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명사특강]장태현 교수의 실크로드를 찾아서[제2회]

지금도 서안(西安)에는
라펜트l장태현 명예교수l기사입력2013-05-16

서안의 역사적 배경

 

역사와의 만남이란 지난 세월 인간들의 행위와 흔적에 대한 경이에서 시작 하여 현재시간에 대한 새로운 놀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닐까?

 

서안은 3000년 시간과의 만남을 도처에 간직하고 있는 세계의 고도(古都)로서 진시황제, 양귀비, 현장(玄奘) 등을 떠올리게 하는 장소이다. 역사의 신비함이 인간과 시대를 초월하여 불가사의로 다가오는 장안(長安)은 무척 오랜 역사적 배경을 갖추고 있으나, 현재의 서안일대에 자리잡게 된 것은 한나라부터이다.

 

장안이 중국 천하를 다스리던 수도로서 명성을 누리게 된 것은 전한, , 3대로서 실크로드가 가장 번영했던 시기와 일치하고 있다.

 


(좌측 상단부터 시계방향)

화청지 경내 입구에 있는 양귀비의 벽화

서안의 역사성을 말해주는 화청지 안의 양귀비상
진시황의 묘에서 발굴된 당시의 마차

현대적 수변 공간으로 가꾸어진 서안성해자

 

서안은 실크로드의 동쪽지점이기 때문에 외국의 사신, 상인, 스님 등이 모여 들었으며, 서역 전래의 물산과 문화 등이 중국과 외지로 전파되었다.

성안 동시(東市)와 서시(西市)에는천하사방의 진기한 보물이 모두 모인다(사방진기계행적집; 四方珍奇階行積集)”고 전하고 있으나 이시장만으로 교역을 감당할 수 없자 노점들과 야시장이 번성하였다고 한다.

 

밤낮 시끄럽고 등불이 꺼질줄 몰랐다고 하는 야시장은 오늘도 그 전통이 계승되고 있고 주로 서시(西市)에서는 실크로드를 통한 교역상으로 번성 하였다고 전해져 온다.

 

당나라 시대 장안성은 인구가 백만이 넘었고 행정과 치안이 엄정하였으며, 가로의 질서도 정연하였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각궁성은 물론 곡강지(曲江池)나 화청지(華淸池)같은 인공과 자연이 잘 조화된 경관이 곳곳에 있어서 세계 최대의 미도(美都)로도 손색이 없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장안의 번성도 안록산의 난에 이어 당나라 말기의 농민전쟁과 군벌의 발호로 황도로서의 기능이 사라지자, 신성(新城, 907-1368)을 정비하여 명맥을 유지하게 됐다.마르코 폴로(1254~1324)도 동방견문록에서지극히 아름답고 장려하다.”고 장안성을 찬탄하였다.

 


고도 장안의 시장 풍경그림. 서역인과 풍물이 당시를 재현하고 있다.

 

고도 서안성(古都 西安城)

 

오늘날 서안성은 명나라 시대 수축(1368)된 것을 기본으로 약간씩 손질되었는데, 이 성을 바탕으로 서안은 새로운 도시로서 번영을 누리고 있다.

 

서안성은 현재 도시의 심장부로서 동, 서가 남북보다 길고 총 둘레가 11km나되는 세계에서 제일 완벽하게 보존된 성이다. 밑변 16m, 높이 14m이며, 성벽상단의 평균폭은 12m에 이르는 거대한 축조물인 것이다.

 


(좌측 상단부터 시계방향)

서안시, 주작대로가 남북을 가로지르고 있다.
서안성의 동문 입구

서안 종루 위의 명대 철종
당나라 당시 세계 제일의 도시였던 장안성의 규모(성곽둘레 36.7㎞ 면적84㎢)

 

그동안 역사의 부침 속에서도 보존되어 왔고, 특히 현대사의 하나인 국, (, ) 전투에서도 합의에 의해 성밖에서 승부를 겨루었다니, 가히 중국인의 역사관과 전통의 힘을 과시할 수 있는 현장으로 내세울만 하다.

 

1990년대 초 2회에 걸친 답사보다도 도시 외곽을 일주하게 정비되어 있었고 해자 주변은 근린주민들을 위한 공원 녹지로 조성되어 있었다.

 

관중평원(關中平原) 중심지이고 황하(黃河) 상류에 위치함으로써, 물을 지배하면서 하류에 세워진 중원의 11개 왕조를 담아 왔던, 오늘의 서안성을 한고조(漢高祖)가 다시 볼 수 있다면 과연 어떠한 감회에 젖었을까?

