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공공미술의 장소성
장소 특정적 미술공공미술의 장소성
장소 특정적 미술(one place after another)
권미원 지음, 김인규⋅우정아⋅이영욱 옮김, 현실문화 펴냄(2013)
오정학 경기도시공사(ohjhak@daum.net)
1,600마리 종이 팬더가 잠실을 떠났다. 한 달간 모였던 300만 인파를 뒤로 한 채 분양자에게로 흩어졌다. 일상으로 돌아간 석촌 호수와 롯데월드몰 잔디정원 어디에도 뜨거웠던 퍼포먼스의 흔적은 없다. 하지만 400만이 모였던 작년의 러버덕보다 여운은 더 길다. 둘 다 공공미술로 소개되었다. 하지만 러버덕이 ‘치유’ 와 ‘힐링’까지 들먹였지만 마케팅 도구의 느낌이 강했다면, 그나마 팬더는 세계자연보호기금(WWF)과 손잡고 공공선을 내세운 덕분에 상당한 공감과 참여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
러버덕과 종이 팬더처럼 공공미술(public art)은 대중을 위해 외부공간에 설치된다. 빌딩 앞이나 공원의 환경조각이 대표적이다. 그 뿌리를 거슬러 가면 대지미술(land art)과 환경미술(environment art)을 만날 수 있다. 태초에 주로 옥내에 있던 미술은 공공미술이란 이름으로 야외에 둥지를 틀었다. ‘나선형의 둑(Robert Smithson)’이 거대한 규모로 풍경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켰듯이, 대지미술은 자연을 재인식하고 자연환경의 창조적 응용을 시도했다. 공공미술은 이에 더하여 공공에 의한, 공공을 위한, 공공의 미술품이 되고자 한다.
이제 공공미술은 도시경관의 한 구성요소이다. 당연히 형태, 색채, 스케일, 질감 등은 주변부와 잘 어우러져야 한다. 장소성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러버덕은 전통적인 공공미술의 개념에 충실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잠깐의 기분전환과 스펙터클한 추상공간의 홍보 외에 공공의 편익과 소통에 얼마나 기여했는지는 의문이다. 바로 이런 지점에서 공공미술가들의 고민이 시작되었다. 공공미술이 물리적인 장소성에 국한될 때 건축물과 주변부에 종속되고 자본의 도구가 되는 현상에 대한 경계였다.
공공의 참여와 개입은 공공미술을 전통적인 공공미술과 새로운 장르 공공미술로 종단적으로 구분한다. 리처드 세라는 전통적 공공미술의 한계와 새로운 장르 공공미술의 필요성을 잘 보여주었다. 그의 논란작인 ‘기울어진 호(1981~1989)’는 정치체계의 억압을 효과적으로 표현했으나 이용상의 불편 때문에 시민들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결국 철거되었다.
존 에이헌의 구상조각(1991)은 대중의 참여 면에서 이보다 진일보했으나 결과는 똑같았다. 그는 십 년 이상 몸담은 뉴욕 사우스 브롱스 청소년들의 친숙한 일상을 충분한 대화를 거쳐 생생하고도 정확하게 포착했다. 그러나 지역민들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을 특정한 이미지로 정형화했다며 반발했고 결국 작품은 5일 만에 철거되었다. 재현 대상인 청소년과의 교감에만 신경 썼을 뿐 다른 연령대의 생각을 간과한 탓이 컸다. 결국 그는 같은 공동체 구성원이면서도 인종의 벽을 극복치 못했다는 비판을 감수해야 했다. “공동체 기반 장소 특정성의 중심적인 목표는 관람자⋅구경꾼, 관객, 대중이자 동시에 작품 주제인 공동체 성원들이 작품 속에서 비판되기 보다는 긍정적으로 그려지거나 인정되는 의미에서 자신들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그런 작품을 창출하는 것(151쪽)”임을 소홀히 한 결과였다.
사우스 브롱스에서 철거된 뒤 소크라테스 조각공원으로 옮겨진 에이헌의 작품ⓒsocrates sculpture park
두 사례는 모두 시민에 의해 철거된 실패작이다. 하지만 장소 특정성의 환경적⋅사회적 유효성을 보여주는 값진 논쟁이었다. 지역민의 참여와 배제, 예술성과 대중성, 상징성과 이용성, 전문가주의와 일반정서, 폭넓은 공공성과 지역성 등이 서로 대립했고 풀기 힘든 문제였다. 그렇지만 지역민의 참여와 개입이 전 과정에서 필수적임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이러한 인식을 토대로 새로운 장르 공공미술(new genre public art)이 사회적 맥락의 장소 특정성(site-specificity)을 내세우며 등장했다.
‘장소 특정적 미술’은 원래 전위적이며 사회의식과 정치성을 특징으로 하는 미술이 공공성의 실천과정에서 제도비판성을 상실하고 오히려 지배문화에 동화되고 포섭되었다는 비판에서 시작된다. 따라서 새롭게 내세워지는 ‘장소’는 좀 더 공공적 영역으로 깊숙이 들어가 ‘사회적 장소’에 초점을 맞춘다. 그 결과 “장소는 훨씬 광범위한 문화 및 사회적 담론의 장을 가로질러 전개되고, 지도라기보다는 상호 텍스트적으로 구성되면서 거리 모퉁이처럼 실제적인 장소가 될 수도 있고, 혹은 이론적 개념처럼 가상의 장소가 될 수도 있다(16쪽).”
“장소에 의해 규정된, 장소 지향적인, 장소를 참조하는, 장소를 의식하는, 장소에 반응하는, 장소와 관계된(11쪽)”과 같은 용어들은 새로운 장르 미술, ‘장소 특정적 미술’의 다양한 변화를 설명한다. 물리적인 장소성은 공간계획과 미학적 이론으로 일치점을 찾을 수 있으나, 사회적 장소성은 관점에 따라 다양할 수 있어 쉽게 모두가 공감하는 결론을 내기 힘든 문제가 있다. 그나마 한국에서는 아직까지 사회적 장소성을 고민하는 공공미술의 사례를 보기 힘들다. 앞으로 한국의 장소특정적 미술은 어떤 식으로 전개되고, 조경공간과 어떻게 어우러질지 자못 기대된다.
- 글 _ 오정학 박사 · 경기도시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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