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野史]조경학과의 설립과 한국조경학회의 창립

최초의 조경서적 발간도 비슷한 시기에 이뤄져
라펜트l양병이 명예교수l기사입력2013-02-24

조경학과의 설립

현대적 의미의 조경학이 우리나라에 도입된 것은 1972년에 (사)한국조경학회가 창립되고, 1973년에 석사과정으로 서울대 환경대학원에 환경조경학과가, 학부과정으로 서울대 농대와 영남대에 조경학과가 설립됨으로써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73년 서울대학교에 환경대학원이 설립된 것은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일이다서울대학교에 하나의 단과대학이 설립되기 위해서는 해당 분야에서 수년간의 내부논의와 대학교 내에서의 논의가 거쳐진다. 그리고, 당시 교육부의 심의를 거친 후에 서울대학교 설치령을 개정해야 하기 때문에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는 게 일반적인 관례이다.

 

그러나 환경대학원 설립의 경우는 매우 빠른 속도로 이루어져 약 1년의 기간 내에 모든 절차가 완료된 것으로 기억한다. 이렇게 빠른 속도로 환경대학원이 설립되게 된 데는 몇가지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그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조경에 관한 관심으로 인해 청와대에 조경담당비서관이 임명되었다. 또한 청와대에서 조경인력의 양성을 위해 조경학과의 설치 필요성을 제기하며 조경학과의 설립을 강력히 추진하였기 때문이다.

 

둘째는 초창기에 조경전문가를 조속히 교육해 배출하기 위해 대학원과정에 조경학과를 설치하기로 함에 따라 환경대학원을 설립하게 되었다.

 

셋째는 이미 행정대학원 내에 도시 및 지역계획학과가 1968년에 개설되어 도시계획전문가를 양성해 왔으므로 도시 및 지역계획학과와 조경학과를 하나의 전문대학원으로 통합하는 것이 용이했다.

 

초창기(1970년대) 조경 수학(修學)에 관심이 많던 주요멤버들은 기회가 있을때 마다 함께 모여 조경분야 육성에 대하여 논의하곤 했다(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오휘영, 필자, 정영선, 변우혁, 이규목, 병림, 서원우, 박종화)

 

서울대학교에 조경학과를 설립하기 위해 서울대학교 내에 설립준비위원회를 설치하였다. 그 위원회에서 조경학과를 어느 단과대학에 설치할 것인지에 대해 많은 논란을 거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70년초에는 조경이라는 단어도 생소하고 조경분야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없었다. 때문에 참여하는 위원들의 주관적 견해에 따라 조경학과의 학문적 성격을 판단하였다. 어떤 위원은 조경학이 예술적 측면이 강하기 때문에 미대에 설치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어떤 위원은 조경학은 식물소재를 이용하는 분야이기 때문에 농대에 설치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으며, 어떤 위원은 조경은 공학적인 성격이 있기 때문에 공대에 설치해야 한다는 주장도 했다.

 

이러한 여러가지 논란 끝에 대학원 과정은 환경대학원을 설립하여 조경학과를 설치하기로 했다. 학부과정은 미술대학에 설치하기로 하여 국무회의에 통과하고 대통령 결재과정에 있었다. 이때 오휘영 조경담당 비서관이 비서실장과 문교부장관을 설득해 농과대학에 조경학과를 설치하기로 결정을 하였다.

 

이러한 결정에 따라 1973년에 학부과정은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에, 영남대학교는 공과대학에 조경학과가 개설되어 학생을 모집했으나 영남대의 조경학과는 1974년부터 농축산대학으로 옮기게 되었다.(김학범, 2007)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설립위원회는 위원장을 당시 교육부 기획관리실장으로 있었던 오성식 실장이 맡았다. 당시의 환경대학원은 ① 경제성장에 의한 환경문제의 부작용에 대응할 필요성, ② 충사를 비롯한 국난극복 사적지의 복원 및 고속도로 개통으로 기인한 산복절개의 미적회복이나 산사태 등에 대한 대통령의 관심, ③ 경주 종합관광개발사업의 추진 등이 설립 배경이 되었다(황기원, 2002, 김농오, 2002).

 

그 당시 울산공업단지를 조성하여 석유화학공장들이 가동됨에 따라 환경문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또한 남북의 긴장이 고조되어 북한의 안보위협에 처해 있었다. 때문에 호국의 영웅인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본받자는 취지에서 충무공 유적지를 복원하는 사업을 활발히 전개해 왔다.