 

서안성에서 내려다 보이는 오늘의 도시 모습에서 자전거의 홍수, 회색의 콘크리트 건물, 아파트 창가에 널려져 있던 세탁물과 새조롱, 나무그늘 밑의 노인들과 어린이 등 1990년대의 모습은 사라지고 있었다.

 

(좌측 상단부터 시계방향)

서안성 성곽위에 전시된 당시의 무기류
서안성 성곽위의 폭과 망루들
변모된 오늘의 서안시 가로
옛 장안성터에 중첩된 오늘의 서안시

 

비림(碑林)

비림은 서안성 남문 동쪽의 백수림가에 위치하며, 섬서성 박물관의 일부이다. 서안문묘(西安文廟, 공자묘)였는데 한, , , 송대의 석비(石碑)나 법첩(法帖) 등의 공문서 보존의 목적으로 837-1090년에 걸쳐 수집된 당시의 도서관이었다.

 

첫시원은 송대(宋代) 때였으며 명, 청 시대에 보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또한 중국서예사 연구에 막중한 보고로서 1095기의 석비가 숲을 이룬다.

 

모두 6실로 이루어진 전시관을 걷다보면 작품수에 비해 건물이 허술하고 작아 아쉬웠고, 무엇부터 보아야 할지 당혹스러울 정도였다.

 

1990년대 초 답사 때의 산만했던 외부공간은 정비가 끝난 듯 했다. 문묘와 같은 분위기의 정원을 지나면 당현종(唐玄宗)의 어주 효경비(御註孝經碑)가 눈에 들어온다. 한자의 많은 숫자도 놀라웠지만 자체(字體)도 매우 다양해 아름다웠다.

 

(좌측 상단부터 시계방향)

비림 정문 앞의 광장
비림 전시관 입구
각양각색의 석비들은 양도많아 숲을 이루고 있다

당현종의 어주효경비, 자신의 도덕적 패륜을 호도하고 있다



(좌측 상단부터 시계방향)

옹색한 공간에 전시된 다양한 모습들

아름다운 연못가의 정자들

온천장의 내부, 황제 비빈들을 수발하던 노비들의 전용탕
고대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화청지의 전각들

 

화청지(華淸池)

화청지는 인간의 욕망 중 가장 추한 모습을 담고 있는 욕지(浴池)가 아닐까? 이곳은 서안에서 약 30km 떨어진 여산(驪山) 서쪽 기슭에 위치하며, 3000여년전 주나라 시대부터 이용되었던 온천지대 이다.

 

당나라 현종(玄宗)이 친아들 수왕의 아내인 양귀비를 총애하면서 세기의 로맨스가 벌어진 그 곳이기도 하다.

 

천연온천을 이용한귀비지, 양우대, 장생전등의 유적지가 있으며, 구룡당(九龍堂), 비하각 등 주변의 정원시설이 당시의 화려했던 분위기를 살려 주고 있다. 이러한 건축들은 1949년에 복원된 것들이다.

 

1982년 봄에 발견된 당대(唐代)의 대욕지(大浴池) 1개는 원래 상태대로 발굴되었고, 1990년대 초기보다도 더욱 많은 발굴복원이 있었는지 전각들이 들어서 있다.

 

산중턱에는 오간가(五間家)가 보존되고 있어 장개석 정부와의 국공(國共) 내전의 종식 현장을 보여준다.

 

관심사항 중 하나는 양귀비의 출신으로, 719년 사천에서 태어났다고 알려졌지만 귀비의 선조는 서역인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그녀의 선조가 서역에서 넘어 왔다면 전통적인 수형미인상(秀形美人像)이 아닌, 글래머형의 서역미인으로 표준척도가 변한 것이므로, 실크로드를 따라 들어온 서역문화의 형성배경설도 가능할 것이다.

 


(좌측 상단부터)

화청지 속 정원모습
비록 오늘의 조각상이라도 역시 양귀비라 하니 자주 눈을 돌리게 된다.
옥외 온천의 수조

(우측 상단부터)
중국 근대사의 전환점이 된 “서안사건”의 현장, 장개석이 체포된 곳이다.
진시황능 지하궁전의 주차장

 

진시황릉(秦始皇陵)

진시황릉은 관중(關中)평원의 전원지대를 지나 여산 북쪽 기슭에 위치한다.

시황제가 즉위하고부터 능의 조성이 시작되었으며, 기원전 221년 중국 통일후에는 70여만명의 전국형도를 시역하여 그 규모를 넓혔다고 전해져 온다.

