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물노트] 꽉 차 눈부신 나날들

이강운의 24절기 생물 노트 <10> 소만
라펜트l이강운 소장l기사입력2017-05-23
생물학자 이강운의 ‘24절기 생물 노트’<10> 소만

꽉 차 눈부신 나날들
흐드러진 산사, 보리수, 고광나무 흰꽃은 떡 벌어진 밥상
수련과 연꽃 위한 연못 만들고 보니 ‘눈부신 오월’ 다 갔네


_이강운 홀로세생태보존연구소 소장
(사)한국환경복원기술학회 부회장



'5월의 꽃'이란 이름이 있는 산사나무 꽃


고광나무

모든 걸 다 채워 꽉 차지는 않았지만 가득 차 있는 소만(小滿). 산도, 들도, 강도, 하늘도 모두 푸르다. 오히려 푸르름을 지나 여름 기운이 나타나기 시작하며 보름밖에 안 되는 찰나에 따뜻함이 뜨거움으로 바뀐다. 

오월의 꽃 산사나무와 보리수, 때죽나무, 고광나무의 흰색 꽃이 절정이다. 소박한 하얀 꽃은 화려한 색상의 많은 꽃들에 섞여 특별히 시선을 끌지 못하지만 곤충에겐 최고의 밥상이다.


산사나무 잎을 먹는 쌍점흰가지나방 애벌레

산사나무는 ‘5월의 꽃’(May flower)이라는 영명에 걸맞게 오월쯤 활짝 피는 꽃으로 5월의 상징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약재로 쓰이거나 ‘산사춘’이라는 술로 유명하지만, 유럽 사람들에게는 희망의 상징으로 봄의 여신에게 바쳤던 꽃이다. 인간에게 아름다움과 유용한 식물로 사랑을 받는 꽃이지만 수많은 곤충들에게도 산사나무 꿀은 꼭 필요한 에너지원이다. 많은 종류의 곤충 애벌레가 산사나무 잎을 먹지만 검은끝짤름나방과 쌍점흰가지나방 애벌레는 산사나무 잎만 먹는다. 진정 스페셜리스트다.


산사나무 잎을 먹는 검은끝짤름나방 애벌레


보리수의 종 모양 흰 꽃에 호박벌과 사향제비나비가 대롱대롱 매달려 꿀을 먹느라 정신없다. 가지마다 주렁주렁 꽃이 달려있어 꼭 그 꽃이 아니어도 될 것을 굳이 다투면서 꽃을 차지하려 싸운다. 건조한 5월에 많은 꽃들이 시들시들 할 때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생명을 구해주는 구세주 나무로 강인한 생명력을 갖고 있다. 딱 붙어있는 두 장의 잎을 살짝 열자 검은색 바탕에 흰점이 점점이 박혀있는 우아한 자태의 괴불왕애기잎말이나방 애벌레가 나를 올려 본다. 꽃은 꽃대로 잎은 잎대로 아낌없이 주는 나무들. 흰색 꽃이 피어나는 계절로 흰빛들이 눈부시고 꽃에 취하고 나비에 홀리니 자연에 감사한다.


보리수나무 잎을 먹는 괴불왕애기잎말이나방 애벌레

연구소 내 곤충 정원이 붉게 느껴질 만큼 강렬한 붉은색 지느러미엉겅퀴가 흰색 꽃들에 섞여 존재감을 뽐내지만 조화롭게 색상을 맞춘다. 늦봄부터 시작해서 한여름에 걸쳐서 꽃이 피는 키 작은 풀이지만 이 때쯤 피는 거의 유일한 붉은색 꽃으로 많은 곤충을 유인한다. 양도 많고 질도 좋을 뿐 아니라 꿀을 먹기도 좋게 공처럼 꽃 전체가 드러나 있으니 모든 곤충이 좋아할 수밖에.


지느러미엉겅퀴

영명으로 ‘밀크 엉겅퀴’(Milk thistle)이라 하는데 여기서 밀크는 박주가리를 ‘밀크 위드’(Milk weed)라 부르는 것처럼 잎을 자르면 하얀 유액이 나오는 데서 유래했다. 왕나비(Monarch butterfly)라는 나비 애벌레만 박주가리 잎의 독한 유액을 먹고 살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엉겅퀴를 먹는 애벌레도 꼬마독나방 애벌레 1종뿐이다. 물론 꼬마독나방 애벌레는 식성이 까다롭지 않아 닥치는 대로 많은 종류의 식물을 먹는 놈이라 엉겅퀴 잎을 먹는지 모른다. 많은 꿀로 곤충을 유인해 손쉽게 열매를 맺지만 강한 독과 끈끈한 점액질로 무장해 쉽게 몸을 허락하지 않는 식물이다.

엉겅퀴를 먹는 유일한 곤충인 꼬마독나방 애벌레

일화일세계(一花一世界). 꽃 한 송이에 세계가 담겨 있다.
    
오월을 대표하는 오월의 꽃도 있지만 오월에 날개를 달고 오월에 활동하는 곤충(May fly)도 있다. 하루살이다. 학명(Ephemeroptera)으로는 하루만 산다는 뜻이지만 물에서 나와 어른벌레로는 대개 2~3일을 산다. 오월의 곤충이라 함은 이 때쯤 짝짓기를 위해 동시에 떼 지어 날아 금방 눈에 띄기 때문이다. 뭍으로 나와서는 짝을 짓고 번식만 하므로 먹을 시간이 없다. 먹을 입 없으니 사람 깨 물 일도 없고. 병을 옮기지도 못한다. 


한강에서 대번창해 제거 소동을 일으킨 동양하루살이 성체. 사람이 일으킨 생태계 교란의 결과일 뿐더라 자세히 보면 예쁘기도 하다.

