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시선] 우리는 고양이가 불편해야한다

글_진승범 논설위원(이우환경디자인(주) 대표)
라펜트l기사입력2019-03-14

 

우리는 고양이가 불편해야한다



글_진승범 대표(이우환경디자인(주))



오늘날 중국이 지구 최강이라는 미국과도 맞짱(?)을 뜰 정도의 강대국이 될 수 있었던 배경은 경제성장의 힘이다. 이런 국가 성장의 방향을 잡고 초석을 다진 인물은 우리가 잘 아는 덩샤오핑(鄧小平, 1904~1997)으로 그의 개혁개방정책을 이야기할 때 항상 따라다니는 구호가 그 유명한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이다. 원래 흑묘백묘론은 중국 쓰촨성(泗川省) 지방의 속담인 흑묘황묘(黑猫黃猫)에서 유래한 용어로 1979년 덩샤오핑이 미국을 방문하여 그들의 경제력을 확인하고 돌아와 중국의 부국론(富國論)에 불을 지피자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도입은 사회주의 노선의 후퇴라며 반대하는 공산당 내부 일부집단의 비난에 ‘부관흑묘백묘(不管黑猫白猫) 착도로서(捉到老鼠) 취시호묘(就是好猫)’ 즉,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좋은 고양이다’라며 밀어붙이자 이것을 서양 언론이 ‘Black cat, White cat Theory’로 소개하여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상관없이 중국 인민을 잘 살게 하면 그것이 제일이라는 덩샤오핑의 선지자적 생각이 지금까지는 그런대로 적중하여 중국을 G2라 일컫는 반열에 까지 인도하게 된 것이다.

요즈음 우리 조경계 내부에서도 흑묘백묘론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으로 안다. 환경분야의 자연환경복원대행업, 도시생태복원업 추진이든, 산림분야의 정원산업, 도시숲사업, 산림기술자 업역확대 추진이든 싸우지 말고 그들의 입맛(?)에 맞게 조경도 변신하고 적응하는 전략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흑묘백묘에 빗대어 피력하곤 한다. 언뜻 생각하면 일견 타당해 보이기도 하는 논리이나 지금 조경계의 현실에 중국 개혁개방 사상의 캐치프레이즈(catchphrase)였던 흑묘백묘론을 투영시키는 것에는 결정적인 오류가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흑묘백묘론은 철저하게 먹잇감(사냥감)을 앞에 두고 노리는 포식자(사냥꾼)의 관점에서 탄생한 논리이다. 즉, 1960년대 초부터 중국의 개혁개방을 주장하다 1966년 문화대혁명으로 숙청되어 실각했다가 1978년 복권되어 실권을 잡은 덩샤오핑의 중국은 경제발전이라는 먹잇감을 노리는 광활한 대륙의 부존자원(賦存資源)과 13억 인구가 뒤를 받쳐주는 사냥꾼이었던 것이다. 사회주의 국가체제라는 근간―어쨌든 고양이이므로―만 훼손되지 않으면 일부 시장경제의 도입―검은 색이든 흰 색이든―은 문제될 일이 아니었다. 사냥꾼은 사냥감의 종류에 따라 총기를 얼마든지 바꿔가며 사용할 수 있으나 사냥감은 어떤 옷을 입으나 사냥꾼 앞에선 먹잇감일 뿐이다.

과연 우리는―조경은―인접분야(건축, 환경, 산림, 기타 등등)와의 관계에서 고양이인가? 불행히도 필자의 눈에는 아무리 우리가 옷을 바꿔 입을 지라도 흑묘나 백묘이기 보다는 흑서(黑鼠), 백서(白鼠)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면 지나친 비관일까? 검은 고양이 앞에선 검은 옷을, 흰 고양이 앞에선 흰 옷을 입은들 쥐가 고양이가 될 수는 없지 않은가? 또한 수시로 검은 옷과 흰 옷을 바꿔 입어가며 적응하여 순간순간을 모면할 수 있는 옷을 가진―능력 있는―쥐가 몇이나 될까 생각해보았는가? 그렇게라도 해서 일부가 살아남은들 그들은 쥐 집단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으며, 전체를 버리고 각자도생(各自圖生)의 길을 택한 그들에게 공의(公義)를 위한 기여를 기대할 수 있을까?

덩샤오핑의 개혁개방론 중에 흑묘백묘론에 묻혀서 지금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으나, 흑묘백묘론과 뗄 수 없는 논리가 있다. 바로 ‘부자가 될 능력이 있는 자들이 먼저 부자가 되라. 그 후에 낙후된 자들을 도우라’는 ‘선부론(先富論)’이 그것이다. 따라서 덩샤오핑의 흑묘백묘론 사상은 선부론의 실천이 수반되어야 완성형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중국의 현실은 어떠한가? 먼저 부자가 된 검은 고양이와 흰 고양이들이 그렇지 못한 고양이들과 쥐를 나누고 있다는 훈훈한(?) 이야기가 들려오지 않음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현실을 직시하자. 지금 우리에겐 흑묘와 백묘가 몰려오고 있다. 내 앞의 고양이와 같은 색의 옷을 입는다고 나도 고양이가 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선 안 된다. 검은 고양이 앞에선 검은 소리, 흰 고양이 앞에선 흰 소리를 내는 쥐가 되지는 말자. 우리 앞의 고양이가 무슨 색이든 올곧게 하나의 색깔, 한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온전한 쥐로 살 수 있는 것이다.

고양이의 변색(變色)은 무죄(無罪)가 되지만 쥐의 변색은 유죄(有罪)다.
글_진승범 대표이사 · 이우환경디자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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