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대통령을 울려버린 농부이야기

체리l2017.07.07l1174

그의 소원은 가난과 싸워 승리하는 것이었다. 그는 가난과 싸워 승리했고 1970년대에 전설적 새마을운동 지도자가 됐다. 그의 젊은 시절을 관통해온 ‘가난과의 싸움’은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을 눈물짓게 했다.
 
 하사용(河四容). 만 85세다. 1930년 4월 충청북도 청원군 강외면 정중리에서 8남매 중 4남으로 태어났다. 두부집에서 나오는 비지나 엿집에서 나오는 엿밥, 양조장에서 나오는 술지게미를 얻어먹으며 컸다. 배고픔을 이기지 못할 때는 들판을 배회하며 올무(일찍 자란 무)를 뽑아 먹었다. 여덟 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했지만 수업료를 내지 못해 2학년 때 퇴학을 당했다. 열 살 때부터는 고물수집, 엿장수, 나무장사, 채소장사 등 돈을 벌 수 있는 일이면 뭐든 닥치는 대로 했다.
 
  채소장사를 하면서 그는 채소농사를 짓는 화교(華僑)들의 수입이 높은 것에 놀랐다. 당시의 채소농사는 하씨의 마을뿐만 아니라 서울 근교에서도 주로 화교들이 지었다. 하씨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고소득을 올릴 수 있는 채소농사를 왜 짓지 않는지 의아했다. 직접 채소농사를 짓고 싶었지만 그에게는 단 한 평의 땅도 없었다.
 
  6?25전쟁이 터졌고, 인민군에 한 번 끌려갔다가 목숨을 건 탈출에 성공한 후 군에 입대했다. 강원도 양구군에 있는 20사단에 배치되었다. 전투에 참가해 적들과 교전을 벌이던 중 부상을 당해 육군병원으로 후송됐다. 부상을 치료하던 중 폐결핵이 발견됐다. 치료 불가능 판정이 나왔다. 의병제대를 했다.
 
  삶에 대한 강한 집착 때문인가. 육군병원에서 치료불가라는 판정을 받았음에도 그의 병은 호전되었고, 하씨 못지않게 찢어지게 가난한 집의 딸(신경복)과 결혼을 했다. 혼수는 홑청 없는 이불 한 채가 전부였다.
 
  가정을 제대로 꾸리려면 제대 후에 그가 해온 품팔이만으로는 어려울 것 같았다. 화교들이 짓던 채소농사가 떠올랐다. 땅이 필요했다. 땅이 있는 사람들에게 농사를 지어서 갚겠다며 땅을 몇 평만이라도 빌려달라고 애원해 보았으나 허사였다.
 
  남의 집 머슴을 살아서라도 직접 땅을 살 밑천을 마련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아내 몰래 집을 나왔다. 걸식을 하며 춘천까지 갔다. 춘천을 목표로 삼아서 간 것이 아니라 머슴 살 집을 찾다 보니까 그곳까지 흘러간 것이다. 3년간 정말 ‘죽어라 하고’ 일을 했다. 쌀 열다섯 가마를 새경으로 받아 고향 청원군 정중리로 돌아왔다. 아내는 남의 집 식모살이를 하고 있었다. 봉급 대신 끼니만 해결해 주는 식모살이였다. 아내의 모습에 설움이 북받쳤다. 목놓아 울지는 못했다. 천형(天刑) 같은 가난에 대한 증오가 더 컸다. 반드시 이놈의 가난을 이겨내리라고 이를 악물었다.
 
 
  아! 내 땅, 내 집
 
  1957년에 쌀 열다섯 가마로 밭 270평을 구입하고, 그 밭 한쪽에 두 평 남짓한 움막을 지었다. 처음 가져보는 내 땅과 내 집이었다. 돌을 골라내고 흙을 퍼날랐다. 인근 조치원읍에 가서 인분을 퍼다 밭에 뿌렸다. 인분을 퍼오다가 뺨을 맞기도 했다. 길거리에서 개똥도 주워다 거름으로 썼다. 미친 듯이 일을 했다. 지친 몸으로 집에 돌아오면 멀리 갈 수 없게 노끈으로 묶어 놓았던 어린 자식이 울다 지쳐서 땅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가슴이 미어졌다. 울지는 못했다.
 
  남들과 똑같은 방법으로 농사를 지어서는 성공할 수 없다. 밭에 채소를 심은 후 콩기름을 바른 종이를 씌워서 보온을 해주었다. 나중에 하씨의 농법은 농촌에서 보편화되었지만 당시만 해도 주위 사람들은 종이 속에서 어떻게 작물이 자랄 수 있느냐며 조소를 보냈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그는 남들보다 채소를 일찍 수확할 수 있었고, 일반 농사보다 열 배 이상의 소득을 올릴 수 있었다.
 
  선대(先代)들이 단 한 평도 갖지 못했던 땅. 땅을 더 사야 했다. 1원도 헛되이 쓸 수 없었다. 저축을 했고, 그 돈으로 매년 땅을 늘렸다. 하늘의 시샘인가. 덜컥 폐결핵이 도졌다. 아내가 거름통을 지고 다니는 모습을 누워서만 지켜볼 수 없었다. 똥통을 지고 다시 조치원 읍내로 갔다. 똥통을 지고 오는 길에 피를 토하며 쓰러지기도 했다. 멈출 수 없었다. 가여운 아내와 가여운 자식들 때문에라도 쓰러질 수는 없었다.
 
  하늘도 그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던 것 같다. 그는 결핵을 이겨냈고, 농어민소득증대 특별사업 경진대회에서 전국 1등을 차지했다. 동탑산업훈장을 수상함으로써 대한민국 최고의 농부로 우뚝 섰다.
 
  270평으로 시작한 하씨의 농토는 1만2000여 평까지 늘어났다. 땅을 더 늘릴 수도 있지만 늘리지 않고 있다. 그만하면 농사를 짓기에는 충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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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을 울려버린 농부이야기 남의 집 머슴을 살아서라도 직접 땅을 살 밑천을 마련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체리게임을 하면서 1957년에 쌀 열다섯 가마로 밭 270평을 구입하고 체리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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