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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에 실린 한국현대조경(2)

비공개l2005.01.15l3447
“부자 질투하는 마음도 없어질…” [한겨레21 2005-01-14 18:12] 자생적 문화 꽃피우기엔 어려움 많았던 한국의 공원사… 박정희식 녹화사업 거쳐 시민공원의 시대로 ▣ 이유주현 기자 edigna@hani.co.kr 1880년대 개화기 지식인으로서 일본과 미국 등에 머물며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기록한 유길준은 <서유견문>(1895년 간행)에서 ‘정부의 직분’으로 다음과 같은 일을 꼽았다. “나라 안의 큰 도시마다 도서관, 식물원, 박물관, 공원 등을 개설하는데, 이는 국민의 지식을 실제적으로 돕는 큰 기틀이 되므로 정부가 크게 힘써야 할 중요한 일들이다. …나라 안에 이러한 장소가 많으면 자연히 인습을 교도하여 바른 길로 나아가게 할 수 있고 방탕한 행실이나 사특한 습속을 잘라버리게 되어 악한 일에 빠지는 자가 적어진다.” 그는 특히 공원의 효용성에 대해 힘주어 말한다. “그 중에서도 공원을 여기저기 만드는 것은 무익한 일이라고 말하는 자도 있을지 모르겠으나 결코 그렇지 않다.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나 간에 결코 각각 그 영위하는 사업에 분주하여, 정신이 피곤하고 기력이 나태해졌을 때에 공원에 들어가 한가한 걸음걸이로 소요하고 꽃향기를 맡으며 수목이 우거진 그늘 밑에서 청명한 공기를 호흡하고 아름답고 고운 경치를 감상하면 가슴이 맑아지고 심신이 상쾌하여 고달픈 모습이 스스로 사라질 것이다. 이러한 곳이 있다는 것이 사람들의 심신의 건강에 도움이 될 뿐 아니라 그렇게 많은 재산을 들여 공중을 위한 즐거움에 이바지한다는 것은 실상 부유한 분위기를 가난한 자와 함께 이바지한다는 뜻이므로 빈자가 부자를 질투하는 마음도 없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서울시민 1인당 공원면적 1.5평 주미 전권대사인 민영익을 수행해 보스턴대학에서 공부했던 유길준에게 공원은 이처럼 국민의 품성을 계도하는 공간, 시민들에게 차별 없는 혜택을 주는 공간, 계급간 적대감을 해소하는 공간이었다. 이는 서양에서 근대적 공원이 시작된 뿌리와도 크게 다르지 않은데, 19세기 중엽 도시 곳곳에 대규모 공원이 만들어진 것은 산업혁명 이후 도시의 인구 집중, 이로 인한 도시의 불량한 위생 상태, 이를 개선하기 위한 시민의식의 성장 등이 맞물려 일어난 결과였다. 그러나 곧 식민지로 전락한 한반도에 자생적인 공원 문화가 제대로 꽃피어나기엔 어려움이 많았다. 일제는 전국 곳곳에 신궁을 설치해 주변을 공원화하는 한편 왕이 살던 창경궁을 동물원·식물원으로 ‘전락’시키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공원은 수적으로도 매우 부족해 1920년대 서울에는 통틀어 한양공원(남산공원)·장충단공원·효창공원·사직공원·삼청공원·파고다공원 등 일반공원 6곳, 아동공원(어린이놀이터) 1곳, 운동장공원 2곳이 있었을 뿐이다. 1925년 당시 경성부 인구 33만6354명과 견주어 인구 1인당 공원 면적은 1.1평에 불과했다. 2003년 조사 결과 서울시민 1인당 생활권 공원 면적이 4.53㎡(약 1.5평)에 불과한 것은 이런 오랜 ‘전통’으로부터 비롯된 셈이다(현재 도쿄시민 1인당 공원 면적은 5.14㎡이며 뉴욕은 14.12㎡, 유엔식량농업기구(FAO)가 권고하는 최저기준은 9.0㎡이다). 1960~70년대 고속성장기에 접어들면 사회 각 분야와 마찬가지로 공원 역시 정부가 주도하는 대형 공사의 외형을 띠게 된다. 지독한 가난과 궁핍 속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던 박정희 대통령은 국토를 푸르게 만드는 ‘녹화사업’을 ‘조국이 발전하는 기준’으로 여겼고 녹화는 곧 조경과 다름없었다. 박 대통령은 직접 나서서 조경 프로젝트를 진두지휘하기도 했는데, 가령 서울 강남구 도산공원 공사를 시찰하는 현장에서 수종을 지정하는 메모를 서울시장에게 전하기도 했다. 또 일과가 끝난 뒤엔 야산 개발 방법, 수종 개량을 위한 산림의 벌채 요령, 농촌 취락구조 개선 방법, 고속도로 주변 조경과 휴게소의 설치 같은 구체적인 사항들을 일일이 메모하고 그림을 그려 이튿날 참모들에게 지시하기도 했다. ‘싸우면서 건설하던 시대’. 경제개발은 국난 극복의 과제와 동의어였다. 박 대통령 스스로 국난 극복의 전형적 상징 인물인 충무공 이순신의 이미지를 덧씌우려 했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를 위해 박 대통령은 충무공을 기리는 현충사 성역화 사업(1967)을 비롯해 고려의 명장 강감찬 장군의 출생지에 꾸며진 낙성대공원(1974), 사육신묘 정화사업(1978)을 잇따라 벌여나갔다. 