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의 공동체적 의무 ‘사회참여’

"공동체와 함께 하는, 공동체를 위한 조경"
라펜트l오정학 논설위원l기사입력2013-03-23

조경의 사회적 책무가 갈수로 커지고 있다. 이를 위해 조경계의 대표적 단체인 환경조경발전재단에서 적극적인 사회참여를 위해 발 벗고 나섰다. 환경조경나눔연구원 창립이 그것인데 매우 시기적절하다. 조경분야는 지금까지 사회참여가 그리 활발하지 않았다. 일반인들에겐 없어도 살아가는데 큰 탈이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 공원녹지는 도시 인프라의 한 요소가 되었다. 좋아진 생활수준과 늘어난 여가시간이 갈수록 조경을 많이 찾도록 만들고 있다. 조경은 공공공간을 많이 맡고 있어 일반인들과의 접점이 적지 않다.

 

조경은 이제 경관·여가활동의 측면에서 점차 기본적인 복지체계로 인식되고 있다. 따라서 생각하기에 따라 사회참여의 문은 도처에 열려있다. 단순한 후원이나 기증을 넘어 보다 적극적으로 도시환경이나 주거문제에 개입하고, 더 나아가 외국으로까지 가서 개발도상국에 어린이 놀이터를 만들어 주거나 학교를 세우는 데 힘을 보태는 조경가들도 있다.

 

조경가의 사회참여는 전문가적 활동이다. 그 점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제와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자본주의 역사가 앞선 서구에선 기부나 기증문화가 이미 널리 퍼졌지 않는가. 자본주의의 불평등 분배 속성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전문가들의 성취와 성과 뒤에는 그 기회를 놓친 누군가가 있게 마련이다. 따라서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과 공동체에 대한 사명감을 한번쯤 생각해 보자. 이렇게 본다면 전문가의 사회참여는 선택이 아니라 오히려 권리이자 의무임을 알 수 있다.

 

전문가 사회참여가 개인적인 차원이라면 기업의 사회참여는 조직적 차원이다. 말 그대로 차원이 다르다. 개인적인 차원으로는 할 수 없는 또 다른 많은 일들이 가능하다.

 

점차 사회 현상으로 굳어지고 있는 윤리소비를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시대적인 흐름은 갈수록 기업의 사회참여를 더 많이 요구한다. 기업의 영향이 점점 커지면서 사회에 대한 책임의 상당 부분이 정부에서 기업으로 넘어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조경 분야에서도 사회참여에 대한 관심이 점차 늘고 있다. 그러나 체계적으로 계속 이어가는 기업은 많지 않다.“아직 규모가 작으니 좀 더 회사가 크면 하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사회참여를 단순히 다른 이에게 베푸는자기 희생으로만 볼 때 빠지는 오류이다. 그러나 기업 규모가 작으면 그 수준에서, 또 커지면 그에 맞는 역할이 따로 있을 것이다.

 

물론, 사회참여는 사회적 약자나 공동체를 대상으로 한대가를 바라지 않는 선물이다. 따라서 원칙적으로는 증여의 한 형태로 볼 수 있다. 얼핏 기브 앤 테이크(give and take)가 익숙한 현대 자본제 체계에서 다소 이례적일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행동의 역사적 뿌리는 매우 깊다. 인류학자 모스(M. Mauss)는 그 기원을 찾아 원시공동체사회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당시에는 누구나 아무런 대가 없이 주고받는 것이 일상이었고, 공동체 생활의 중요한 밑절미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주고 받고 되돌려주는 행위들을 사회를 유지하고 결속시키는 중요한 장치로 해석했다.

 

또 다른 인류학자인 고들리에(M. Godelie)는 이 때 주고 받는 것은 사실 어떤 결과물이 아니라 그것의 효력이라고 보았다. 즉 사회를 결속하고 재생산하는 힘은 이렇게 주고 받으면서 순환하는 행위의 효력에서 비롯됨을 강조했다.

 

칼라하리 사막의 부시족은 선물을 받으면, ‘왜 이리 형편없는 것을 주었지?’라고 한다. 감사할 줄 몰라서가 아니다. 선물을 준 상대방이 오만한 마음을 갖지 않도록 관행화된 문화이다. 자기과시나 목적성이 없다면 주고 나서 잊어버리는 것이 진짜 선물이리라. 왜 잊어 버려야 할까?

 

앞서 소개한 모스가 그에 대해 답을 주고 있다. 그는 남태평양의 원주민에 대한 연구를 통해 증여에는하우(hau, 영적인 힘)’가 머물고 있어 후속적인 선순환을 만들어낸다고 보았다. 즉 증여에는 힘이 존재하며, 이 힘이 스스로를 유통시키게 만들기 때문에, 결국 돌고 돌아 최초의 증여자에게 다시 간다고 보았다.

 

사회 참여가 활발한 기업이 지속적으로 성장한다는 것은 이미 국내외의 많은 통계에서 확인된다. 단순히 자기희생적인 봉사가 아니라, 장기적으로 그 기업을 지속가능하게 해 주는 동력이 됨을 알 수 있다.

 

굳이 이런 때문이 아니더라도 조경은 보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야 한다. 타자를 위한 존재의 가치를 보여야 한다. 물론 지금까지도 다중을 위해 공공조경이 있었다. 반면 소수의 호사가적 취미로만 존재하거나, 소비공간에서 자연의 시뮬라크르가 되어 자본의 호명에 충실한 적도 많았다. 그러한 공간에서 조경은 다중의 기호적 욕망을 자극하는 자본의 첨병이었다.‘장소를 만든다는 구실로 또 다른 곳의 장소성을 훼손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마침내 자본의 양극화에 이은 공간의 양극화를 초래한데 무관하지 않게 되어 버렸다. 그 결과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조경이란 말의 의미는 매우 양가적이다. 이를 방치하면 조경의 의미가 더욱 왜곡될 수 있고, 결국 조경과 조경인의 입지를 약화시키게 된다.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공동체와 함께 하는, 공동체를 위한 조경임을 종종 되새길 필요가 있다. 조경의 사회 참여가 중요한 또 다른 이유이다. 

 


환경조경나눔연구원 1차 운영위원회의
 

_ 오정학 논설위원  ·  라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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