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거래와 효를 실천한 농암의 애일당(愛日堂)

[조경명사특강]이재근 교수의 ‘한국의 별서’ 9회
라펜트l이재근 교수l기사입력2014-05-05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 말 뿐이오 간 사람 없어
전원이 황폐해지니 아니 가고 어찌할꼬?
초당(草堂)에 청풍명월(淸風明月)이 나며들며 기다린다.
농암(聾巖)에 올라보니 노안이 더욱 밝아지는구나.
인간사 변한들 산천(山川)이야 변할까?
바위앞 저 산 저 언덕 어제 본 듯하여라.
-농암(聾巖)의 효빈가(效嚬歌)와 농암가(聾巖歌) 중에서-
 
안동 도산구곡의 애일당(愛日堂)은 조선중기의 문신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1467-1555)가 모든 벼슬을 과감히 버리고 고향으로 귀거래(歸去來)한 후 부모에게 효를 실천한 별서(別墅)이다.


가송리 애일당별서도(김영환작. 2014): 미천장담 쪽에서 본 학소대와 애일당의 모습을

본제(本第)인 농암종택과 함께 진경산수화적 기법으로 표현했다.


농암은 도산면 분천리에 1350년 입향한 이헌(李軒)의 고손자(高孫子)로 1498년 연산군 때 문과에 급제하여 부제학(副提學), 사간(司諫), 정언(正言)을 거쳤고, 중종반정으로 경상도 관찰사, 호조참판에 이르렀다. 농암은 1524년 76세에 모든 관직에서 은퇴하여 산수가 아름다운 고향 예안으로 돌아가 독서(讀書)와 시작(詩作)으로 여생을 보냈고 효빈가(效嚬歌)와 농암가(聾巖歌), 어부사(漁父詞) 등을 남겼다. 특히 어부사는 퇴계의 도산12곡(陶山12曲)에 영향을 주었고, 윤선도의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로 이어지게 하였다. 윤선도는 “농암의 어부사를 읊으면 갑자기 강에 바람이 일고 바다에는 비가 와서 사람으로 하여금 유세 독립(遊世獨立)의 흥겨운 정서를 일게 했다”고 표현했다.


가송리 애일당 (강충세.2014)

주세붕은 1544년 4월9일 청량산을 유람하기 위해 풍기군에서 출발하여 분천의 농암선생을 배알(拜謁)한 얘기를 유청량산록(遊靑凉山錄)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공께서 문밖으로 나와 맞이하시고는 자리로 이끌어 바둑을 두셨다. 밥을 내오라 하시고 이어서 술도 가져오라 하였다. 큰 계집종에게는 거문고를 타게 하고 작은 계집종에게는 아쟁을 켜게 하였다. 공께서 거처하시는 곳은 비록 좁지만 좌우에 도서가 있고, 당 앞에는 화분을 늘어두었다. 담장아래는 화초를 심었는데 뜰의 모래가 눈처럼 희었다. 시원하기가 마치 신선이 사는 집에 들어온 것 같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농암이 살았던 본래의 분천마을과 애일당은 안동댐 건설로 인해 현재는 도산면 가송리로 이전되었다. 따라서 본래의 분천마을과 애일당에 관해서는 농암의 17세손 이성원 선생이 2005년 6월에 쓴 “고향을 찾아, 농암의 자취를 찾아”라는 글을 소개함으로써 당시의 분천마을과 애일당의 모습을 그려보고자 한다.

도산면분천마을주변풍경1 : 강 건너 의촌리 쪽에서 본 분천마을. 분천리의 분천마을은 현재 우기인 여름에는 수몰되어 잠기고 건기인 겨울에는 여지없이 밖으로 드러나 사라 진 역사마을에 대한 가슴시린 장면이 반복되곤 한다.


도산면 분천마을주변풍경2: 옛 분천마을은 매년 수몰을 계속하면서 뻘흙이 강바닥을 덮음으로써 옛강변의 자취는 사라졌다. 지금이라도 안동댐수위를 2~3m 낮추어 옛 분천마을을 재현할 수는 없는 것일까?


