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던길에 만나는 수묵화의 절정 안동의 고산정(孤山亭)

[조경명사특강]이재근 교수의 ‘한국의 별서’ 6회
라펜트l이재근 교수l기사입력2014-04-15

고산정 근경(강충세, 2014): 금란수의 제2별서로 퇴계, 김성일 등 시인묵객들이 많이 찾았다

一歲中間六度歸 : 한 해 여섯 번을 왔건만
四時佳興得無違 : 사철 풍광 어김없네,
紅花落盡靑林暗 : 붉은 꽃잎 떨어지자 녹음 짙어지고
黃葉飄餘白雲飛 : 노란 낙엽 땅에 지니 흰 눈 날리네.
砂峽乘風披梜服 : 단사벽 바람이 옷깃을 헤치고
長潭逢雨荷蓑衣 : 매내 긴 소에서 비가 도롱이를 적시네.
箇中別有風流在 : 이 중에 풍류 있으니
醉向寒波弄月輝 : 취하여 강물 속의 달빛을 희롱하네.
- 금란수(琴蘭秀 1530~1604)의 고산정(孤山亭)-
 
고산정(孤山亭)은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에 있으며, 조선중기의 퇴계의 제자 금란수(琴蘭秀 1530~1604)의 별서이다.


고산정 원경 (강충세, 2014)

금란수는 정유재란(丁酉再亂:1596년)때 안동 수성장(守城長)으로 활약하여 왜군을 물리친 인물로서 좌승지(左承旨)에 오른 바 있는 학자이다. 정유재란이란 임진왜란 휴전교섭이 결렬된 후, 왜장 가등청정(加藤淸正)이 14만의 대군을 이끌고 다시 쳐들어와 일으킨 전쟁을 말한다. 고산정은 안동팔경의 하나인 가송협(佳松峽)의 단애 아래에 자리 잡고 있다. 정자 윗쪽으로는 외병산(外屛山)과 내병산(內屛山)이 병풍처럼 둘러있고, 고산(孤山)이 솟아있어 절경을 이루고 있다.


가송협의 단애 (8곡: 강충세, 2014): 주변의 기암괴석 및 절벽들은 중국의 계림이나 양삭을 방불케 한다

고산정의 답사는 7곡 단천교 예던길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 좀 더 길게는 퇴계종택에서 시작하여 하계, 원촌리를 지나 예던길로 접어들어 마지막 보는 정경이 고산정이 되게끔 동선을 잡으면 더욱 생생하게 고산정을 느낄 수 있다. 우측 강 건너, 층층이 떡시루를 쌓아놓은 것 같은 아름다운 바위층의 단사협을 지나 고즈넉한 백운지 마을을 내려다보며 예던길 전망대에 오르면, 청량산과 학소대가 풍경화처럼 빨려 들어온다. 옛날 선비들은 이곳에서 청량산 산행을 시작했다. 그 길은 단사-매내-올미재-가사리-고산정-청량산으로 이어지는 강변길이다. 그 중 매내-고산정까지의 길은 미천장담(彌川長潭), 경암(景巖), 학소대(鶴巢臺), 농암종택(聾岩宗宅), 벽력암(霹靂巖), 한속담(寒束潭), 월명담(月明潭)을 거치게 되는데, 그 아름다움을 어찌 표현해야 할까?


미천장담 및 학소대(강충세, 2014):
물이 한없이 맑고 고기가 많아 예전엔 먹황새가 날아들었고 지금은 학이 서식한다


농암종택 원경 (강충세, 2014)

퇴계는 이곳에 올라 “이제 그림 속으로 들어간다.”라는 표현을 썼다.
 
烟巒簇族水溶用 산봉우리 봉긋봉긋, 물소리 졸졸
曙色初分日欲紅 새벽여명 걷히고 해가 솟아오르네
溪上待君君不至 강가에서 기다리나 임은 오지 않아
擧鞭先入畵圖中 내 먼저 고삐잡고 그림 속으로 빨려 들어가네
 
인적 드문 산길과 강변 오솔길을 지나 청량산으로 가는 이 길을 퇴계가 걸은 후, 많은 선비들이 그의 길을 찾아 순례자처럼 수도 없이 걸었다. 그들은 자연의 아름다움에 반하여 시와 글을 짓고, 걸으면서 퇴계를 추모했다. 지금까지 죽령 옛길, 구룡령, 대관령 옛길, 문경새재 등이 옛길로서의 명승으로 지정되었지만, 이곳 예던길보다 더 아름답다고 얘기 할 수 있을까? 학소대와 농암종택,한속담을 지나 월명담에 이르면 그 풍경은 마치 층층이 쌓아둔 절벽 아래 달빛이 쏟아져 물에 투영되는 연못과도 같다. 그리고 드디어 가사리를 지나 만나게 되는 고산정(孤山亭)! 선조 때 문신 심희수(沈喜壽: 1548-1622)는 이 정자의 아름다움을 가리켜 “그림이나 글로서 도저히 표현하기 힘들다(眞景難摹畵筆端)”라고 하였고,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1538-1593)은 고산정을 방문한 후 “깊은 산속마다 안고 사는 그대(금란수를 지칭) 심히 부러워라(羨子山居不厭深)”라고 하였으니, 한 폭의 동양화요, 수묵화다.


