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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성국(海東盛國)을 다녀와서 (3)

월간 환경과조경20015157l환경과조경
발해가 남긴 것들 - 도시와 생활상 - 2000년 6월말 연길시(延吉市) 정부에서의 용역업무도 정리되어 가자 마지막으로 화룡(和龍) 근처의 발해유적을 찾기로 하였다. 이곳을 찾다보면 모아산(帽兒山)고개를 넘게되는데 언제나 처음 찾았던 1990년도 여름이 생각나게 된다. 정상에 오르기까지 선구자의 노래를 부르며 해란강을 바라보았을 때의 그 감격 그 울먹임이 이제는 추억이 되어가고 있다. 그래도 용정(龍井)시와 화룡(和龍)시 경계언덕에서 서쪽으로 펼쳐진 두도(頭道)평야의 드넓은 논과 조선족의 초가 마을을 지나칠 때면 아직도 남다른 눈길은 남아 있었다. 해란강 줄기를 따라 동서길이 30km, 폭이 10km에 이르는 이곳의 광활함은 발해초기 고구려의 옛 고장을 확보하기 위한 양식과 사료 공급의 후방기지로서 연길시의 부르하통하 유역과 목단강 상류지역을 꼽을 정도였다니 더욱 그러하다. 이곳은 특히, 로주의 벼(盧州之稻)라 할 정도로 벼가 많이 산출되었고 질 좋은 쌀로 유명했던 곳이니 당시부터 쌀 농사를 짓던 그 민족이 아직도 끊을 수 없는 땅과의 인연을 생각하노라면 새삼 감회에 젖게 된다. 이러기를 매번 유의 깊게 살피지 않으면 서성향(西城鄕) 북고성촌(北古城村)을 지나치게 되는데, 이렇게 두도 평야를 거쳐 백두산으로 가는 공로상을 달리다 보면 요나라 이후의 성인 동고성(東固城)과 공로 바로 옆의 낮은 언덕을 지나쳐 자주 와룡촌(臥龍村) 임도(林道)에 이르게 된다. 서성향의 이 낮은 언덕이 발해 중경(中京) 서고성(西古城)의 북쪽 외성으로서 논두렁이나 사람이 다니는 뚝으로 변해버렸다. 직사각형으로 이루어진 외성은 흙으로 쌓았고 전체 길이는 약 2.7㎞로 북쪽 도로변 성벽에는 가로수가 심겨져 있으며 북문터였던 입구에는 한글과 중문으로 안내된 돌 표지석이 2개 세워져 있다. 성안은 모두 논으로 변해 버렸는데 내성이 있던 자리에만 20여 채의 조선족 마을이 자리잡고 있다. 발해의 중경터가 어디인가에 그 동안 논란이 분분하다 1980년 이곳에서 가까운 룡수향(龍水鄕) 룡해천(龍海川)에서 발해 3대 문왕 대흠무(文王大欽武)의 넷째 딸 정효공주(貞孝公主)의 묘가 발견되어 이곳이 중경 현덕부(中京顯德府)였을 것으로 의견이 모아지게 된 것이다. 기원 742년 구국의 수도에서 천도해와 755년 상경(上京)으로 이주하기까지의 도읍지였다가 그 후에는 당나라 장안(長安)으로 가는 길목의 교통요지이기도 한 곳이었다. 규모는 상경용천부 (上京龍泉府-흑룡강성 영안시 발해진)보다는 훨씬 작지만 라는 기재를 근거로 이곳 현주(顯州) 지역은 "발해초기의 첫 수도가 아니었겠냐"라고 할 정도로 매우 중요한 전략요충지였던 것이다. 그러나 성 복원도의 조감도를 보노라면 한달 전에 답사했던 상경성과는 비교할 수 없는, 우리 나라의 옛 읍성 정도의 크기였다. 상경성의 규모는 외성, 내성, 궁성 등 3중성으로 지어졌고 궁전을 중심으로 하여 동궁과 서궁이 배치되었으며 궁성과 내성의 동쪽사이에는 어화원(御花園)도 있었다. 내성에는 관서 등이 있었고 외성 내에는 주작대로(朱雀大路)를 중심축으로 하여 동·서반구로 나누어져 리방제(里方制)가 엄밀하게 구분되기도 하였다. 외성의 둘레는 16,296.5m이고 내성의 총 길이는 4,416m이며 궁성의 둘레는 2,680m로서 성안에는 11갈래의 큰길이 있고, 성문도 10개나 되었다. 중앙의 큰 거리는 너비가 무려 110m에 이르렀으니 당시의 장안(현재의 西安)거리만 하여 번화함의 정도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게 된다. 특히 궁성구역에는 하나의 축선에 규모가 웅장한 궁전터가 다섯이나 되었고 건축물은 주로 현무암으로 쌓아 지금까지도 2∼3m의 높이로 남아 있었다. 북쪽과 동쪽 그리고 3곳은 금원(禁苑)으로서 안에는 정자, 못, 그리고 인공산이 조성되기도 하였다. 