“도산서원 진입로의 농암가비(聾巖歌碑)를 보고 산길을 내려가면 바로 분천마을이고 농암종택 집터가 나온다. 둘러보니, 아직도 담장이 남아 있다. 담장을 따라가며 중얼거렸다. 여기 사랑채가 있었고, 안채가 있었으며, 감나무가 있었고, 맛좋은 먹추리 나무가 있었다. 마당에는 사각형의 단아한 옥인석(玉印石)과 금상석(金床石)이라는 바위가 있었지만 지금은 보이지 않으니 흙에 묻힌 모양이다. 종택 마당에는 거목의 홰나무(塊木)가 있었는데 이를 구인수(九印樹)라 했다. 효성이 지극했던 7형제와 2사위들은 학문이 출중하여 모두 관계에 진출했다. 농암의 수연(壽宴)을 준비하기 위해 모이면 이 나무에 9개의 관인(官認) 끈이 걸려 구인수라고 불렀다. 집터를 나오니 넓은 들판에 이름 모를 남색 꽃이 끝없이 피어있다.


농암종택 옛터: 분천마을 내 농암종택이 있던 옛터.

현재는 수몰된 가운데 웃자란 나무 와 잡풀들만 무성하여 보는 이의 가슴을 시리게 한다.



영지정사(靈芝精舍) 옛터: 분천마을을 감싸고 있는 영지산 중턱 영지정사 옛터.

지금은 폐허의 상태이지만, 농암선생은 말년에 이곳에 있던 영지사(靈芝寺)를 영지정 사(靈芝精舍)로 이름을 바꾸고

주변 소나무림을 친자식처럼 대하며 자신의 은일처로 이 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꽃길 따라 강가로 나아가니, 분천바위에 분천(汾川), 감퇴바위에 쌍암(雙巖)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암각서(岩却書)를 둘러보고 강변을 따라 상류로 오르니 강가에 우뚝한 바위가 하나 있다. 농암(聾巖)이다. 어루만지며 올라가니 사방이 한눈에 들어온다. 정말 농암가(聾巖歌)의 한 구절처럼 모수모구(某水某丘)가 어제 본 듯 했고 바위 위에는 날아갈 듯 애일당(愛日堂)이 자리하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지금은 없어졌고, 다만 분강(汾江)가에 농암바위, 사자바위, 코끼리바위, 자라바위가 어제처럼 그렇게 서 있다.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저 아득한 시절로 유영(遊泳)해 갔다.


분천마을도(김영환작. 2014): 분천리 옛 마을의 모습을 분천헌연도(汾川軒燕圖), 

분강촌 도(汾江村圖), 도산서원도(陶山書院圖),

그리고 이성원 종손의 증언을 바탕으로 진경 산수화기법으로 그려 추억의 옛풍경을 재현해 보고자 하였다.


그때 농암이 배를 띄웠다. 흥은 고조되는데 노래가 없었다. 노래는 있지만 도무지 어울리는 노래가 없었다. 그래서 지은 노래가 어부가(漁夫歌)다. “굽어보면 천심녹수(千尋綠水), 돌아보니 만첩청산(萬疊靑山), 열 길 티끌 세상에 얼마나 가려지겠는가? 강호(江湖)에 월백(月白)하거든 더욱 무심(無心)케 하여라” 하는 내용이다.
이때 퇴계가 왔다. 함께 배를 타고 분강 가운데의 자라바위로 갔다. 넓은 자라바위 좌우로 물이 흐르고 있어 저 유명한 유상곡수(遊上曲水)의 풍류를 같이 즐겼다. 농암은 또한 도산12곡과 더불어 이곳의 풍경을 글씨를 써서 영원히 남기고자 했다. 퇴계는 동향의 후배로 농암과 인간적, 문학적으로 남다른 교류를 했다. 어부가의 발문에서 “농암을 바라보면 그 아름다움은 신선과 같았으니, 아! 선생은 이미 강호(江湖)의 진락(眞樂)을 얻었다”고 찬양하였다.
 
여기에서 이성원(61) 종손의 기억을 떠올려보니, 애일당은 농암종택에서 400여m 떨어진 농암위에 위치하여 경치가 수려했다고 했다. 애일당은 분천마을 한 쪽에 지어진 분강서원(汾江書院)을 지나서도 300m 이상 떨어진 산등성이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했다. 1526년 그려졌다는 분천헌연도(汾川軒燕圖)에도 농암종택의 옛 모습은 뚜렷하고, 애일당은 한쪽 산등성이 넘어 언덕배기 위에 위치해 있다.


옛 애일당터와 주변풍경: 농암(聾巖:귀먹바위) 위쪽에 있던 옛 애일당과 강각터.

