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후원은 ‘삼신산’을 어떻게 표현했을까?

문화재청 창덕궁관리소 ‘창덕궁 깊이 보기’ (2)
라펜트l전지은 기자l기사입력2021-07-23


애련지와 애련정. 지금은 소실된 어수당의 지당(하지)이었다.


문화재청 창덕궁관리소는 창덕궁의 역사와 문화적 가치를 조명할 수 있는 분야별 전문가를 초청하는 ‘창덕궁 깊이 보기’ 행사를 지난 9일 송석호 고려대학교 조경학연구실 연구원과 함께 창덕궁 후원에서 열었다. 이날 행사는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를 지켜 진행됐으며, 해설은 무전으로 이루어졌다.



어수당의 지당, 영소


창덕궁 후원의 어수당(魚水堂)은 임금이 아끼는 신하들을 접견하던 장소로, 현재는 소실됐지만 애련정이 조영되기 이전부터 일대의 경관과 후원을 경영하는 핵심건물이었다.


어수당이 조영될 때 지당이 함께 축조됐다는 명확한 근거는 찾을 수 없지만 효종의 『어수당원앙(魚水堂鴛鴦)』 시에서 표현된 일대 경관모습에 지당이 언급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어수당 지방은 효종연간에 축조됐거나, 어수당 조영당시에 함께 축조됐을 가능성이 높다.


숙종의 『어제궁궐지(御製宮闕志)』에는 어수당 동서에 못이 있었다고 기록돼 지당은 현재처럼 두 곳으로 축조됐을 것으로 보인다.


이 당시 지당의 명칭을 ‘영소(靈沼)’로 명기하고 있는데, ‘신령이 사는 못’을 상징한다.


어수당의 영소는 상지(上池)와 하지(下池)로 구분할 수 있는데, 어수당 소실 이후 연경당을 조영하면서 변화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어수당 영소의 하지 또한 숙종에 의해 지당 가운데 섬이 만들어지고 애련정을 조영했으나 곧 지당의 북변에 이건됨에 따라 섬 또한 사라지고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숙종의 「어수관등(魚水觀燈)」시에 이르기를

화당은 좌우로 지당을 끼고 있는데 / 華堂左右挟池塘

노백 반송이 보개를 펼친 듯 하도다 / 老柏盤松似蓋帳

등불은 휘황하여 천만 점이 켜졌으니 / 燈火焚煌千萬點

밤달이 광명을 빼앗을까 걱정되노라 / 却嫌夜月奪明光

영조 4년(1728) 어수당에서 이조와 병조의 책임자들이 인사 평가를 행하고 왕이 친정하는 장면을 그린 「무신친정계첩(戊申親政契帖)」에는 어수당 동서에 있는 지당의 모습과 원앙을 기르고 있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효종실록』에 따르면 원앙은 예(禮)를 상징한다.



어수당의 상지. 원앙을 길렀다고 기록돼 있다.



숙종의 애련정 조영과 후원 경영


숙종은 14년(1688)에 여주 영릉을 참배하면서 성종 5년(1474)에 건립된 이천 애련정을 방문했다. 4년 뒤 숙종 18년(1692) 창덕궁 후원에 애련정을 조영하고, ‘연은 더러운 곳에 처하여도 변하지 않고, 우뚝 서서 치우치지 아니하여 군자의 덕을 지녔다’고 창건 이유를 밝혔다.


애련정(愛蓮亭)은 사우정(四隅亭)의 형태로 방지(方池)의 못에 정자 전주(前柱)를 담고 있으며 물에 떠 있는 형상을 취하고 있다. 비슷한 유형의 부용정이 정교하고 화려한 정원건축물이라면, 애련정은 소박하고 단아한 미를 갖춘 정원건축물이다.