 

한편 경인고속도로와 경부고속도로가 건설되는 과정에서, 절개지가 많이 노출되고 산사태도 발생하는 부작용이 야기됐다. 이에 현장방문을 많이 했던 박정희 대통령은 이를 개선하기 위한 대책을 강구하라고 지시했고, 조경의 필요성이 대두된 것이다.

 

서울대학교에 환경대학원이 갑자기 설립되었으나, 조경학을 전공한 교수가 국내에 거의 없었던 탓에 전공교수 없이 조경학과의 강의가 시작되었다.

 

그 당시 환경대학원의 교수진은 초대원장으로 노융희 교수가 임명되었고 도시 및 지역계획학과 학과장으로 권태준 교수가 임명되었으며, 환경조경학과 학과장으로 지역계획학을 전공한 최상철 교수가 임명되어 3명의 교수로 출발을 하였다.

 

그 당시 행정대학원에는 1(주간) 2(야간)과정이 있었는데 2부는 직장을 가지고 있는 학생들이 야간에 강의를 듣는 과정으로서 4개 학기를 수강하는 1부와는 다르게 5개 학기(2 6개월)를 다니게 하였다. 환경대학원을 설립하면서 행정대학원의 도시 및 지역계획학과가 흡수되며 당시의 2부 과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환경대학원도 자연스럽게 1부와 2부 과정을 모두 설치하였다.

 


서울대학교 환경연구관 준공식

 

환경대학원의 환경조경학과가 갑자기 설립되어 학생모집을 하게 되니 홍보가 거의 안되어 학생모집이 제대로 될지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 학생모집을 우려한 나머지 학교에서는 그 당시 청와대의 오휘영 조경담당비서관에게 요청을 하여 청와대에서 정부 각 중앙부처와 지방정부에 환경대학원 학생모집에 적극 협조하라는 공문을 발송하였다.

 

그 결과 초창기(1, 2, 3) 학생모집을 하는 데는 정원을 훨씬 넘는 경쟁률로 입시를 치를 수 있었다. 청와대에서 공문을 발송한 후 정부부처에서의 관심이 높아졌는데 특히 육군, 공군 등의 군에서 관심을 가지고 학생을 추천하여 초창기에는 군 장교들이 조경학과에 입학해 열심히 학교를 다녔었다.

 

환경조경학과 1기생들의 교육은 환경대학원 내에 조경학 전공교수가 거의 없었던 시대로 거의 외부강사진에 의해 교육이 이루어졌다.

 

그 당시 국내에서는 오휘영 청와대 조경담당비서관과 장문기 홍익대 교수 두 분이 미국에서 조경학전공을 한 분들이었기 때문에 조경학과목의 외부강사로 참여하게 되었고 나머지 과목들은 그 분야의 전공교수나 전문가들을 외부강사로 모시게 되었다.

 

외부강사들 중심으로 교육을 하니 외부강사들이 주간과 야간을 두 번씩 출강하기가 어려운 실정이라 결국에는 많은 강의가 주야간을 합쳐서 주간보다는 야간에 이루어지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 결과 주간학생들도 직장을 가지고 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이 있었으며 주야간합반을 하여 교육을 하니 주간학생과 야간학생들의 교류가 많아져 주야간 학생들의 친목도모에는 큰 도움이 되었다.

 

그 당시 환경대학원 뿐만 아니라 영남대 조경학과나 서울대 농대의 조경학과도 학과가 설립되기는 했으나 전공교수가 없이 운영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발생하게 되자 급기야는 조경학과 교수요원을 양성하기 위한 계획을 과학기술부로 하여금 수립하도록 하고 교수 요원양성을 위해 UNDP에 요청을 하여 UN장학금을 가지고 해외에서 교육을 받도록 하는 교수요원양성프로그램을 마련하였다.

 

과학기술부에서는 조경학과 교수요원양성프로그램에 의해 서울대와 영남대 각 1명씩 2명을 선발하여 미국에서 조경학석사학위를 받도록하였다. 이 때 선발된 교수요원은 필자가 서울대 교수요원으로 선발되었고 영남대 교수요원으로는 김성기 씨가 선발되었다.

 

필자는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교 조경학 석사과정에 입학이 되어 2년기간 동안 장학금의 혜택을받고 공부를 하여 조경학석사학위를 받고 귀국을 해 서울대에서 처음으로 시행된 교수공채제도에 따라 환경대학원 환경조경학과의 교수 공채에 응모해 채용이 되었다.