고산정의 외원: 고산정 주변 외원의 모습을 진경산수화적 기법으로 표현 (김영환작, 2014)



정자의 주인 금란수(琴蘭秀 1530~1604)는 호가 성재(惺齋)로 예안면 부포에 본제(本第)인 성재종택(惺齋宗宅)에서 살았다. 집의 규모나 부재(部材)가 복원된 것이긴 해도 큰 가문의 종택으로 잘 갖추어져 있다. 근처에는 안동의 사라진 27개소의 원(院)가운데 유일하게 원형이 보존된 부라원루(浮羅院樓)도 있다. 금란수는 강변 부라원루 주변에 소나무를 직접 심고 사평송이라 불렀다. 또한 종택 근처에 성재(惺齋)라는 정자를 짓고, 학문에 정진하였다. 성재 앞을 흐르는 시냇가에는 지금도 임경대(臨鏡臺), 활원당(活源堂)글씨가 남아 있다.


성재종택 (본제: 강충세, 2014) : 강변에 있었고 불타 없어졌던 것을 복원한 것으로 예안면 부포리에 있다


성재 : 성재종택에 딸린 정사로 금란수의 제1별서 역할을 했던 은일의 장소로 보인다


부라원루 (강충세, 2014): 600년 이상의 역사를 갖고 있는 예안현 관아의 옛 루로,
건축기법이 뛰어나고 현판은 한석봉이 썼다

금란수는 예던길을 따라 퇴계가 걷던 길을 가던 중, 이곳의 아름다움에 취해 만년에 쉴 수 있는 장구지소(杖屨之所)로 1564년 고산정(孤山亭)을 신축하고 경전(敬典)을 가까이 하였다. 금란수는 “청량산 아래 하늘에서 아끼고 땅에서 감추어둔 별천지 마을이 있고, 해와 달의 아름다움이 상존하는 정자가 있다” 하여 이곳 고산정을 ‘일동정사(日東精舍)’라 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 기와집인데 우물마루를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꾸몄고 전면과 양 측면에는 계자난간을 둘렀다.


고산정위에서 내려다본 정경 (강충세, 2014)

정자 앞으로 강이 시원하게 흘러 오미소(午尾沼)를 이루고, 맞은편 가송협 산기슭에는 송림과 함께 독산(獨山)인 고산(孤山)이 있어 절경을 이룬다. 근처에 물맛 좋은 옹달샘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정자 왼쪽에는 조선총독부에서 세운 조학번식지(鳥鶴繁殖地)라는 천연기념물비가 을씨년스럽게 서있다. 고산정에 오르면 강가를 향해 늘어서있는 소나무들이 압권이다. 내취병 쪽의 소나무는 뿌리가 온 대지 위를 뻗어 나와 있어 수백 년은 족히 될 만하고, 꿋꿋하게 고산정을 지키고 있는 탱자나무도 백여 년 이상은 되었을 성 싶다. 정자 앞이나 내취병(內翠屛) 쪽의 소나무들은 아름드리로 사평송(沙平松)이라 부르는데, 이것은 부포리의 성재(惺齋)와 부라원루(浮羅院樓) 주변에 금란수가 심은 소나무를 퇴계 문하에서 동문수학하던 월천 조목(月川 趙穆: 1524-1606)선생이 “사평송”이라 불러준 것과 우연하게도 일치한다. 고산정에서는 정자의 주인뿐 아니라, 수많은 문인들이 드나들었다. 시를 남긴 문인들만 38명에 78수의 시가 정자에 걸려있기도 하고 금란수의 저서 성재집(惺齋集)에 남아있다. 부포의 성재(惺齋)가 제1의 별서로 본제(本第)에서 주로 사용한 별서였다면 고산정(孤山亭)은 가끔씩 와서 쉬고 시를 논하며, 묵객들을 맞이하였던 제2의 별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중 제자를 찾은 퇴계는 고산정에 도착하여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日洞主人琴氏子 해와 달이 아름다운 일동주인 금씨를
隔水呼問今在否 지금 계시는지 강 건너로 물어보니
耕夫揮手語不問 농부는 손 저으며 내 말 못 알아들은 듯
帳望雲山獨坐久 구름 낀 산 바라보며 한참을 기다리고 앉았네
 