 

현재는 중국최대 규모의 분구(높이 500, 주위 5)만이 남아있고 침전이나 대다수의 건조물은 B.C 3세기경 항우군의 방화로 파괴돼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분구(墳丘)의 정상에는 25x40m 정도의 넓은 공지가 있는데 건물터였는지는 알 수 없고, 바깥문이 동쪽으로, 지하 근위 군단이 동쪽에 배치된 것으로 보아 진()이 중국 중원의 서쪽에서 일어나 동방진출의 사상이 표현된 것이고 생명의 근원인 동향(東向)사상도 작용하였으리라 추측하기도 한다.

 

현재의 76m 정상에서는 관광객을 위한 생수판매도 있으며 올라가는 길까지 마련되어있다.

 

능의 동쪽 1500m에 그동안 정리되어 변모된 병마용(兵馬俑) 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다.

 

10년 동안 많은 변화를 겪어서인지 처음 찾은 곳과 같이 생소하였고 접근 방법이나 전체 규모도 1, 2, 3 동으로 확장되어 있었다. 돔구조 자체가 박물관 건물로 생생한 당대 유물들을 보여 주고 있다.

 


(좌측상단부터 시계방향)

진시황능 묘역은 우측에, 발굴된 지하군단은 좌측에 위치하고 있다.
중요한 유물들은 별도의 박물관에 정리되어 있다.
전시장 내부 지하군단의 위용

2000여년 넘게 지하에서 살아온 도용

 

동서 길이 230m 남북 너비가 62m나 되는 거대한 규모(14260) 4m50cm깊이의 지표 밑으로 11개의 갱이 세로로 줄지어 발굴되어 있었다.

 

묻혀 있는 도용(陶俑)과 도마(陶馬)는 모두 6000여구로 생동감 있는 군진(軍陣)과 꼭 같이 배치되어 있어 그 규모에 압도된다.

 

1호갱의 군단은 진나라 군사편제상 좌, , 중군의 우군(友軍)으로 추정, 보병, 기병 혼성 병단을 익군으로 하는 전차부대로서 항상 선봉을 맡았던 최정예 부대였다고 한다.

 

1, 2, 3 호 갱에서 나온 유물을 합하면 전차 130여량, 차를 끄는 도마 500여두, 기병이 탄말 116, 병사 7000여구 등으로 그 수량이 어마어마하다.

 

모든 유물들은 실제의 실물크기이고 묘사되는 표현도 당대의 사실 그대로를 보여주고 있다.

 


(좌측상단부터 시계방향)

충성스러운 병사들이 관광상품이 되었다.
하나도 같은 인물이 없다.

박물관에 전시된 용사상
천정의 통나무들은 완전 전소되지 않아 숯으로 남아있다.

 

또한 진나라 군대의 주류가 관중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역사 기록과 모양새가 일치하며, 하나도 동일인물이 아닌 사실주의 조각에 경탄과 감동을 불러 일으키게 한다.

 

이 도용이나 도마는 원래 사실적인 채색이 되어있었지만 항우군에 의해 불에 타고 흙이 침투되거나 긴 세월 동안 지하수에 의해 청회색으로 되었다고 하며, 중국의 조각사상 최고의 전형(典形)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곳은 1974 5월 인민공사 소속 농군들이 농업용 우물을 파다 발굴이 시작되어 세계적인 발견이 이루어졌다.

 

한 때 일본정부기 대신 발굴하여 그 성과의 1/4을 요구하자, 중국 정부에서는수천년동안 묻혔듯 앞으로 수천년이 걸리더라고 일본의 지원을 원치 않으며 발굴유물 중 1/4로 일본 전체를 사겠다고 답변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역시 일본인다운 제안이고 중국인다운 생각이라 할 수 있다.

 

박물관을 나오면 주변에는 보리밭이 넓게 펼쳐져 있고, 길가에는 실크로드를 따라 들어온 석류가 드넓은 밭을 이루고 있다.

 

박물지(博物志)한의 장건이 서역을 개척하고 안석국류(安石國榴)를 가져왔다는 이야기대로 석류는 페르시아(안식국)의 류()가 중국으로 들어온 것으로 풀이된다.(계속) 

 


채색흔적이 남아있는 전차와 도마(좌측상단)

여러가지 자세의 용사상(우측상단, 좌측하단)
박물관의 내부(우측하단)
 

연재필자 _ 장태현 명예교수  ·  청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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