 

필자는 UN장학금을 받기 위해 뉴욕에 있는 UN본부에 직접 방문해 장학금 담당자와 면담을 했는데 그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가 UN 회원국이 아니었던 시절이라 감개가 무량했다. 김성기 씨는 영남대 교수요원으로 선발되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는데 공부를 마친 후 영남대에 채용이 되지 못해 당초 계획대로의 영남대 교수요원 양성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학부과정으로 설치된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의 조경학과는 학과 설립 후 그 당시 임학과 교수로 있었던 안건용 교수가 초대학과장을 맡아 운영하게 되었다.

 

농대 조경학과는 학부과정이기 때문에 조경학과 1기생이 입학한 후 1년 동안은 교양과목을 듣는 기간이고 전공과목의 강의는 1년 후부터 시작이 되어 3년간을 이어지기 때문에 시간적인 준비기간이 있는 편이었다. 농대 조경학과는 교수를 충원하기 위해 어느 분야의 전공교수를 채용할 것인지를 고민 끝에 조경학 분야 중 가장 시급한 것이 설계를 위해 그리는 일이라고 판단하여 미술을 전공한 교수를 채용하기로 결정을 하였으며 그 결과 미대출신인 조정송 교수를 채용하게 되었다. 서울대 농대 조경학과의 경우는 안건용 교수와 조정송 교수가 강의를 주로 담당하고 상당수의 과목은 외부강사가 강의를 담당하고서 운영을 해왔는 바 필자가 미국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자마자 안건용 교수의 부탁으로 농대 조경학과의 강의를 담당하여 임승빈 교수가 채용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윤국병외 저, 조원학」, 이일구·오휘영역,「조경학개론」, 총무처 발간 공무원 훈련 최초의 조경교육 교재,「 조경」, 한국도로공사,「고속도로의 조경」,_ 왼쪽 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서울대 환경대학원 환경조경학과의 1기 입학생은 현재 우리나라 조경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조경계의 중진들과 과거에 서울시와 조경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분들이 입학하였다. 1(주간)생으로는 서

울시립대의 이규목 명예교수, 서울대의 임승빈 교수, 안동만 교수, 영남대의 현중영 명예교수, 서안의 정영선 대표, 2(야간)생으로는 우명규 전 서울시장, 고성하 전 한수종합조경 대표, 이평재 전 서울시 지하철 건설본부 국장 등이다.

 

이들 1기생들은 재학 중에 경주 불국사주변의 조경설계프로젝트를 같이 수행하기도 하고 공동의 작업을 많이 수행해 동기생들끼리 서로 매우 친밀한 우정을 나누며 학창생활을 보냈다.

 

1기생들이 재학 중에 설계한 불국사 주변 조경설계안이 오늘날의 불국사 주변지역경관의 밑그림이 되었다. 그 당시 경주 불국사는 사찰입구까지 매점이나 여관들이 들어서 매우 난잡한 모습이었으며 특히 경주 관광개발 사업의 일환으로 불국사주변을 정비할 필요성이 생겨 그때 당시로는 조경전문가가 없었던 시절이라 부득이 조경학과 학생들에게 불국사 주변 정비를 위한 조경설계를 의뢰하게 된 것이다.

 

이때 1기생들에게 이러한 프로젝트를 맡긴 것은 학생들에게 실습의 기회를 갖게 하자는 의도도 있었다.

 

서울대 환경대학원 조경학과 초창기(1, 2, 3)의 입학생들은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조경학석사라는 희소성 때문에 직장을 구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특히 환경대학원 초창기 조경학석사들은 각 대학에 조경학과가 신설되면서 교수요원이 부족했기 때문에 졸업하자 마자 곧바로 교수로 채용되는 행운을 얻었다.

 

이것은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면서 어려운 길을 가고자 하는 자에게 보답으로 돌아오는 행운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전국 각 대학교의 조경학과 중진교수들 중에 서울대 환경대학원 출신이 많은 이유가 초창기에 각 대학 조경학과의 교수요원이 없었던 시절에 조경학석사를 취득한 조경전공자가 유일하게 서울대 환경대학원 조경학과 출신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서울대 환경대학원 조경학과 1기 출신 졸업생들은 그 당시 설립된 각 대학교 조경학과에 진출하였는 바 서울대 환경대학원과 같은 시기에 설립된 영남대 조경학과에는 현중영 교수가, 서울대 농대 조경학과의 교수로는 임승빈 교수와 안동만 교수가, 1974년에 설립된 청주대학교 조경학과에는 정영선 교수가, 1975년에 설립된 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에는 이규목 교수가 채용되어 각 대학교의 조경학과를 이끌어 가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2기와 3기 졸업생들도 1975년에 개설된 동국대 조경학과에 서원우 교수가, 1976년에 개설된 경희대 조경학과에 안봉원 교수가 채용되어 학과를 이끌어가는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서울대 환경대학원의 교과과정은 외국 일류대학교의 조경학과 교과과목을 참고하여 만들었고, 서울대 환경대학원 출신이 타 대학교 조경학과 교수로 채용되었기 때문에 서울대 환경대학원의 교과과정이 타대학교 조경학과의 교과과정을 만드는데 준거가 되었다.