좌우 로는 분천마을과 도산서원까지 신작로에 소나무 가로수가 이어졌다고 하나 현재는 흔적도 없다.



분천리 애일당별서도(김영환작.2014): 분천리의 애일당과 강각의 모습을 농암종택과 분 강서원,

도산서원에 이르는 신작로 풍경과 더불어 진경산수화적 기법으로 표현했다.


따라서 애일당은 살아생전의 98세까지 생존한 부친 흠(欽)을 위해 지은 별업형 별서(別業型別墅)의 성격을 띠고 있다. 그리고 부친 사후에는 앞의 강각(江閣)과 더불어 개인사유의 별서건물로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호(號)도 자신은 귀머거리란 뜻의 농암(聾巖)이라 짓고, 하루하루를 즐겁게 유유자적하며 소일하겠다는 뜻의 애일당(愛日堂)이라는 당호(堂號)를 사용한 것이다. 따라서 애일당은 건물 옆에 바로 붙여지은 별당건물이 아니라 본제와 좀 떨어져 지은, 휴식과 은일을 추구했던 별서건물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는 94세인 아버지와 92세인 숙부 그리고 82세인 외숙부를 중심으로 구로회(九老會)를 조직하여 애일당에서 봉양했다. 이후 그는 그 옆에 명농당(明農堂)을 짓고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 그림을 벽에 붙여 의미를 되새겼고, 퇴계로부터 농암노선(聾巖老仙)이란 칭호를 받았다. 고종 때 진사(進士)를 지낸 이경호는 애일당 앞 바위에 “농암선생정대구장(聾巖先生亭臺舊庄)”이라는 글씨를 크게 새겨 농암의 정신을 기렸다.
분천리는 안동 영천이씨의 집성마을이고 안동댐 이전에는 100여 호에 이르는 큰 마을이었다. 배산임수와 더불어 끝없이 펼쳐진 문전옥답(門前沃畓)은 살기 좋은 터전으로 더할 수 없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중종 때의 사림파인 모재 김안국(慕齊 金安國: 1478-1543)은 “마치 도원경(桃園景)에 들어온 것 같다”고 했고, 농암 이현보는 “정승 벼슬도 이 강산과 바꿀 수는 없다”고 한 것이다.
지금도 농암이 자주 올랐던 뒷산의 영지정사(靈芝精舍)터를 지나 영지산(靈芝山: 444m)에 오르면 도산구곡 전체를 볼 수가 있고, 분천마을과 애일당 옛터를 위에서 내려다 볼 수 있다. 강 건너 시사단(試士壇)이나 예안면 부포리 쪽에서 보면 더욱 생경하게 그 정취를 느껴 볼 수 있다. 그래서 아쉬운 마음으로 현지를 여러 차례 답사한 후, 종손의 증언을 들어가며 당시의 옛 분천마을과 애일당의 모습을 추정도로 그려보았다.
세월의 무상함은 어쩔 수 없는 것. 역사는 시대적 상황과 변천에 따라 변화하며 흐르는 것. 1971~ 1976년 안동댐의 건설로 농암종택과 애일당 및 주변 건물들은 우선 운곡리(雲谷里)와 마을 뒷산 등으로 흩어져 이전되었다. 하지만 뿔뿔이 흩어진 건물들은 도저히 이전 분천마을 시절의 정취를 담아내지 못했다. 이 때문에 이 건물들은 2000년에서 2007년까지 분천마을의 경치와 가장 부합되는 것으로 생각되는 가송리(佳松里) 올미재로 이건 되었다. 종택(宗宅)과 분강서원(汾江書院)은 도산구곡 8곡 주변 낙동강 상류를 따라 펼쳐져 지어졌고, 애일당(愛日堂)은 강각(江閣)과 더불어 별서의 개념에 맞게 부지 끝 절벽인 학소대(鶴巢臺) 아래에 복원되었다. 여기에는 종택을 지키려는 종손의 강한 의지가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가송리 농암종택 원경(강충세.2014): 벽력암(霹靂巖)위 전망대에서 본 농암종택 원경 (겨울)

