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일과 풍류의 호남 가사문학의 산실 담양 소쇄원(瀟灑園)

[조경명사특강]이재근 교수의 ‘한국의 별서’ 20회
라펜트l이재근 교수l기사입력2014-07-25


瀟灑園中景 소쇄원의 빼어난 경치
渾成瀟灑亭 한데 어울려 소쇄정 이루었네.
擡眸輪颯爽 눈을 쳐들면 시원한 바람 불어오고
側耳聽攏玲 귀기울이면 영롱한 소리 들리네.

溪流漱石來 계류는 바위를 씻으며 흐르는데
一石通全壑 돌 하나가 온 골짜기를 덮고 있네.
四練展中間 폭포가 중간에 떨어져 펼쳐지고
傾崖天所削 비스듬한 벼랑은 하늘이 깎아낸 바로다.

長垣橫百尺 긴담이 백자나 가로 뻗었는데
一一寫新詩 하나하나가 고운 싯귀로다
有似列屛障 마치 병풍을 두른 것 같의
勿爲風雨欺 비바람이 몰아쳐도 든든하도다.

-김인후의 소쇄원 48영시-


무등산쪽에서 본 소쇄원 외원도(김영환.2013): 무등산 쪽에서 본 소쇄원의 외원과 영향권원을 사실적으로 그렸다.


신소쇄원 48영도(김영환.2013): 김인후의 소쇄원48영 시문을 기초로 새롭게 그려 신소쇄원48영도라 이름 붙였다.

소쇄원은 조선중기 문신 양산보(梁山甫:1503-1557)가 조성한 별서이다. 양산보는 1516년 혼란한 정치의 급진개혁을 시도했던 조광조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수학하였다. 그는 소학(小學)과 대학(大學)을 학문의 기본으로 하여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을 도모하고자 하였고, 유교를 정치와 교화의 근본으로 삼아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실현하려고 했다. 그러나 1519년 을사사화로 스승인 조광조가 능주로 귀양을 떠난 지 한 달 만에 죽음에 이르자 고향 담양군 남면 지곡마을에 돌아와 초세적 은일생활을 하게 된다. 그 후 조정에서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양산보에게 벼슬에 임할 것을 청하였으나 그는 거절하였고, 오로지 시문과 벗하며 학문탐구에 몰두하였다.

양산보는 특별히 도연명(陶淵明: 365-427)과 주돈이(周敦頤: 1017-1073)를 흠모하여 유유자적의 전원생활을 꿈꾸었다. 그는 가족, 친지들과의 정담을 나누고 거문고와 책을 벗 삼아 시름을 달랠 수 있는 정원을 가꾸고자 하여 소쇄원을 조성했다. 옹정봉(493m)과 장원봉(304m) 아래에는 남쪽으로 성산(星山: 별뫼)과 창암천의 자연이 좋아 당시 소쇄원에는 시인묵객들이 많이 찾았다. 김윤제(金允濟:1501-1572), 김성원(金成遠: 1525-1597), 임억령(林億齡:1496-1568), 고경명(高敬命:1533-1592), 기대승(奇大升: 1527-1572), 백광훈(白光勳: 1537-1582), 정철(鄭澈:1536-1593) 등이 그들이다.


옹정봉쪽에서 본 소쇄원 외원도(김영환.2013): 옹정봉 정상쪽에서 본 소쇄원의 외원과 영향권원을 사실적으로 그렸다.


내부에서 본 소쇄원의 외원멀리 옹정봉(493m)과 까치봉(424m), 고암동굴 골짜기가 보인다.

1528년 김인후(金麟厚: 1510-1560)의 소쇄정 즉사(瀟灑亭卽事)가 지어진 사실에 비추어 보면 초정(草亭)은 이미 그 이전부터 있었다. 하지만 본격적인 정원의 조영은 1530년 이후에 시작되어 1542년 대부분의 정원이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소쇄원 조영에는 양산보의 외사촌형이면서 1542년에 전라도 관찰사로 있었던 송순(宋純: 1493-1583)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1545년 을사사화 후 김인후가 이곳을 방문하여 지은 48영시를 보면 이때에 정원은 최고조에 이르렀던 것으로 보인다. 소쇄원 48영시는 오언 절구시로, 정원 안에 있는 자연요소들을 느끼고 이용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에 더해 계절의 흥취와 날씨, 밤과 낮의 변화무쌍한 일련의 모습도 그렸다. 시에는 정자 등 건물과 오솔길, 다리, 연못, 비구, 물레방아, 석가산 , 바위, 계류와 조담 등 경관요소들이 표현되고 있으며 식생으로는 소나무, 대나무, 매화, 은행, 느티, 복숭아, 오동, 버드, 배롱, 단풍, 국화, 파초, 동물로는 새, 오리 등이 등장한다.


소쇄원 내원도(김영환.2013): 광풍각,대봉대를 중심으로 한 소쇄원 내원을 사실적으로 그렸다.


