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孝)를 실천한 별업형 별서 강진의 조석루(朝夕樓)

[조경명사특강]이재근 교수의 ‘한국의 별서’ 10회
라펜트l이재근 교수l기사입력2014-05-09


朝夕樓者。尹皆甫之書樓也。余寓茶山。今且四年。每花時試步。必由山而右。越一嶺涉一川。風乎石門。憩乎龍穴。飮乎靑蘿之谷。宿乎農山之墅。而後騎馬而反乎山。例也。皆甫與其從父弟羣甫。佩酒持魚而至。或期乎石門。或期乎龍穴。或期乎靑蘿之谷。旣醉而飽。與之宿乎農山之墅。亦例也。農山者。皆甫別業。農山之阡。卽龍山之麓。厥考葬焉。厥考之高祖葬焉。
 
조석루(朝夕樓)는 윤개보(尹皆甫)의 서루(書樓)이다. 내가 다산(茶山)에 기거한 지 이제 4년이 되는데, 언제든지 꽃피는 때면 산보를 하였다. 나는 산에서 오른쪽으로 고개 하나를 넘고 시내 하나를 건너 석문(石門)에서 바람을 쐬며, 용혈(龍穴)에서 쉬었다. 청라곡(靑蘿谷)에서 물마시고, 농산(農山)에 있는 농막(墅)에서 묵은 뒤에 말을 타고 다산으로 돌아오곤 하였다. 개보(皆甫)와 그의 사촌 아우 군보(群甫)가 술과 물고기를 가지고 와서 어떤 때에는 석문(石門)에서 기다리고, 어떤 때에는 용혈(龍穴)에서 기다리고 어떤 때에는 청라곡(靑蘿谷)에서 기다렸다. 이미 취하도록 마시고 배불리 먹은 뒤에는 그와 함께 농산에 있는 농막에서 잠을 잤다. 농산은 개보(皆甫)의 별장인데, 농산의 동산은 곧 용산(龍山)의 기슭이다. 윤개보는 고조(高祖) 할아버지를 이곳에서 장사지냈고. 그의 아버지를 이곳에다 모셨다. 또 그 서쪽 선영에는 증조(曾祖) 할아버지를 모셨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의 조석루기(朝夕樓記), 김도련 역, 한국 고전번역원, 1984.-
 
조석루(朝夕樓)는 개보 윤서유(皆甫 尹書有:1764-1821)의 별서(別墅)이다. 별서란 자기 자신의 전원생활을 위해 조성하는 별장형이나 은일형의 제2주택(Second House)을 말한다. 그러나 선영 아래 조상의 은덕을 기리기 위해 조영하는 집은 별장형, 은일형과 구분하여 별업형 별서(別業形別墅)라고 부른다. 조석루는 조상의 묘를 모신 선영이 옆에 있고 제각과 주변 연못등의 흔적이 남아있어 바로 여기에 해당된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3년 동안의 시묘(侍墓)살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시묘살이란 부모님의 묘소 근처에 여막(廬幕)이라는 집을 짓고 생활하며, 산소를 돌보고 공양을 드리는 일을 일컫는다. 그러나 시묘살이는 쉽게 실천할 수 있는 일이 아니어서 시묘살이를 마친 자식은 사회적으로 우대하는 것이 관례였다.
논어(論語) 위정편에는 “부모가 살아계실 때는 예(禮)를 다하여 모시고, 돌아가시면 예(禮)로서 장사지내며, 제사 지낼 때는 예(禮)를 어기지 않고 다해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자식의 도리로 예(禮)를 다하여 부모를 모실 것을 당부함으로써 효(孝)를 “ 덕행의 근본이며, 가르침의 근원”으로 본 것이다.


조석루 위치도본 그림은 조석루의 영향권원도(影響圈園圖)이다본제인 항촌리 명발당(明發堂)과 다산이 거쳐갔던 사의재(四宜齋),고성사 보은산방(寶恩山房), 백련사(白蓮寺), 다산초당(茶山草堂), 석문(石門), 강진만 등 주변의 대상지들을 모두 표현했다.