 

한 동안은 우리나라 조경학과의 교과과정이 서울대 환경대학원의 교과과정과 거의 유사한 시절도 있어서 대학간의 특색이 전혀 없다는 비난을 받은 적도 있었다. 조경분야가 박정희 대통령시절에는 청와대에 조경담당 비서관을 둘 정도로 역점을 두는 분야이었기 때문에 조경분야의 인력양성이 가장 시급한 문제이었고 그로 인해 교육부에서의 조경학과의 신설허가는 비교적 용이하게 이루어졌다.

 

이를 알게 된 각 대학교의 재단에서는 학생증원을 신청하는데 가장 손쉽게 할 수 있는 조경학과의 신설을 우후죽순처럼 해오게 되어 오늘날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조경학과 졸업생이 배출되고 있다. 1970년대에 설립된 조경학과는 이미 언급된 대학교 외에 1978년에 성균관대 조경학과, 1979년에 효성여대 조경학과가 설립되었으며, 전문대학에도 조경학과가 설립되었는데 1975년에 신구대 조경학과, 1977년에 상지전문대 조경학과, 1978년에 경남공전 조경학과가 설립되었다.

 

한국조경학회의 창립

각 대학에 조경학과를 신설하는 것과 때를 맞추어 한국조경학회가 1972 12 29일에 창립되었다.

 

이 때는 조경학을 전공한 교수가 거의 없었던 시기이었기 때문에 조경학을 전공한 오휘영 비서관이 주도하여 인접분야의 원로들과 협의를 한 후 학회를 창립하게 되었는데 그 당시 조경학의 인접분야인 임학과 원예학의 교수들이 많이 참여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 맞추어 조경학회 초대회장은 임학분야의 중진이었던 고려대 임학과의 김장수 교수를 추대하게 되었으며 부회장은 오휘영 비서관과 건국대 원예학과의 이일구교수를 추대하였다.

 

조경학의 인접분야중 도시계획이나 미술, 공학 분야의 교수들은 조경학에 대한 이해가 적어 극히 소수의 교수들만 관심을 가졌고 임학이나 원예학의 교수들은 일부대학에서는 조원학과목의 강의가 오래전에 개설되어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조경에 대한 이해가 높아 조경학회에 대한 관심이 많았었다.

 

초창기에 한국조경학회가 임학이나 원예학 분야의 교수나 전문가들이 많이 참여하다 보니 조경학이 조경수목에 치중하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경향이 조경학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을 형성하는데도 큰 영향을 미쳤다.

 

아직까지도 일반 국민들의 조경분야에 대한 인식이 조경수목을 심는 일로 협소하게 인식하는 것도 일부 원인은 초창기의 조경학회의 인적구성에 영향을 받은 때문이기도 하다.

 

한국조경학회가 창립된 후 최초의 세미나인 “창덕궁 궁원조경세미나 1973 3 7일에 문화재관리국 회의실에서 개최되었는데 7명의 참석자(김일용 문화재관리국장, 김장수 한국조경학회장, 이일구 건국대 문리대학장,

오휘영 청와대조경담당비서관, 민경현 청와대 조경담당비서실 행정관, 윤국병 고려대 교수, 서원우 한국조경학회 간사)가 참석하고 당시 문화재관리국에 근무했던 정재훈 씨가 사회를 보았다.

 

1974 1 11일에는 한국조경학회가 주최한한국조경계의 당면과제에 관한 세미나를 서울대 보건대학원 대강당에서 개최하였다. 이 세미나에서는 조경교육제도분야, 조경행정제도분야, 조경업계육성분야의 3개 분야별 주제발표와 토론이 있었다.

 

1975 6 30일에는 국내최초로 외국조경가가 방한했는데 세계조경가협회(IFLA) 부회장으로 있었던 John Oldham 씨가 한국종합조경공사 회의실에서조경설계의 사적고찰이라는 제목의 특별강연을 하였다. 1978년에는 학회 주관으로 제1회 전국대학조경작품전을 덕수궁에서 개최하였으며 그 후에 학생뿐아니라 기성 조경가들의 작품도 전시하는 전국조경작품전으로 확대되었다.

