위를 상실하고 그 자리를 서구의 근대과학이 차지하기 시작했습니다.

본격적인 식물학 연구는 일제강점기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추진됐습니다. 특히 동경대 교수 나카이 다케노신(中井猛之進)은 총독부 촉탁 식물학자로 조선을 오가며 1913년부터 30년간 신종 1,000여 종을 포함한 4,000여 종 이상의 조선 식물을 근대적 분류법으로 분류, 연구해 조선식물 전문가로 이름을 떨쳤습니다.

이번 아카이브 작업은 나카이가 등장하기 전 ‘대한제국 황실 전속 식물학자가 있었다면’이라는 상상에서 출발했습니다. 덕수궁에는 오래전 식재된 나무들과 시대에 따라 가꿔지고 제거된 원예종, 그리고 사람들이 들고 나며 옮겨온 귀화식물(외래종)이 공존합니다. 이뿐만 아니라 외래종 중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사라진 나그네식물도 있을 것이죠.

올해 봄부터 덕수궁에서 발견되는 모든 식물을 대상으로 채집과 조사, 관찰, 기록을 수행하면서 덕수궁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간직한 식물들을 표본과 그림, 글 등으로 풀어냈습니다. 창덕궁이나 창경궁 등의 식물은 이미 조사돼있는 자료들이 있는데, 덕수궁은 나무나 조경 관련 논문 외에는 없어요. 이번 전시를 계기로 잡초를 포함한 초본류에 대해 조사할 수 있게 됐다는데 의미가 있습니다.

‘면면상처’는 서로 아무 말 없이 물끄러미 바라본다는 뜻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여러 역사적 사건들이 이 공간에서 일어났고, 여러 사람들이 오고 갔습니다. 다만 식물은 자신의 자리에서 그 모든 것을 바라보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요?

전시에는 덕혜옹주의 액자가 두 개 있습니다. 하나는 모란 병풍 앞에서 각각 한복과 양장을 입은 어린 시절 모습입니다. 모란 표본과 함께 전시되어 있죠. 다른 하나는 덕혜옹주의 남편인이었던 일본인 쇼 다케유키와 찍은 사진입니다. 사진 속 배경을 보면 단풍나무가 등장합니다. 그래서 단풍나무 표본 옆에 전시되어 있어요. 시대가 달라지고 사람은 변했는데 식물은 그 자리에서 바라보고 있었어요. 역사의 기록을 식물의 입장에서 한다면 또 다르게 볼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덕혜옹주의 액자


식물 표본들이 여러 개 전시돼 있는데 조금씩 다릅니다.

식물 표본은 과학적으로 분류하고, 계통 진화를 밝히기 위한 증거자료입니다. 식물 표본은 국제 규격이 있어 모두 같은 형태로 제작됩니다. 데코레이션을 목적으로 하는 ‘압화’와는 다릅니다. 일정한 크기의 종이 위에 납작하게 말린 식물과 라벨이 붙어 있습니다. 채집하는 방법, 라벨에 들어가는 내용, 표본을 고정하는 방법을 익혀 전문적으로 제작하게 되지요. 그러나 이 전시에는 이런 규격화된 식물 표본 외에도 관람객이 식물을 잘 관찰할 수 있게, 전시라는 주제에 맞춰 아름답게 제작한 다양한 식물 표본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15년이 넘는 시간 동안 식물학자로 공부를 하면서 많은 표본을 만들었어요. 연구에 필요하다면 뿌리를 뽑거나, 가지를 자르거나, 잎을 따거나, 종자를 채집했죠. 하루에 300개 정도 채집을 할 때도 있었어요. 그동안 얼마나 많은 식물을 죽이며 살았을까 생각해보면 미안한 마음도 들어요. 그래서 죽은 식물을 비석처럼 세워서 전시를 했고요.








다양한 형태의 식물표본


표본과 달리 식물세밀화는 손으로 하나하나 그리는 방식입니다. 기록 방식에서 오는 차이가 있을까요?

전시된 것들은 학술적인 조사를 한 뒤 그린 것으로, 논문에 사용되는 삽화이기도 합니다. 식물의 형태와 생태를 하나의 도판에 압축적으로 설명한 ‘사이언티픽 일러스트레이션’에 해당합니다. 