 

윤서유는 이러한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해 선친의 묘아래서 시묘(侍墓)살이 함으로써 논어에 나오는 덕행을 몸소 실행에 옮겼다. 덕룡산(439m)자락 아래 조부 윤남기(尹南紀)와 고조부 윤이면(尹以冕)을 모신 곳에 아버지 윤광택(尹光宅)을 모셨다. 그리고 선영아래에 한옥관(寒玉館), 조석루(朝夕樓), 척연정(滌硯亭)을 지었고 연못 금고지(琴高池)를 팠으며, 측백나무, 잣나무, 연꽃을 심었다.


조석루 정원의 추정 평면도조석루기에 의한 추정평면도를 새로 그렸다.


금고지 옛터와 측백나무 고목(강충세.2013): 조석루기에 의하면 금고지(琴高池)란 연못이 있었고

윤서유는 신선이 된 기분으로 배를 띄웠던 것으로 보인다.


윤서유는 주로 강진 항촌 마을 명발당(項村 明發堂)에 살면서, 어려움에 처해 있던 다산 정약용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던 인물이다. 그는 평소 다산의 인품과 학문적 경지를 존경하여 아들 윤영희(尹榮喜)를 보내 제자가 되게 하였고(1808년), 딸과 혼인을 시켜 정식으로 사돈지간이 되었다(1812년).
두 사람의 우애와 교류에 대해서는 ‘개보가 매실과 죽순을 선물로 보내니 답례로 물외를 보내네(皆甫餽梅實竹筍 以山田新瓜謝之)’라는 다산의 시를 보면 짐작된다.
 
“산중에 비는 개고 해 길어 지루한데 / 친구가 초막집에 좋은 선물 보내왔네.
소반 위엔 갑자기 매실이 올려있고 / 주발 속엔 껍질 벗긴 죽순이 담겨졌네.
목마름 병 고쳐주는 제호탕(醍醐湯)과 맞먹는 / 귀한 물건 쉬이 여기고 궁한 사람 도운게지.
집안에 현부인이 있는 줄을 알기에 / 감사하단 말 대신에 참외를 따서 보낸다네.“
 
이후 윤서유는 53세 느지막한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자리에 올랐고, 아들 윤영희(尹榮喜)와 손자 윤정기(尹廷基)도 큰 재목의 실학자가 되었다.
윤서유가 조성한 조석루 정원에 대해서는 1808년 다산 정약용이 쓴 조석루기(朝夕樓記)를 통해 잘 알 수 있다. 윤서유는 부친 윤광택(尹光宅)과 조부의 산소를 모신 지역에 거처하기 위한 한옥집을 짓고 루와 정자, 초가를 지었으며 연못을 팠다. 계류와 산책로를 만들고 측백나무와 대나무, 연꽃 등의 식물을 심어서 정원을 조성하였다. 그러나 현재는 영모재(永慕齋)와 연못터, 국단(掬壇)의 세 가지 요소만 확인할 수 있을 뿐 아무것도 없는 농경지 상태이다.
지형적으로는 농산별업 좌측기슭의 앵자강(鸎子岡)과 우측기슭 표은곡(彪隱谷)이 조석루터를 에워싸고 있는 형태이다. 연을 심고 붉은 잉어를 길렀던 금고지(琴高池)가 있었고 의장해(倚杖蹊)라는 시냇물과 소로가 있었으며 서측부의 계곡으로는 몸을 씻을 수 있는 수경간(潄瓊澗)이 있었다. 건축적으로는 영모재(永募齋)의 서측으로 조석루(朝夕樓)가 있었고, 그 옆으로 한옥관(寒玉館), 남측으로 상암(橡菴)이라는 초가집이 있었다. 연못가에는 척연정(滌硯亭)이라는 정자가 있어서 서예도 하고 시를 읊을 수 있었다.

조석루앞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옛 정원터멀리 선영(先塋)이 보이고 옛정원터는 모두 논과 밭 농경지로 변하였다.


