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조경은 어떤 예술인가?

예술과 다중(Art et Multitude)
라펜트l오정학 박사l기사입력2015-11-09

조경은 어떤 예술인가?



예술과 다중(Art et Multitude)
안토니오 네그리 지음, 심세광 옮김, 도서출판 갈무리(2010)

오정학 경기도시공사(ohjhak@daum.net)



무엇이든 예술이고 누구나 예술가인 시대이다. 그렇다면 조경의 예술적 가치는 어느 정도일까? 조경의 영역별로 예술성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왜 설계가는 예술가여야 하고 현장 기사는 노동자로 인식될까? 그 실마리를 풀려면 예술에 대한 정의부터 살펴봐야 되는데 많은 이들이 이에 대한 말을 남겼다. 그 중에서도 아리스토텔레스는 제작(poiesis)과 행동(praxis)으로 예술을 세분했다. 제작은 수단적 활동이며 행동은 그 자체가 목적이다. 아리스토텔레스를 학문적으로 승계한 한나 아렌트는 다시 ’행위(action)'를 인간 행동의 최고로 쳤다. 행위는 아렌트가 설파한 복수성(複數性)과 연관되어 타자성을 지니며 사물이 아닌 언어로 매개되고 윤리성과 정치성을 특성으로 한다. 


<제국(2000)>, <다중(2004)>, <공통체(2009)>로 세계인의 눈길을 끈 안토니오 네그리가 예술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가 내세웠던 ‘다중(多衆, multitude)’과의 관계로 풀어나갔다. 기본적으로 그는 예술에 대한 신자유주의의 포섭을 경고한다. 자본주의는 이제 예술이란 이름으로 모든 상품의 교환가치를 부풀리는데, 상품 디자인에서 부터 도시재생과 같은 공간의 생산에까지 모든 대상들이 그 자장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꿰뚫는다. 본래 모두의 것이었던 예술은 이제 제국이 휘두르는 전가의 보도가 되고 있다. 이를 다시 되찾기 위해 그는 추상적인 것, 포스트모던, 숭고, 집단적인 노동, 아름다움, 구축, 사건, 신체, 삶정치를 키워드로 한 아홉 개 편지글을 우리 모두에게 보내주었다. 


예술은 아름다움을 추구해 왔다. 미의식의 구현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인류사에서 처음 맞이한 과잉의 시대는 예술에게 최고의 개화기를 제공했다. 예술은 문화의 이름으로 이제 모든 산업에 개입했고 도시 공간 곳곳에 관여하고 있다. 예술은 삶의 행동양식이자 공간의 지배원리로써 무소불위의 권위를 가지게 되었다. 그렇지만 오늘날의 예술적 창조는 무절제, 초과, 생산성의 과잉이란 또 다른 부작용도 동시에 낳고 있다. 


예술이 감각적인 아름다움에만 집착할 때, 형식미학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게 될 때, 결국 상업주의적인 신비화로 빠져들 수 있다. 타자의 욕망을 위해 교환가치에 충실한 소위 ‘명품’이란 용어는 이를 잘 나타낸다. 장인의 명품과는 결을 달리하는 디자이너의 명품은 예술 작품을 가격으로 환원 시키며 결국 예술 파괴로 기능하기 쉽다. 지나친 시장성과 교환가치는 예술의 본질을 변질시킨다. 소위 ‘명품 신도시’라는 곳에서 그러한 예는 쉽게 발견된다. 도시 가로수는 기능과 경관이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기능성, 환경성, 생태성에 부합된다고 볼 수 없는 고가의 전통수가 심어진 것은 ‘명품’이란 애초의 강박관념이 본질을 얼마나 변질시켰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 명품공간이 추상공간으로 이어짐은 시간문제이지 않을까?



숭고의 경험이란 이론적인 것으로부터 실천적인 것으로의 도약이고 부정의 진실이다. 여기서 불안이 파괴됨으로써 상상력이 구축될 수 있게 된다(76~77쪽) ⓒwww.lafent.com


그러나 네그리의 아름다움은 감각기에 국한되지 않는다. “사물의 아름다움은, 공통적인 것의 윤리-정치적인 한계들의 구축, 즉 행위의 협치(governance)와 정확히 연관(224쪽)”된 것으로 본다. 즉 그가 관심 갖는 아름다움의 의미는 플라톤이 말한 수학적인 무한의 끝이 아니다. 칸트가 내세운 자연적 무한성의 끝에서 조직되는 숭고미도 아니다. 그것들을 뛰어 넘는 윤리적 실천과 다중의 목적 구축과 연결된다. 행위의 결과물로 보기보다 행위 그 자체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와 아렌트를 잇는다. 협치, 다중의 목적 실천, 절차 중시의 측면에서 흡사 주민참여 디자인을 연상케 한다. 


 

네그리는 예술가가 아닌 예술인을 강조한다. <공통체>에서 다중이 스스로 ‘공통적인 것’의 주체가 되라는 의미로 “다중의 군주 되기”를 바랬다면, 이번에는 “다중의 예술인 되기”를 주문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대중이 독특한 다중으로 거듭나야 한다. 그랬을 때 다중의 예술적 실천은 생활 형식들에 투자되고 이 생활형식들은 일상과 세계를 예술로 이끌 수 있기 때문이다. 조경의 예술적 가치는, 조경의 영역별 예술성은 결국 고정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어떠한 가치를 가지고 어떤 방식으로 누구를 위해 그 공간을 만드는 가에 따라 결정된다고 보여 진다. 

_ 오정학 박사  ·  경기도시공사 사업기술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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