소쇄원진입로(강충세. 2012)


소쇄원 광풍각근경소쇄원의 중심정자로서 가운데 방이 있는 호남지방의 대표적 유형이다.

양산보는 이 정원을 너무 사랑하여 “소쇄원의 언덕 하나 골 하나에도 자신의 발자취가 남은것임으로 이를 팔거나 어리석은 후손에게 물려주지 말도록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는 자연 속에 묻혀 혼연일체의 삶을 살고 자연 속으로 사라지는 도교적인 자연관을 따르기보다는, 자신만의 세계인 정원을 만들고 살기를 원했으며, 후손이 이를 영속적으로 잘 보전하여 줄 것을 주문하였다. 그의 유언 덕분인지는 모르나 양산보 사후에도 아들 고암(鼓岩)과 손자 천운(千運), 증손자 경지(敬之), 그리고 현재 종손에 이르기까지 소쇄원은 대를 이어오고 있다.

고경명(高敬命: 霽峰,1574)은 유서석록(遊瑞石錄)에서 소쇄원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다.

“오후 3시경 소쇄원에 들르니, 여기가 바로 양산인 산보(山輔)의 구업(舊業)의 자리이다. 계류가 집의 동쪽으로부터 담장을 통하여 흘러 들어와서 물소리도 시원스럽게 아래쪽으로 돌아내린다. 그 위에는 자그마한 외나무다리가 있다. 다리 아래쪽에 있는 돌 위에는 저절로 패인 절구처럼 생긴 웅덩이가 있는데, 이것을 조담(槽潭)이라고 부른다. 괴었던 물은 아래로 쏟아지면서 작은 폭포를 이루고 있는 데, 물소리가 마치 거문고 퉁기는 소리처럼 영롱하다. 조담 위에는 노송이 마치 너부죽한 덮개처럼 담면(潭面)을 가로질러 누워있다. 소폭 서쪽에는 작은 집 한 채(光風閣)가 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 배가 떠있는 주선(晝船)같다. 남쪽에는 돌이 여러 층으로 높이 쌓여있고(石假山), 소정으로서 나래를 삼았는데, 정자의 모습이 우산을 펴놓은 것 같다. 처마 바로 옆에 벽오동이 서 있는 데 늙어서 가지가 절반가량 썪어 있다. 정자아래쪽에는 못(小塘)을 꾸며 놓았는데, 홈을 판 통나무(비구: 飛溝)로 계류를 끌어들이고 있다. 못 서쪽에는 굵은 대숲이 있는데, 마치 옥들을 즐비하게 세운 것 같아 즐겨볼 만하다. 대숲 서쪽에는 연지가 있는데 돌로 만든 고랑으로 물을 끌어들이고 있다. 다시 대숲아래를 지나서 연지북쪽에 다다르면 물레방아가 돌아간다.


오곡문 주변도(김영환.2013): 오곡문 주변을 중심으로 한 소쇄원 내원의 모습오곡문을 지나면 고암동굴로 올라가는 소쇄원 외원이 시작된다.


오곡문 쪽에서 본 내원

소쇄원의 주요 수자원 요소로는 옹정봉(493m)과 까치봉(424m)의 북쪽 산록 기암 괴석군에서 내려오는 계곡물을 들 수 있다. 이 계곡을 따라 담장 밖에서 펼쳐지는 소쇄원입구의 대나무 숲, 황금정, 옹정봉 등의 경관들은 모두 소쇄원의 외원이다. 소쇄원 외원에 대한 기술로는 1636년 7월 양산보의 5대손 양경지(梁敬之)가 지은 방암유고(芳菴遺稿)가 있다. 이 책에는 ‘인재 양진태(忍齋 梁晋泰)가 고향을 읊은 시 30수’(謹次仲父家山三十詠韻: 소쇄원 30영)가 실려 있는데 소쇄원에서 보이는 외부영역에 대해 시각적인 기술이 잘되어있어 소개해보고자 한다. 


소쇄원 광풍각원경(강충세.2012)


소쇄원 위치도(김영환.2013): 소쇄원,송강정,면앙정,명옥헌,환벽당,식영정,독수정,풍암정등 소쇄원과 주변 별서원림의 위치를  선운산,내장산,영산강,무등산,옹정봉을 포함하는 큰 스케일로 그렸다.


“창암촌(蒼巖村), 대봉대 부근의 담장 밖 활터 후간장(帿竿場), 오곡문 밖 우물 오암정(鰲巖井), 소쇄원입구 죽림 자죽총(紫竹叢), 소쇄원 서쪽 작은 봉우리 바리봉(鉢裏峰), 황금정(黃金亭: 수박정) 등이 외원의 대상이다. 그리고 남쪽으로는 무등산의 안산인 한벽산(寒碧山)이 보인다. 북쪽으로는 옹정봉(瓮井峯), 북바위골의 산리동(酸梨洞) 장자담(莊子潭), 고암동(鼓巖洞), 고암동 동쪽의 가재등(加資嶝), 통사곡(通仕谷), 영지동(靈芝洞), 석구천(石臼泉), 장수촌(長壽村)도 등장한다. 특히 북바위골의 계곡 상류 쪽에는 차밭, 죽림재가 있고 계곡물을 가둬놓는 역할을 하는 소제(小堤)방죽과 고암동굴(鼓巖洞屈)이 있어 외원의 역할을 단단히 하고 있다.” 