 


사진의 좌측은 1917년에 출간된 DESIGN> 초판, 중간은   DESIGN>의 번역본인 <조경학 개론> 초판(1974 8 30), 우측은 조경에 관한 세미나속기록

 

조경전문서적의 발간

조경분야의 전문서적은 조경학이라는 제목은 아니지만 「조원학」이라는 제목으로 윤국병, 김장수, 임경빈, 민경현 등 8인의 저자가 공저한 서적이 이미 1966년에 초판이 발간된 후 1974년에 7판이 발행되어 있었다.

 

책의 내용으로 보면 정원사, 정원, 도시공원 등의 내용을 담고 있어 조경에서 다룰 수 있는 내용을 용어만 조원으로 사용한 것으로 판단된다.

 

1972년에는 박정희 대통령의국토를 잘 보존하자는 지시사항에 발맞추어 한국도로공사에서 내부직원들이 집필한「고속도로의 조경」이라는 서적을 발간한 바 있으며, 1973년에는 총무처로부터 공무원훈련원에서 사용할 조경관련교재를 편찬해 달라는 요청을 받아 한국조경학회 이사들이 분담해 집필한 공무원 교육용교재로 366페이지의「조경」이라는 책자를 발간한 바 있다.

 

1974년에는 Henry Vincent HubbardTheodora Kimball 1917년에 공저한 조경학 분야의 고전인「An Introduction to the Study of Landscape Design」이라는 서적을 이일구, 오휘영이「조경학개론」이라고 번역한 책이 발간되었다.

 

1979 12 29일에 창립된 한국조경학회는「한국조경학회지」창간호를 1973 10 10일에 발행을 했다.「한국조경학회지」창간호를 보면 몇 가지 흥미있는 내용이 들어 있다.

 

김장수 학회장의 인사말씀이 실려있는 데 인사말씀 직전 페이지에 박정희 대통령의“국토를 잘 보존하자는 친필휘호와 지시사항 메모글씨가 실리고 있다. 또한 학회장의 인사말씀 다음 페이지에는 당시 내무부장관이었던 김현옥 장관이 창간사를 쓰고 한국국립공원협회장이며 한국과학기술단체 총협회장인 김윤기 회장의 인간과 조경이라는 글이 실려 있다.

 


한국조경학회지 창간호에 실린 박정희 대통령 친필휘호

 

창간호에는 6편의 논문이 게재되었는데 모두 조경식물에 관한 논문이라는 점이 그 당시의 연구경향을 알 수 있다. 또한 창간호에는 5편의 논설이 실려있는데 김장수 회장이국립공원과 자연보호”, 오휘영 부회장이조경가

의 사고”, 최영박 고려대 이공대교수가공공 토목시설의 경관문제에 대하여”, 건축가인 김수근 씨가신창조기능주의”, 당시 서울대 환경대학원생이었던 현중영 씨가환경의 인간화와 조경이라는 제목으로 원고들을 게재했다.

 

창간호부터 1994년까지 한국조경학회지의 표지제호가 한자로 쓰여 있었는데 한자제호는 그 당시 고려대학교 도서과장으로 재직했던 이춘재 씨가 쓴 글이었으며 1995년부터 학회지의 표지 디자인이 바뀌면서 제호를 한글로 바꾸었다. 한국조경학회지의 초대 편집위원장은 고려대 원예학과의 윤국병 교수가 담당했으며 장문기, 윤병호, 이상식, 정현배 씨가 편집위원으로 수고를 하였다.

 

마치며

1970년대 조경분야가 태동할 당시의 이야기를 학술분야에만 초점을 맞추어 서술하였으나 누락된 부분이 많이 있다. 필자는 조경분야의 태동기에 미국에서 조경교육을 받고서 조경분야 태동기 교육의 중추적인 역할을 했었던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강의를 시작했기 때문에 태동당시의 흐름을 어느 정도 알고 있어서 태동기 이야기를 하게 된 것이다.

 

한가지 안타까운 것은 조경학회의 기념행사를 하면서 발간된 책자원고 중에는 우리나라 조경의 역사에 관한 서술내용이 사실과 다른 오류가 있는 부분이 발견되는데 후학들이 그 내용이 사실인지 알고 그대로 인용을 하고 있기 때문에 조경야사에서 이를 수정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조경분야가 태동할 당시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이 제도를 만들거나 산업분야를 육성하는 일이 아니라 학회를 만들고 조경교육부터 시작했다는 점이 특이하고 선견지명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연재필자 _ 양병이 명예교수  ·  서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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