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라빌레트는 그 이전의 공원보다 난해했다. 공원을 도시의 물리적 요소로 보는 기존의 인식을 뒤엎었다. 실험적이고 전복적인 장치가 여기저기 배치되어 있다. 이러한 결과물은 공원설계가의 머리에서만 나오지는 않았다. 철학자 자크 데리다(1930~2004)의 협조가 있었다고 한다. 물론 그 이전에도 공원설계에서 협업은 있었다. 여러 분야의 기술자뿐 아니라 동·식물학자, 역사나 사회학·민속학자들도 그 대상이 되곤 했다. 그런데 베르나르 츄미(Bernard Tschumi, 1944- )가 설계한 라빌레트는 ‘해체주의(deconstruction)’에 관심을 두어 철학자를 설계에 참여시킨 특이한 사례였다.
해체주의의 특징은 역사적 계승이 없는 궁극의 아방가르드라는 점이다. 그러한 점에서 포스트모던 계열로 분류된다. 정형적으로 관습화된 구체계적 질서를 오히려 현실성이 없다고 비판하면서 시작된, 반문명 양식운동의 일종이기도 하다. 1960년대부터 싹이 튼 해체주의의 중심에는 철학자 자크 데리다(1930-2004)가 있었다. 그는 알제리에서 프랑스로 유학을 갔다가 그곳에 자리 잡는다. 프랑스 식민지 태생이었기에 주류에 끼지 못하는 이방인이자, 국외 강연으로 끊임없이 자신의 언어를 발화하는 유목민이었다.
그런데 대체 무엇을 해체한다는 것일까? “해체는 전통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모든 것을 뒤집어엎고 기존 개념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16쪽).” 왜? 무엇 때문에? 그 이유는 전통과 관습의 이름으로 권위와 질서에 가려져 있던 것을 새롭게 드러내기 위함이다. 그러기 위해 이전의 형식에 균열을 내고, “모든 것을 해체하고 새로 시작할 수 있는 가능성을 새롭게 탐구하자는 의미(22쪽)”를 가진다.
얼핏 역사가 오랜 지역에서 공간의 해체는 자칫 위험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보면 그러한 공간에서 오히려 더 필요할지 모른다. 특정한 지역성과 전통성이 그 이상의 또 다른 가치를 계속 가려왔거나, 새로운 정체성 형성을 방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람직한 공간은 “재생산이나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이면의 무언가를 드러나게 하고 동시대성이 반영되어 새롭게 창조되어야 한다...구축방식이나 재료의 사용, 혹은 구조적 제약은 현시대에 맞게 해체되고 새롭게 표현될 수 있는 방법론이 끊임없이 실험되어야 한다(24쪽)”는 것이 해체주의의 기본 입장이다.
이처럼 해체주의는 역사적 연속성을 부정한다. 공간적 질서의 근원이 되는 모든 과거적 권위로부터 벗어나고자 함이다. 이때 ‘연속성’은 특정 대상이 그 자체로 독립적인 존재라기보다는 주변의 환경적 맥락 속에서 사회, 문화, 역사적 의미로 해석됨을 뜻한다. 그것은 지역주의일 수도 있고 전통성일수도 있다. 해체주의는 특정 지역의 정체성을 구축하는 이러한 연속성을 과감히 벗어던지고 전복적인 차별화를 꾀한다. 그 때문에 해체주의적 공간은 대개 금방 눈에 띄는 랜드마크가 된다. 해체주의의 계보를 이은 자하 하디드(Zaha Hadid, 1950-2016)의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해체주의는 도시 활성화의 유용한 수단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해체주의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공간의 컨텍스트를 정확히 해석해야 할 뿐 아니라, 결과물을 알레고리적으로 제시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설계자가 자가 이를 제대로 극복하지 못할 때 다소 과격한 방법론과 설계언어의 유혹에 빠지기 쉽다. 그 결과는 회화 입문자가 그린 비구상화와 비슷하지 않을까?
전통의 창조적 계승이 기존 형태의 판에 박힌 재현이나 과거 질서체계의 충실한 답습만은 아닐 것이다. 지역의 역사성과 전통성을 새롭게 해석하는 것은 전통과 현대의 또 다른 조화가 될 수 있다. 따라서 해체주의는 다원주의의 길을 모색하는 사회에서 여전히 유용한 수단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