하루살이는 물에서 생활하는 곤충으로 하천이나 강바닥에 쌓여있는 썩은 식물 부스러기를 걸러서 먹는다. 애벌레 때는 물고기, 커서는 새의 먹이가 되는 생태적으로 중요한 분류군이다. 잠자리와 함께 약 3억 년 전부터 지구상에 살아왔던 벌레로 인간의 대 선배인 셈이다. 물속에서 1차 소비자로 식물 부스러기를 걸러내고, 2차 소비자의 먹이로 생태계를 돌리는 엔지니어이지만 ‘압구정 벌레’라고 불리는 동양하루살이가 도심 지역에 대거 나타나면서 해충이 되었다. 단지 번식을 위한 행동인데 수가 많으니 징그럽다 하는데 하루살이는 억울하다. 


연노랑뒷날개나방 애벌레


최근 종종 대번창해 소동을 빚는 연노랑뒷날개나방


황다리독나방 애벌레


황다리독나방 어른벌레


밤나무산누에나방 애벌레

십여 년 전에는 도심에서 말매미가 대량 창궐했고 몇 년 전에는 황다리독나방이 대량 발생해 세상의 이목을 끌었다. 2014년 8월에는 전남 해남에서 풀무치 떼, 2016년 5월 말 강원도 춘천에는 연노랑뒷날개나방이 폭발적으로 발생했다. 밤나무산누에나방은 아마 올해에도 엄청 많이 발생할 것이다. 

이처럼 몇몇 곤충이 크게 발생하면 해충 예방책을 발표하고 살충제를 뿌리고 이들을 없애지 못해서 안달이다. 그러나 단지 보기 싫다, 불편하다는 이유만으로 이들을 내치는 것은 맞지 않다. 인간사에 부침이 있는 것처럼 곤충 세상에서도 불규칙한 생성과 발생이 주기적으로 찾아오며, 때로는 극심한 환경 변화로 벌레가 자연스럽게 대발생한다. 어느 새로운 별에서 툭 떨어진 것이 아니라 원래 살던 애들이 그저 살기 좋은 환경에서 잘 자라 많이 생겼을 뿐이다. 

나방이나 하루살이 등의 벌레가 대량으로 나타나는 것은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다. 그러나 먹이사슬이 안정된 생태계에서는 특정 벌레가 대량으로 나타나지 않으므로 생태계를 엉망으로 만든 우리 탓도 있다. 갑작스레 날아든 하루살이나 나방 떼가 반가울 리 없지만 ‘지구 생태계 주인공인 곤충에게 인간이 며칠만 좀 참아주자’ 라는 말을 해도 되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곤충의 생존 기간이 2~3일, 길어야 평균 7일 정도로 생존 기간이 매우 짧은데 해충이라며 살충제를 쓰면 물론 우리 건강에도 좋을 리 없다.


수련과 연꽃을 위한 연못을 조성했다.


연 뿌리

심하게 가물어 양수기로 물을 대고 용을 써 어느새 연못에도 물이 한 가득이다. 파란 하늘에 녹색의 숲이 풍덩 담겨 있는 ‘홀로세의 수련원’이 만들어졌다. 연못 위에 방석처럼 놓인 연잎 위에서 햇살을 받으며 일광욕을 즐기고 불쑥 올라온 꽃에 온갖 곤충들이 꿀을 빨며 정신없이 좋아하는 모습을 그리곤 했다. 무려 2000년을 참고 견디며 싹을 틔워 꽃을 피울 수 있다는 연꽃이 좋았고 멸종위기 곤충 물장군을 위한 서식지를 만드는 일이라 신났다. 굽힌 허리가 아픈 줄도 모르고 함빡 웃으며 30여 종의 연꽃을 심었다. 

화중생련(火中生蓮)! 활활 타는 불길 속에서 청초하고 향기로운 연꽃을 피워 물장군과 물고기 같은 뭇 생명에게 생명을 줄 수 있는, '순결과 청순한 마음'이라는 꽃말을 가진 연꽃을 볼 수 있게 된 것. 참 좋다.

언젠가 동네 보살이 내 사주를 보고 ‘화(火) 기운이 세서 물을 끼고 살면 좋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는데 대충 맞는 것 같다. 새롭게 조성한 수련원부터 연구소 내 12개의 연못이 있어, 늘 물을 끼고 살고 있고 물장군 증식도 나와 궁합이 잘 맞는다. 

5월과 함께 한 모든 시간이 눈부셨다.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모든 날이 좋았다. 

매서운 추위를 무릅쓰고 ‘꽃 같은 촛불’로 어둠을 밝히며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자’라고 외쳤던 시민들의 절규가 열매를 맺어서 좋았다. 원한의 눈물을 멈추고 다시 빛을 찾은 ‘빛 고을’ 광주가 또 좋았다. 5년 후에 “참으로 잘 했다”라는 말만 준비하면 될 것 같은 좋은 예감도 또 좋고. 눈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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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한겨레의 동의를 얻어 발췌한 기사이며, 이강운 소장의 주요 약력은 홀로세생태보존연구소 소장 / 한국환경복원기술학회 부회장 / 한국서식지외보전기관협회 회장 / 국립안동대학교 식물의학과 겸임교수 / 저서로는 <한국의 나방 애벌레 도감(Caterpillars of Moths in Korea)>(2015.11 환경부 국립생물자원관), <캐터필러>(2016.11 도서출판 홀로세)가 있다.
이메일 : holoce@hecri.re.kr       
블로그 : http://m.blog.naver.com/holoce58
_ 이강운 소장  ·  (사)홀로세생태보존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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