측백나무 고목 근경(강충세.2013). 멀리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앵자강 언덕이 보인다.

식물적 요소로는 운당(篔簹)이라는 왕대나무가 조석루 주변에 식재되어 있었고, 한옥관의 남쪽 둔덕 위에 열 아름 정도의 거목이 하늘을 받치고 있어 녹운오(綠雲塢)라고 불렀다. 연못 주변에는 국단(菊壇)이라 불리는 오래된 측백나무가 있었다. 또한 옻나무 숲과 감나무 밭이 지형을 따라 알맞게 자리 잡고 있어서 아름다운 누정 경치에 일조를 하였다.
이를 조금 더 서정적으로 상상의 나래를 펴보자!
 
“ 화창한 봄날 덕룡산 푸른 하늘 아래 좌우로 펼쳐지는 나지막한 산등성이와 농경지, 아름답게 조성되어 있는 조석루 정원. 좌로는 앵자강, 우로는 표은곡의 구릉이 한옥관과 영모제를 중심으로 길게 주변을 감싸고 있고, 한옥관과 영모제 사이에 우뚝 솟아있는 조석루. 이 누각에 오르면 농산의 고즈넉한 지형들이 깊숙이 펼쳐지고 그 안에 울창한 숲들이 배경림으로 들어온다. 장마가 지고난 후 산마루에 맑게 갠 달이라도 뜨면, 정원 속에 주변은 신선이 유희하기에 좋은 장소가 된다. 꾀꼬리가 우는 앵자강 둔덕 아래로 수경간(潄瓊澗)이라는 계류가 상암(橡菴)이라는 초가집 앞에까지 흐른다. 중간 둔덕 위에 높이 서있는 노거수 녹운오(綠雲塢). 그리고 의장해(倚杖蹊)라는 계류와 노루들이 내려와 물을 마시던 곳 녹음정(綠陰井)이 위치한다.
우측능선으로는 표은곡의 구릉을 따라 소나무 군락이 정원의 출입구까지 이어진다. 소나무 군락 가운데에 자연스런 형태의 금고지(琴高池)와 측백나무가 있는 국단(掬壇)이 위치한다. 금고지 앞 소규모의 정자 척연정(滌硯亭)은 신선이 붓글씨를 쓸 수 있는 곳이라 하였다. 금고지 주변에 심어져있는 연꽃과 야생화, 연못 안에서 노니는 빨간 잉어, 그곳에서 거문고를 켜며 유유자적 배를 타고 있는 신선. 연못에서 남쪽을 바라보면 멀리 주작산까지 억새밭이 군을 이루고, 가운데로 넓은 농경지가 펼쳐진다. 그리고 시야에 들어오는 시원한 바다. 바다 풍경이 한 폭의 동양화다. 무릉도원(武陵桃源)이 따로 있겠는가? 이곳이야말로 조상의 은덕을 기리기 위해 윤서유가 조성해 놓은 축복받은 땅, 신선의 세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


조석루의 내원(김영환작.2014): 조석루기에 의한 정원 상상도를 진경산수화적 기법으로 표현했다.


조석루 정원에서 바라다 본 외원(김영환작.2014): 조석루 외원의 모습을 진경산수화적 기법으로 표현했다

멀리 석문리와 강진만주작역할을 하는 주작산이 보인다.

 

윤서유의 농산별업 본제(本第)는 중국 유가 5경(儒家五經)중의 하나인 예기(禮記)의 제의(祭義)편에서 효와 관련된 문구를 인용하여 명발당(明發堂)이라 불렀다. 건물은 안채, 사랑채, 행랑채, 별채 등으로 배치되어 있고, 농산별업과는 1.9km 정도 떨어져 있다.


조석루의 본제인 항촌마을 명발당(明發堂)


명발당에서 본 농산과 옹산조석루는 바로 농산아래에 위치한다.