총 면적은 장안보다 작았으나 당시 일본의 나라(奈良)와 헤이안(平安)시대의 수도였던 헤이즈교(平城京), 헤이안교(平安京)와 비교하면 동아시아에서는 두 번째로 큰 도시로서 당시 해동성국의 면모를 실감하게 된다. 이에 비한다면 발해초기의 도읍지이긴 하여도 이곳 서고성인 중경의 규모는 매우 허술하게 비쳐질 수밖에 없었다. 조감도상의 배치를 보면, 궁성내부 중심축의 궁전을 중심으로 동궁과 서궁이 분리되었고 내성 좌, 우변에는 관서 등이 있었던 듯하고 남서쪽 모퉁이에 못과 정자, 그리고 남동쪽에는 인공산과 숲으로 이루어져 있다. 현재 남아있는 조선족 마을에는 한족이 한 가구도 없다는데, 부락민의 설명으로는 한족들이 들어와 살다보면 멀쩡하게 살아나가지 못한다 한다. 듣기 좋은 이야기로 흘리면서 이번에는 정효공주(貞孝公主)묘를 찾아 해란강 남쪽 팔가자(八家子)로 향하였다. 기차역이 있는 곳으로 역전에서 동쪽인 좌측 길로 접어들자 용수(龍水)마을을 지나 복동하(福東河)를 건너게 된다. 같이 간 조선족 청년의 안내로 물어물어 찾았는데 마침 냇가에서 빨래를 하던 한족 처녀의 무심한 손길 방향을 바라보니 소나무 몇 주가 보이는 용두산(龍頭山) 줄기의 낮은 구릉이 정효공주의 묘터라 한다. 산자락 밑에는 한족들의 어수선한 농가가 있었고 한창 벽돌을 굽기 위한 작업에 여념들이 없었다. 「발해사 연구(渤海史 硏究2. 연변대학 출판사)」의 비문에 관한 논문 중 이라 하였고, 이라 하였듯이 언덕위 산을 깎아 2000㎡정도 되는 평지에 공주의 묘는 자리잡고 있었다. 근처에는 10여기 정도 도굴된 발해고분들이 있었고 공주 묘자리 바로 위에는 무덤을 보호하기 위한 가건물이 세워져 있어 내부는 살펴볼 수가 없었다. 몇 년 전 까지만 하여도 아랫마을에서 열쇠를 관리하였다 하는데 너무도 중요한 유물자료라 화룡시에서 함부로 공개하지 않는다 한다. 벌써 몇 년째라하니 관련국간의 복잡한 논란을 피하려는 뜻이겠고, 당초 무덤 위에는 벽돌로 쌓은 탑이 있었다 한다. 주변의 넓은 대지에는 담배를 재배하고 있었으며 아래의 복동하 건너 동북쪽으로는 완만한 산들이 겹겹이 이어지고 있었다. 문화 혁명당시 하방(下放)되었던 학생이 소꼴을 먹이러 왔다가 우연히 탑을 발견하고 후에 연변박물관에서 무덤터로 확인하게 되었다 한다. 이로 보아 당시 크게 부흥하던 불교식 장례를 치룬, 돈화 육정산 밑 정혜공주의 동생이고 3대 문왕(文王)의 넷째 딸이기도 하다. 무덤입구에서 발견되었다는 묘비문에 의하면 이들 자매는 모두 출가하여 정혜공주는 아들을, 정효공주는 딸 하나씩을 두었으나 모두 일찍 죽었고, 남편들 마저 먼저 사망하였다하니 참으로 비운의 여인들이기도 하다. 정혜공주는 40세인 777년에, 정효공주는 36세인 792년에 사망하였는데 한창 젊은 나이에다 부왕이 살아있을 때였으니 이 또한 얼마나 박복한 임금이었던가! 아마도 선왕 때 국토를 넓히는 과정에 있었던 무수한 전쟁의 업보인 듯 "정사를 보지 못하였고,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라는 애통함이 비문에도 잘 나타나 있었다. 여하튼 정혜공주의 묘비와 함께 발해사람들이 남긴 유일한 기록으로 발해연구의 더없는 귀중한 이 자료는 현재 연변박물관에 진열되어있다. 무덤내부에는 고구려에서 빌린 수법과 당나라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다하는데, 벽화로 나타난 12명의 발해인들은 무사(武士), 시위(侍衛), 내시(內侍), 악사 등으로 공주의 생활단면들을 보여주게 된다. "소루에서 퉁소를 불때면 그 곡조는 마치 한 쌍의 봉황새가 노래하는 듯 하고 경대와 마주서서 춤을 출 때면 거울속에 비친 그림자가 마치 한 쌍의 란조새와도 같았다" "몸에단 패옥은 잘랑잘랑 소리를 내었고 의복단장을 더욱 소중히 여겼다" 몸종에 둘러싸이고 악사들이 노래를 연주하며 시종들이 지팡이를 들고 일산(日傘)을 받쳐들어 햇빛을 가려주고 있는 벽화속의 그림들과 함께 비문의 내용을 상상한다면 당시의 생활상을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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