그림은 언어보다 함축적으로 정보를 전달할 수 있어요. 식물에 대해 충분히 조사하고 머릿속에서 정리를 마친 뒤 그림을 그립니다. 그림은 이론을 펼치면서 사용하는 여러 데이터 중 하나입니다. 사진은 사진대로, 도표는 도표대로, 글은 글대로 과학적인 증거를 제시합니다. 그 역할은 다르지만 각각의 한계는 있어요. ‘사이언티픽 일러스트레이션’은 학술적인 그림에 해당하기에 꼭 들어가야 할 요소가 정해져 있어요. 제가 개입할 수 있는 부분은 정말 적습니다. 

‘보타니컬 아트’와 ‘사이언티픽 일러스트레이션’의 차이가 있는데 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요. 식물을 소재로 그린 그림이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식물의 매력을 담은 그림과 학술적인 조사를 하고 그리는 그림은 접근이 다릅니다. 그러나 과학적인 목적으로 그린 ‘사이언티픽 일러스트레이션’도 예쁘다는 반응이 많죠.


이번 전시를 위해 ‘우산이끼’를 그리셨습니다.

과학적인 그림을 그리려면 학술조사를 위해 최소 1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번 전시는 그만큼의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죠.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돌 틈에서 자란 우산이끼를 그렸는데요. 우산이끼는 빨리 자라는 식물이기도 하고 그 구조가 재미있는 식물입니다. 일반 식물처럼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포자를 생성해 번식합니다. 우산이끼는 암수딴그루로, 잎사귀같은 엽상체 위로 우산처럼 자라요. 수그루는 찢어지지 않은 우산 모양이고, 암그루는 우산 살만 남은 것처럼 갈라진 모양이에요. 수그루는 키가 작고 암그루는 키가 크죠. 비가 오면 갈라지지 않고 표면이 넓은 수그루에 빗방울이 떨어지면서 표면에 뚫려있는 구멍(장정기)에 있는 정자가 암그루의 구멍(장란기)로 튀면서 수정이 이루어져요. 암그루에 포자낭이라는 주머니가 생기고 그 안에 포자가 만들어지는데, 재미있는 건, 이 주머니가 터질 때 안쪽에서 나오는 ‘탄사’예요. 탄사는 수분에 의해 꼬였다가 풀렸다가 하는데, 건조해졌을 때 풀리면서 주머니를 터트리고 포자를 퍼트려요. 또는 우산이끼 몸의 일부가 떨어져 나와 번식합니다. 엽상체의 표면에 술잔 같은 무성아기가 일종의 클론인 셈이죠.

덕수궁의 아픈 역사를 조사하면서 덕수궁에 있는 식물 중 그 시대의 우리와 닮은 식물은 무엇일까 생각했습니다. 존재에 대한 존중이 없어 상처 입기 쉬운 식물의 초상을 담고 싶었고, 돌 틈에서 자란 우산이끼가 어떤 면에서는 우리 민족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끼는 지구의 역사에서 보면 굉장히 원시적인 식물이에요. 작고 화려하지도 않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사람들은 이끼를 단순하고 보잘것없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우산이끼의 생활환을 보면 굉장히 치밀합니다. 그늘진 구석이나 물이 스며드는 틈이 있다면 잘 자라는 식물이죠. 존재감이 대단하진 않지만 자세히 보면 다릅니다. 우산이끼가 속한 선태식물들은 현존하는 육상 식물 중 가장 오래된 식물들로, 최초로 물 밖으로 나온 식물들입니다. 우산이끼류는 고생대 말, 중생대 초기에 화석이 발견된 정도로 원시적인 식물이지만, 그 독특한 형태와 생활방식으로 현재까지 지구에 살아가고 있는 강한 식물입니다.

궁에 사는 식물은 권력자의 성향에 따라서 심어지고 뽑히는데 우산이끼만큼은 늘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것이고요.


신혜우 작가가 그린 우산이끼


‘덕수궁 프로젝트 2021: 상상의 정원’展이 11월 28일까지 덕수궁 정원 및 전각에서 열린다. 관람객이 식물학자이자 식물세밀화가 신혜우 작가의 ‘면면상처: 식물학자의 시선’을 감상하고 있다.
글·사진_김기정 녹색기자 · 라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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