조석루로 가는 길. 그 길은 왠지 허전하고 가슴이 시린 길이다. 지금은 집도, 정자도, 계류와 수목들도 모두 농경지가 되어 아무 흔적도 없다. 그러나 조석루는 효를 실천했던 윤서유의 인간적 향기를 느끼게 한다. 그곳은 보이지 않는 옛 선비의 흔적들과 무언의 대화를 할 수 있는 곳이다.
왕희지(王羲之)의 아침과 도연명(陶淵明)의 저녁을 취한 이름 조석루(朝夕樓). 비록 지금은 흔적도 없이 잡풀들만 널려져 있지만, 그곳에 가면 한때 자신의 이상세계를 펼쳤던 선비 정신을 느껴볼 수 가 있고 당시 조영되었던 아름다운 정원을 상상해 볼 수 있다. 더구나 조석루옛터는 수도없이 이곳을 드나들었던 다산 정약용의 정신세계를 향유해 볼 수 있다.
  
효를 실천하기 위해 벼슬길 마다하고 여막에 집을 짓고 살았던 윤서유의 별업형 별서.
그곳은 이제 효를 실천했던 한국에 몇 남지 않은 별업형 별서가 되었다.
요즘의 장묘문화(葬墓文化)는 매장(埋葬)이 쇠퇴해가고, 화장(火葬)을 하는 추세이지만, 아름다운 정원을 가꾸면서 효를 실천했던 조석루는 문화재적 가치측면에서 복원해야 하지 않을까? 우선 사적으로 선지정(先指定)이라도 하고, 후보완(後補完)으로 복원정비(復元整備)를 시켜야 하겠다. 다산 정약용은 평생친구이자 사돈인 윤서유가 죽었을 때 “윤정언만사(尹正言挽詞)”라는 시를 지어 죽음을 애도하였다. 부친과 조상의 무덤 앞에 별업형 별서로 삶의 터전을 만들고 효를 모범적으로 실천했던 윤서유이었기에 친구를 생각하는 다산의 애달픈 마음은 더욱 절절했던 것 같다.


윤서유의 선영(祖父 尹南紀묘소석물과 석상은 최근에 새로 한 것으로 보인다.


윤서유의 선영묘소에서 바라본 조석루 정원 옛터멀리 경작지와 우측으로 앵자강 언덕이 보인다.

윤서유(尹書有)는 그의 아들 윤정기(尹廷基: 1814-1879)에 의해 옹산(翁山)에 묻혔고, 윤정기 역시 아버지 윤서유와 같이 옹산별업(翁山別業)에 안치되었다. 마치 인간은 누구나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만고(萬古)의 진리(眞理)를 가르쳐주려는 듯이.....
- “윤서유의 죽음을 애도하며(尹正言挽詞)” -
 
丹悠揚寫正言 정언(正言: 윤서유의 호)이라 쓴 명정(酩酊) 길게 펄럭이며
秋風衰草赴高原 가을바람에 마른 풀 언덕으로 향하는구나.
龍穴嬉春事隔晨 용혈(龍穴)의 봄놀이 어제 같구나.
絡蹄如玉 如銀 옥 같은 낙지에 은빛의 생선,
誰生誰死休分別 누군 죽고 누군 살았다 구별 마시게.
已作當分一隊人 그 당시에 벌써 끼리끼리 모였었네.
茶山簫鼓鬧芬華 다산에 퉁소와 북소리 요란하게 들릴 적에
頭揷雙條御賜花 머리에 쌍갈래 어사화(御賜花)를 꽂았었네.
演場邊數株柳 잔치 벌리던 주변의 몇 그루 버드나무엔,
別時已復集昏鴉 헤어질 때 벌써 황혼 까마귀가 날아들었다네.

이재근 교수의 '자연과 철학을 담은 정원, 한국의 별서'는  문화재청이 운영하는 헤리티지채널의 '명사칼럼'을 통해 연재되고 있습니다. 헤리티지채널은 국민의 문화유산 애호의식을 함양시키기 위한 고품격 콘텐츠를 서비스하는 문화유산 전문 채널입니다. [헤리티지 채널 바로가기]
_ 이재근 교수  ·  상명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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