배정한 교수(단국대 환경조경학과 교수)는 “이런 과정에서 동글동글하게 깎은 향나무를 기교적으로 심거나 자연석을 아기자기하게 쌓는 식의 일본식 정원 요소와 허술한 민족적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한국 전통 정원의 요소가 혼합됐으며, 여기에 목가적인 풍경을 추구하는 스타일이 가세해 널따란 잔디 융단과 큰 키의 나무, 판박이 정자를 조합한 상투적 조경 설계가 우리나라 곳곳의 경관을 치장하는 본격적인 변화가 시작됐다”고 평가한다. 지자제 이후 무엇이 달라졌나 ‘시민과 함께하는 공원’이란 구호가 큰 소리로 울려퍼진 것은 90년대 중반 지방자치제가 시작되면서부터다. 서울시 1기 민선시장인 조순 시장은 여의도공원을 주요 사업으로 추진했으며, 영등포OB맥주공장·여의도샛강생태공원·길동생태공원 등 주민들의 삶에 직접 영향을 끼치는 도시공원 사업을 진행했다. 구제금융기 이후 침체에 빠진 아파트 시장은 ‘그린’ ‘생태’ ‘녹색’ 등을 내세우는 공격적 마케팅 전략을 펼쳐나갔다. 종전까지만 해도 잔디와 나무 몇 그루면 충분했던 아파트 조경에 이른바 ‘테마’라는 것이 도입돼 아파트 단지 안에 실개천이 흐르고 분수가 솟고 꽃무늬 담장이 들어서는 풍경이 연출됐다. 자연의 모사품이라 할지라도 곁에 두지 않고선 견딜 수 없는 세상. ‘녹색화장’이 일상이 돼버린 것이다. ------------------------------------------------------------------ 만국공원, 그리고 파고다공원… 우리나라 최초의 공원은 어디일까? 최초로 만들어진 공원은 1888년 ‘만국공원’으로 알려져 있다. 서양 열강들은 개항 이후 인천을 거류지로 삼고 자신들의 근거지를 만들었는데, 각국의 세력을 완충해주는 공간으로서 해발 69m의 자그마한 야산 응봉산(또는 응암산)을 공원으로 만들어 ‘각국공원’이라 이름붙였다. 서울대 환경대학원 성종상 교수(환경조경학과)는 “그러나 만국공원은 연대기적으로는 우리나라 최초의 공원이지만 땅만 우리 땅일 뿐 전적으로 외국인의 공간”이라고 평가한다. ‘만국공원’은 일제강점기에 신궁이 설치되면서 ‘서공원’이라 불리다 한국전쟁 때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한 맥아더를 기념해 ‘자유공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지금도 자유공원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곳에는 맥아더 동상이 서 있다. 외국인의 손으로 만들어진 만국공원과 달리 옛 원각사터에 자리잡은 파고다공원은 한국인의 손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공원이다. 1964년 발행된 <서울특별시사 고적편>에는 대한제국이 출범한 광무원년 1897년 고종의 재정고문인 브라운의 건의에 의해 공원으로 꾸며졌다는 기록이 나온다. 조선 세조 11년(1465)에 세운 사찰 원각사는 연산군 10년(1504)에 폐사되고 ‘연방원’이라는 기생방이 들어섰다. 구한말 사회가 혼란해지면서 원각사터엔 갈 곳 없는 도시 빈민들이 세운 임시 거처가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는데 브라운이 도심 정비를 위해 공원으로 만들 것을 제안한 것이다. 고종은 이곳에 황실 소속의 음악연주소를 설치해 시민들이 공원에 와서 군악대의 연주를 들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고 전한다. 민권의식의 성장, 민주주의의 발아라는 시대적 요구에 따라 시민의 공간으로 열려진 공원도 있다. 지금은 자취를 찾을 길 없지만 서대문 로터리 근처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독립공원이다. 1896년 7월2일 독립협회는 창립총회를 열어 독립문과 독립공원 건립을 협회의 사업 목적으로 정했다. 독립협회는 공원을 만들기 위해 당시 조선에 있던 외국인과 고관대작들에게 기부금을 받아 터를 닦았다. 성종상 교수는 “독립공원에서는 만민공동회를 개최해 정치적 의견을 가감 없이 나누었을 뿐 아니라 운동회를 열기도 했고 밴드를 초청해 음악도 감상하는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있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이같은 ‘우리식의 근대적 공원’은 국운이 쇠하며 꺾이기 시작한다. 한반도 전역이 일본인의 발자국으로 어지러워지는데 공원이 예외일 리 없었다. 경술국치 이후 일본은 대대적으로 전국 곳곳, 각 도시마다 신사를 건설해나간다. 서울의 남산공원·대구 달성공원·부산 용두산공원·군산 월명공원 등 도시의 중심지 또는 조망이 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공원들은 모두 일본신사에서 비롯된 공원들이다. ⓒ 한겨레(http://www.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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