고암동굴. 1775년 소쇄원도에 표시된 이곳은 옹정봉과 까치봉 중간골짜기에 있다.


고암동굴위에서 본 소쇄원의 외원1(강충세.2013): 멀리 무등산(1,187m), 의상봉(547m),원효봉(562m)아래 안산역할을 하는 꾀꼬리봉,한벽산,충효동 뒷산이 보인다.


따라서 고암동굴 위에서 바라보이는 자연경관의 모습은 매우 중요하다. 여기에서 보면 멀리 무등산 정상과 주변산록, 소쇄공 묘소, 창암천과 들판의 정겨운 풍경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것은 바로 소쇄원의 영향권원이 된다.

소쇄원은 대학을 졸업하던 해인 1979년 첫 방문하여 하루 밤을 잔적이 있다. 소쇄원 옆 종손 집에 전기도 들어오지 않던 시절이었는데, 주인의 인심이 후하여 대접을 잘 받았다. 죽림사이로 들리는 바람소리와 달빛, 그리고 선비가 거닐었던 그 시절을 생각하다보니 흥분되어 밤잠을 설쳤던 기억이 난다. 그때 등잔불 밑에서 1775년(영조51년)에 제작되었다는 소쇄원도의 원본을 직접 볼 수 있었다.


소쇄원도(1755)

그러나 1986년에 다시 방문했을 때 소쇄원도가 도난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것을 가져간 사람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가지고 간 것일까? 그것은 문화유산에 대한 귀중함을 새롭게 일깨워준 사건이자, 나의 마음에 큰 상처로 남은 사건이기도 하다.

그 후에도 소쇄원은 수도 없이 갔다. 사적(史蹟)인 소쇄원을 명승(名勝)으로 재지정하기 위해서 갔고 현상변경을 위해서도 갔고, 교육적 목적으로 학생들을 대동하고도 갔다. 소쇄원에 갈 때면 나는 산록을 따라 등반을 하기도 하고 산책을 하기도 한다. 소쇄원의 외원을 느껴보기 위해서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쇄원 담장안의 내원만 보고 소쇄원을 보았다고 말하곤 한다. 소쇄원 내원 자체는 소쇄원 기록과 주변 정황을 보면 지극히 작은 면적에 불과한데도 말이다. 아직도 소쇄원 외원에 대한 홍보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쇄원을 제대로 느끼기 위해서는 적어도 고암동굴까지 가서 광활하게 펼쳐지는 소쇄원의 외원과 그 영향권원을 보고 느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오곡문을 나와 고암동굴 쪽으로 가면서 위치한 차밭, 죽림재,용소 등을 복원해야 한다. 용소(龍沼)가 있던 부분에는 소방죽을 복원하여 언제라도 물이 시원스럽게 내려 올 수 있도록 수원(水源)을 비축해 두어야 한다. 그래야만 진정한 소쇄원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게 되고 소쇄원의 정체성이 분명하게 부각될 수 있다.


고암동굴내부에서 본 바깥풍경(강충세.2013)


고암동굴위에서 본 소쇄원의 외원2(강충세.2013): 양산보와 그의 아들 고암선생은 이곳에 올라 심신을 수양하고 주변 풍경을 감상했을 것으로 보인다소쇄공의 묘소도 무등산 의상봉 아래에 있다.


따라서 이번 글에서는 전라남도라는 큰 틀에서 영향권원을 나타낼 수 있는 소쇄원의 위치도를 만들었으며, 외원의 모습을 추정도로 그려 방문객들이 전체적으로 외원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하였다. 또한 내원의 모습은 48영시를 바탕으로 “신소쇄원 48영도”를 그려 사실적으로 표현코자 했다. 이것은 앞으로의 한국의 별서는 절대 내부정원만을 대상으로 다뤄서는 안 되며, 그 외원과 영향권원까지 다루어야 한다는 경종을 울리는 일이기도 하다.

소쇄원은 창암촌에 있는 본제와 별도로 떨어져 만들어진 은일과 휴식의 공간이다. 창암촌과는 대나무 숲으로 격리되어 자신만의 세계를 펼치기에 최적의 장소이다. 소쇄원은 향후 주변 영향권원에 해당되는 식영정, 환벽당, 취가정, 독수정, 면앙정, 송강정까지 고증을 통한 정비가 이루어짐으로써 원형경관을 살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모쪼록 소쇄원을 정점으로 한 주변 가사문학권의 별서 대상지들이 제대로 복원되어 국가문화재는 물론 세계문화유산이 되는 날을 기대해 본다.

연재필자 _ 이재근 교수  ·  상명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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