애련정의 처음 모습은 지당 가운데 섬을 쌓고 그 위에 조영된 정자였다. 하지만 숙종 24년(1698)에 지당의 북변으로 옮겨졌다. 이 당시 애련정의 명칭이 ‘태액지(太液池)’인 것을 알 수 있는데, 태액지는 한나라 무제가 궁궐 안에 판 큰 못을 축조한 것에서 유래한다. 숙종 33년(1707)에는 현 부용지 또한 택수재(澤水齋)를 조영하면서부터 태액지로 불렸다.


봉래산(蓬萊山)으로 대표되는 원도(圓島)의 정자가 사라지고, 이건된 정자의 양측 배후에 괴석이 놓이면서 정자와 함께 삼신선도(三神仙島)를 표현했다.


금상(今上)이 무인년(1698)에 애련정을 연못을 북쪽으로 옮겨짓고, 그 못을 이름 지어 말하길, ‘태액’이라하고, 전문(篆文)으로 연못의 돌에 새겼다.

-『어제궁궐지』 흠문각 조


o가 보운을 계승한지 18년째 되는 봄, 어수당 동쪽 연못 가운데에 정자를 지었는데, 앞에는 영화당에 임해있고, 뒤에는 심추각이 등져 있으니, 천년 묵은 높은 소나무를 쳐다보면, 마치 서린 용이 일산 편듯하고, 한굽이 흐르는 물 바라보면 마치 구슬을 뿌리며 붉게 일어나는 듯 하다.

-『애련정기(愛蓮亭記)


삼신선도의 상징


방지원도(方池圓島)는 천원지방 이론이 풍수지리나 음양오행사상과 체계화돼 발전된 도상학적 정원양식이다. ‘천원지방’은 고대부터 전해져내려오는 사상으로 기원전 100년경 서한(西漢) 시대의 『주비산경(周髀算經)』에는 ‘각진 것은 땅에 속하고, 둥근 것은 하늘에 속하므로 하늘은 둥글고 땅은 각지다’ 또는 ‘하늘은 개립(蓋笠)의 형상이고, 땅은 엎어놓은 복반(覆盤)의 모양이다’라고 형이하학적으로 표현돼 있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고대 사람들이 형이학적인 천원지방성에 의문을 제기했다는 것이다.


전한(前漢, BC206 ~ AD 8) 시대의 『대대예기(大戴禮記)』에서 증자는 ‘하늘이 둥글고 땅이 모나면, 네 모서리를 가리지 못할 것’이라고 부정했다. 그 대신 천원지방을 하늘과 땅이 지닌 양과 음의 도(道)를 표현하는 말로 해석하자고 제안했다. 즉, 천원지방설을 형이상학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조선유학에서도 천원지방이론을 단순히 구조적으로 이해하지는 않았다. 당대에는 음양의 대립이 아닌 음양의 소장(消長)에 따라 우주가 존재함을 도상으로 표현한 것으로, 『주역』의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에서 말하는 ‘道’라는 보편적 원리를 바탕으로 둔 형이상학적 이론으로 해석할 수 있다.


유교적으로 해석한다면 지당을 도상학적으로 표현해 자연의 이치를 수양한 것은 책을 읽고 공부하는 것과 더불어 유식이나 자연을 감상하는 유식행위를 통해서도 지식을 쌓을 수 있다는 논리에서 발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도교적 측면에서 방지원도는 신선이 사는 성역으로 원도는 삼신산을 의미하는데, 창덕궁 후원의 경우 지당의 크기에 따라 괴석을 두어 삼신산을 축경한 특징을 보인다.


낙선재 후원에는 지당을 대신하는 석연지를 두었고, 섬을 대신하는 괴석을 두어 삼신선도를 표현했으며, 청심정의 경우도 지형적 요인을 고려해 지당의 기능을 빙옥지가 대변하고, 거북석상을 두어 섬을 표현했다.


앞서 언급된 애련정이 못의 북쪽으로 이건되면서 괴석 한 쌍을 정자 뒤에 놓은 것도 삼신산을 표방한 것이다.



애련정 뒤에 괴석 한 쌍을 두어 삼신산을 표현했다.

글·사진 _ 전지은 기자  ·  라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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