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역사의 산 증인, 전설의 나무들

서울시 관리 보호수 24그루 이야기
라펜트l손미란 기자l기사입력2011-02-09

아파트들이 올라갔다. 지하철역이 들어섰다. 도로가 정비되면서 골목이나 작은 길도 점점 없어졌다. 숱한 전쟁과 파란만장한 몇 백년의 역사 속에서 불타고 사라진 나무들도 많았건만 그 모든 변화에도 불구하고 끄떡없이 한 자리에서 동네를 지킨 나무들이 있다. 서울시는 특별히 보호하거나 보존할 가치가 있는 시내 216그루의 나무들을 보호수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이들 보호수 중 총 24그루는 사계절 늘 푸른 상록수다. 게다가 각종 전설과 역사적·문화적 이야기까지 보유하고 있다. 

 

김소월이 사랑한배재학당 향나무

중구 정동에 위치한 한국 최초의 근대식 중등교육기관인 배재학당에는 525살 된 향나무가 있다. 해마다 이 학교의 졸업앨범 속에 단골로 등장할 만큼 사랑을 받았던 나무다. 여기에는 졸업생들을 통해서 이어져오는 서글픈 전설이 있다. 임진왜란 때 왜장이 자신의 말()을 묶으려고 향나무에 못을 박았다는 것이다. 1940년대 졸업생의 말을 들어보자. “우리 아버지도 배재를 나오셨는데 이 나무에 대해 말씀하시길,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이 나무에 쇠못을 박고 말을 묶어 놨다고 합니다

 

배재고보를 다녔던 또 다른 졸업생, 시인 김소월도 학교 동관 뒤편의 이 나무를 좋아했다. 우연한 기회에 김소월의 시에 빠져 결국은 자타가 공인하는 김소월 전문가 데이비드 맥캔(David McCann) 하버드대 교수 역시 이 나무를 사랑했다. 1960년대 이곳을 찾았던 맥캔 교수는 오랜 세월로 인해 향나무가 말라 죽어가는 것을 보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미국에 돌아갔지만, 나무는 1972년 보호수로 지정된 이래 다시 푸르름을 되찾았다. 높이 17m, 가슴높이 둘레 2.3m의 장중한 카리스마와 수려한 자태를 통해 우여곡절의 역사를 묵묵히 지나온 나무에 대한 경외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권력무상! 대원군과 구한말 역사를 지켜본석파정 소나무

인왕산의 비경이 숨막힐 듯한 조선말기의 중신(重臣) 김흥근의 별장으로 흥선대원군이 집권 직후 거의 빼앗다시피 하여 자신의 별장으로 썼다는 종로구 부암동의 석파정. 여기에 또 다른 서울시 지정보호수 소나무가 있다. 5m의 키에 2.8m 둘레의 소나무 잎사귀가 만들어내는 그늘의 넓이가 무려 67. 인근 주민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피서지인데, 그 서늘한 그늘 속에 들어가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노라면 이하응이란 한 걸출한 인물과 조선후기의 비운의 역사가 떠오르면서 권력의 무상함을 느끼게 된다. 석파정이 6.25 이후 천주교 계열 콜롬바고아원이 되었다가 우여곡절 끝에 건물 일부가 한정식 집으로 된 사연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무는 여전히 수려하기만 하다.

 

나무를 훼손하면 마을에 재앙이 닥친다가리봉동 측백나무와 소격동 소나무

서울에서 이보다 더 주민들에게 대접 받는 나무도 있을까? 빽빽한 주택가 사이에서 사면초가 형상으로 갇혀 있긴 하지만 구로구 가리봉2동의 측백나무는 6.25 전까지만 해도 주민들이 정월 대보름이나 가을추수기에 고사나 제사를 지냈던 마을의 수호수다. 훼손하면 재앙이 온다는 전설과 나무 속에 큰 뱀이 살고 있었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어 언제나 경외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2003년부터는 매년 10측백나무 추진위원회주관으로 주민화합과 무사안녕을 기원하는 주민 화합 한마당을 개최하고 있다. 2004 12월에 서울시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광진구 능동 향나무도 450여 년 동안 마을 주민들과 함께 해왔다. 순명황후 문씨의 유릉을 모셨던 치성당이 있던 자리의 향나무는 매년 2월 초하루와 10월 초하루 저녁 8시경에 주민들이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치제를 지내는 신성시 되는 나무다. 이곳에 위치한 알림의 종은 화재나 초상 등 마을에 위급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타종해서 이웃들에게 알리고 다함께 쌀과 현금 등을 거두어 전달함으로써 이웃의 고통을 함께 하였다고 한다. 한편 종로구 소격동의 소나무도 굳은 절개의 상징으로 아직까지도 추앙받는 나무다. 나무가 위치한 우물자리는 과거에 종친의 정치 참여를 막고 비리를 감시하는 역할을 했던 종친부 자리. 사시사철 푸르른 데다 외관조차 늠름하고 아래쪽을 향해 지표면에 가까이 뻗어 있는 그 모양새가 과연 비범하다.

872 6개월 동안 이토록 푸른 청춘서초동 향나무

서초역 사거리 대법원 앞의 향나무는 서초동 일대의 상징이자 서울 전체로 쳐도 명물로서 손색이 없다. 수많은 차량이 통과하는 서초역 사거리 중앙녹지대에 있으면서도 자동차 배기가스 같은 오염의 주범은 물론 혹한과 폭설과 비바람 등 온갖 고초를 견디고도 오랜 세월을 독야청청하고 있다. 그것도 24그루의 서울시 상록수 지정보호수 중에서도 최고수령인 872 6개월 동안 말이다. 서초동 향나무는 강남구 개포동 도로중앙 녹지대에 있는 향나무와 종로구 사직동 사직공원 옆 도로변의 있는 향나무와 함께 대로에 자리잡고 있어 마치 도로를 지나는 운전자들의 안전을 기원하는 수호자처럼 보인다.

 

이 밖에도 기이한 자태로 주민들에게 신비한 구경거리를 선사하는 강서구 오곡동의 45도 기울여진 향나무와 동대문구 전농동의 세 갈래로 분지된 향나무와 강서구 개화동의 고개 숙인 향나무, 태풍 곤파스로 인해 큰 가지가 훼손됐지만 여전히 아름다움을 간직한 중구청 내 향나무, 주민들에게 쉼터로서 마을 사랑방의 역할을 하고 있는 방화동 향나무, 그리고 금천구 시흥동의 향나무와 노원구 상계동의 반송 등 사계절 푸른 보호수들은 앞으로도 지역의 대표적인 마스코트가 될 것이다.


손미란 기자  ·  라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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