금란수의 넷째아들 금각(琴恪)은 18세에 요절한 천재였는데 16세 때 그의 일동록(日洞錄)에서 고산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예안북쪽 산은 청량이요, 그 남쪽 봉은 축융이다. 축융아래 마을이 일동이다. 마을은 그윽하고 조용하다. 산은 높지만 좁지 아니하여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함을 다 갖추었으니, 참으로 은자가 살아갈 만한 낙지 가운데 하나다. 그런 땅이지만 아직 이곳을 즐기는 사람이 없어 별천지 세계가 숲속에 버려져 있고, 또 얼마나 세월이 흘렀는지도 모른다. 그 후 아버지(琴蘭秀)가 이곳을 드러나게 했으니, 이곳은 곧 하늘이 땅을 만들어 간직했다가 내어준 곳이다”
 
고산정은 참으로 하늘이 내려준 별천지요, 신선이 살 법한 지상의 낙원이다. 봄에는 무릇 꽃동산을 이루고, 여름은 푸르른 녹음과 강변이 있어 쉬어갈 수 있으니 좋고, 가을은 단풍 색깔로 온천지를 뒤덮고, 겨울은 겨울대로 눈도 내리고 강안이 쉽게 어니, 얼음을 지치며 풍광을 감상하는 맛이 맛깔스럽다. 고산정이 있는 암벽은 가송협의 시작이자 끝으로 축융봉 아래 내취병(內翠屛)의 암벽과, 고산아래 외취병(外翠屛)의 암벽 경관이 압권이다. 중국의 계림이나 양삭의 산수랄까? 동양 산수화의 축소판이다.


도산구곡도:
고산정과 도산구곡의 주변현황을 도산구곡이란 큰 스케일의 그림으로 표 현코자 했다 (김영환작, 2014)

성재 금란수는 74년의 세월을 나라의 안위와 곧은 절개를 지키며 살았고, 고향 부포에 내려와 은일하고 고산정에서 유유자적하게 살다 그렇게 갔다. 그는 부포의 본제와 고산정의 별서 사이에 있는 백운지 마을 뒷산에 묻혔다. 백운지 마을은 봉화 금씨들이 대대로 살았던 마을이니 그 뒷산은 종중산이 아닌가 싶다. 그리하여 고산정은 부포의 성재종택, 가송의 고산정, 백운마을의 성재묘소와 함께 숱한 역사가 있는 도산구곡의 명승지지(名勝之地)가 되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단사협 (강충세, 2014): 도산구곡 중 7곡에 해당되며 예던길 우측에 펼쳐진다


예던 옛길 (강충세, 2014): 퇴계가 걷던 선비길로, 강변과 산길을 따라 청량산까지 연결된다

또한 고산정이 있는 마을에는 공민왕당과 공주당이 있어 역사적 향기를 전해주고 있다. 공민왕당은 청량산 축융봉 아래에 있고, 공주당은 마을 한가운데에 있다. 이들 유적은 공민왕과 왕비 차비 이씨(次妃李氏)와 왕의 어머니 태후가 함께 몽진한 “고려사”의 기록과도 일치한다. 그 밖에도 주변 마을에는 저마다 왕비와 딸과 사위를 모신 당들이 10여 곳 있는데 모두 공민왕당을 중심으로 하며 지금도 추모의식이 이어지고 있다. 예던길에 만나는 수묵화(水墨畵)의 클라이막스인 고산정(孤山亭)은 자연경관도 아름답지만, 이렇게 역사문화경관이 있어 명승으로서 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주변에 개발에 대한 기미가 여기저기서 포착되고 있다. 예던길 주변에는 개인사유지로 별장이나 상점 등으로 집을 짓거나 길을 넓히고, 포장이나 다리를 놓아달라는 민원이 지속되고 있다. 이대로 가다간 머지않아 예던길과 고산정 주변도 관광지화 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이렇게 아름답고 빛나는 선비들의 숨결이 배어있는 현장이 훼손되어가는 것이 빤한데 어떻게 그냥 내버려둘 수 있을까? 이는 역사에 죄를 짓는 일이다. 고산정은 현재까지 보존된 자연유산과 문화유산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잘 보전해야 한다. 적어도 향후 단천교~고산정까지 이르는 예던길과 함께 국가명승으로 지정하여 국민들에게 복합문화유산으로서 물려줄 수 있도록 준비하고 관리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1976년 안동댐 건설로 수몰되고 폐허가 된 도산구곡의 아름다운 강산이 조금이라도 보상받을 것이고, 우리가 최소한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미래의 조상이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재근 교수의 '자연과 철학을 담은 정원, 한국의 별서'는  문화재청이 운영하는 헤리티지채널의 '명사칼럼'을 통해 연재되고 있습니다. 헤리티지채널은 국민의 문화유산 애호의식을 함양시키기 위한 고품격 콘텐츠를 서비스하는 문화유산 전문 채널입니다. [헤리티지 채널 바로가기]
연재필자 _ 이재근 교수  ·  상명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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