기존의 애일당에서는 분천리의 본제와 400m나 되는 산등성이에 별도로 설치되어 강과 산의 정경을 내려다 볼 수 있었고, 현재의 애일당 역시 종택에서 200m 정도 떨어져 장쾌하고 아름다운 산과 강변경관을 바라 볼 수 있는 조망점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가송리의 애일당은 유상(遊賞)과 은일(隱逸)의 분천리 애일당 별서를 재현해 놓았다고 할 수 있다. “밖에서는 선행(善行)을 쌓고 안에서는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뜻의 적선애일(積善愛日)을 가훈으로 삼고 있는 농암종택은 최근 문화체육관광부가 선정한 명품고택으로도 선정되었다. 종택은 사랑채와 안채, 긍구당(肯構堂), 사당(祠堂), 명농당(明農堂) 등으로 이루어져 있고, 한속정사(寒束精舍), 서재, 동재, 강당 등으로 구성된 분강서원(汾江書院), 그리고 애일당(愛日堂) 등이 더해져 하나의 작은 한옥마을을 이룬다. 팔작지붕이 멋스러운 긍구당(肯構堂)은 농암이 태어나고 임종한 곳으로 농암종택을 대표하고, 애일당은 농암이 때때옷 입고 춤을 추던 효(孝)의 현장으로 낙동강 상류 한속담(寒束潭)과 벽력암(霹靂巖)을 바라보며 우뚝 서 있다.


가송리 농암종택 근경(강충세. 2014): 월명담(月明潭) 쪽에서 본 농암종택 근경. 멀리 학소대와 애일당, 강각이 보인다.

농암종택과 애일당 별서가 빚어내는 풍경은 퇴계 이황이 걸었던 예던 길에서 만나게 되는, 사람냄새가 강하게 나타나는 가거처(可居處)다. 평소에는 주변에 경암(景岩), 미천장담(彌川長潭), 월명담(月明潭). 고산정(孤山亭) 등 절경 사이로 낙동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고, 겨울이 끝나갈 무렵이면 얼음 깨지는 소리가 쨍쨍 울려 퍼지는 교향악(交響樂)의 무대다.


애일당에서 본 벽력암과 한속담


미천장담에서 본 학소대

가송리(佳松里)는 그 이름에 걸맞게 아름다운 소나무가 있는 마을로 산촌과 강촌의 전경을 만끽할 수 있는 서정적이고 목가적인 곳이다. 주변에 공민왕 유적, 고산정, 맹개, 백운지, 가사리마을 같은 전래마을이 있어 기우제(祈雨祭), 쥐불놀이 등 문화경관(文化景觀)이 상존하는 곳이다. 그리고 농암종택과 애일당은 영남 유교문화의 중심지인 안동에서도 도산구곡을 대표하는 종택문화요, 역사문화요, 정원문화의 상징이다.
지금 시점에서 농암종택과 애일당을 잘 지켜나가는 일은 영천이씨 종택의 종손과 종부의 일만은 아니다. 우리 모두 농암종택과 애일당 별서의 정신과 이념을 되살려 효 문화를 창달 계승하는 계기로 삼자. 효 문화에 대한 예의범절과 실천교육의 본보기가 되게 하고 전통을 잇는 문화콘텐츠를 개발하여 국민 모두의 가거처(家居處)요, 유상처(遊賞處)로 삼자. 이렇게 하는 길만이 우리 종택문화(宗宅文化)를 살리는 길이요, 아름다운 별서(別墅)를 운영했던 조상들의 뜻을 기리고 계승하는 일임을 다시 한 번 상기하자.
애일당. 그리고 농암종택, 분천마을에서 가송리까지 아우러서 자연경관과 문화를 잘 보존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것을 기초로 중국 복건성(福建省)의 무이구곡 (武吏九谷)이 세계문화유산이 되었듯 1곡~9곡까지 예던길을 비롯한 도산구곡 전체가 복원 됨으로써 세계문화유산이 되는 날을 준비해야 한다.


가송리 농암종택 입구: 농암종택 솟을 대문 앞의 종부 이원정 여사. 그는 음식솜씨가 뛰어나고 이성원 종손과 함께 

불천위 농암의 위패를 모시면서 영천이씨 종가를 굳게 지키고 있는 한국의 대표적인 종부다.



이재근 교수의 '자연과 철학을 담은 정원, 한국의 별서'는  문화재청이 운영하는 헤리티지채널의 '명사칼럼'을 통해 연재되고 있습니다. 헤리티지채널은 국민의 문화유산 애호의식을 함양시키기 위한 고품격 콘텐츠를 서비스하는 문화유산 전문 채널입니다. [헤리티지 채널 바로가기]
연재필자 _ 이재근 교수  ·  상명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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