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기행] 신기자의 유럽 탐험기, 이탈리아 -4

토론의 중심지 광장에서 바라 본 로마
라펜트l신혜정 기자l기사입력2017-10-27







토론의 중심지 광장에서 바라 본 로마


이탈리아 로마 위치도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Arch of Constantine

푸른 잔디밭과 수목 사이에 있는 개선문이 웅장함을 준다 ⓒ신혜정 기자

아래에서 본 개선문. 상당한 규모와 섬세한 조각이 눈에 띈다. ⓒ신혜정 기자

로마의 손꼽히는 명소 중 하나인 개선문은 콘스탄티누스 1세가 서기 312년 '밀비우스 다리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건설됐다. 이 전투로 콘스탄티누스 1세는 서로마 제국의 지배자가 되었고, 최초로 기독교를 받아들여 서로마 제국을 통합했다.

개선문의 크기는 높이 21m, 너비 25.7m, 두게 7.4m로, 대리석 벽면에는 황제가 전투에서 승리하는 장면들이 새겨져 있다. 1700년대 복구 작업이 행해졌고, 1990년대 후반이 돼서야 마무리됐다. 개선문의 전통은 프랑스까지 이어져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 1세가 파리에 개선문을 세웠다.

멀리서 바라본 개선문도 멋지지만, 특히 가까이에서 본 개선문은 대단했다. 벽면을 따라 새겨진 조각들이 너무나도 섬세했기 때문이다. 당시 급하게 만들면서 여러 기념물로부터 장식 부분을 떼와 완성시켰다고는 하지만, 조각물에 대해 익숙치 않은 동양인의 시선에서는 감탄사가 절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천 년 전에 이런 기념물을 만들 수 있었는지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왠지 이탈리아에서 몇 년만 살 수 있다면 고고학에 빠지지 않았을까 싶다.


티투스 개선문 Arch of Titus

또 다른 개선문. 하얀 대리석이 아기자기한 느낌을 살린다. ⓒ신혜정 기자

겉보기와 다르게 속은 정교하다. ⓒ신혜정 기자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에서 멀지 않은 곳에 떨어진 위치에 또 하나의 개선문이 있다. 그 동안 로마에는 콘스탄티누스 개선문만 있는지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무려 34개나 세워져 있다고 한다. 그 중 티투스 개선문은 가장 오래됐다.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보다는 약간은 소박하듯 보이면서도 장식들은 화려했다. 

티투스 개선문은 서기 81년 서거한 티투스 황제를 기리기 위해 동생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명에 따라 건설됐다. 개선문에 새겨진 조각들은 티투스 황제가 이룬 업적들이 새겨져 있다. 1822년 대규모 복원 작업을 위해 완전히 분해됐다가 다시 재조립한 모습이라고 한다. 


포로 로마노 Foro Romano

흔적만으로도 고대 로마인들의 정교함이 느껴진다. ⓒ신혜정 기자

과거와 현재의 연장선상에 놓인 수풀과 유적들. ⓒ신혜정 기자

마치 영화 촬영을 위한 세트장과 같은 이곳이 그 유명한 '포로 로마노'이다. 현재 남아 있는 유적만으로도 그 옛날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을지 상상이 된다. '포로'라는 말은 '공공 광장' 또는 '공개 토론'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말 그대로 로마의 광장이라는 뜻이다.

이곳은 고대 로마인들의 주요 생활 공간으로 신전과 공화등 등이 위치해 있다. 2500년간 로마제국이 번영하는데 중요한 핵심 공간이기도 했다. 공화당은 우리나라로 치면 국회와 같은 곳이다. 국가 주요 회의와 정책적 업무가 이곳에서 수행됐다.

여기서 우리는 최근 대두가 된 '광장'에 대해 생각해 볼 만하다. 본래 광장이란 개념이 없던 우리나라에서 광장이 크게 부각된 건 최근에서의 일이다. 1936년 근대도시화가 본격화되면서 도시계획에 따른 토지구획정리사업이 진행된다. 이 때 대중을 위한 공공시설인 공원과 광장이 들어섰다. 우리나라의 광장은 경성시구개정사업의 일환으로 조성된 황토현광장을 시작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비록 서양과 비교해서는 출발선상은 늦었지만, 광장을 중심으로 우리나라만의 문화와 시민 의식 성장의 기반이 마련됐다. 얼마 전, 화제의 중심이던 광화문 광장은 2009년 광화문 앞에 조성됐다. 혼잡한 도로를 정돈하고 사람 중심의 도시로 탈바꿈하자는 차원에서 조성된 광장이였지만, 처음엔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도로로 둘러싸여 있어 접근성은 떨어지고, 광화문과 북악산의 풍경을 제외하고는 특별히 볼거리가 없는 공터에 지나지 않는, 그저 교통 체중만 심화시킨 공간으로 치부됐던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서울시는 이순신 장군 동상을 비롯, 시민들을 위한 이벤트 장소로 조금씩 변화시켰다.


무너진 기둥 사이로 에마누엘레2세 기념관이 보인다. ⓒ신혜정 기자
촘촘히 박힌 기둥들이 과거 이곳에 건물들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신혜정 기자

기둥조차도 아름다운 장식문양이 새겨져 있다. ⓒ신혜정 기자

지금까지도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고대 건축물들. ⓒ신혜정 기자

고대 유적들을 어디서든 볼 수 있게 수목을 관리하고 있다. ⓒ신혜정 기자

2016년이 지나고 2017년 새해가 밝아오면서 광화문 광장은 전세계인들을 관심사가 되었다. 이곳에서 100만명의 시민들로 구성된 평화적 '촛불혁명'이 일어났다. 약간의 몸싸움을 제외하고는 100만명이 큰 문제 없이 집회에 참여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놀랄 일이지만, 결코 바뀌지 않을 것만 같던 비선실세가 연이어 죄값을 치르게 됐다. 남북전쟁으로 인한 황폐화된 도시를 빠르게 재건한 나라, IMF 위기 속에서 시민들의 자발적 금모으기로 경제 위기를 극복했던 나라에서, 또 한번의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이다. 

광장은 사람들을 모이게 하는 힘이 있다. 우리나라 광장의 역사는 무척이나 짧지만, 이곳에서 다시 한번 새로운 역사가 쓰여지게 됐다. 상대적으로 오래 전부터 광장이 발달했던 로마에서는 주로 시민들이 모여 자유 토론을 벌인 장소로 사용됐다. 이런 토론 문화는 철학을 발달 시켰고, 막대한 힘을 지닌 로마 제국으로 성장하는데 중요한 기반이 됐다. 포로 로마노에서 토론을 즐기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아우구스투스 포럼 forum of Augustus
좌측에 기둥으로 둘러싸인 곳이 전쟁의 신 마르스 신전이다. ⓒ신혜정 기자

포로 로마노 인근에 위치한 아우구스투스 포럼은 기원전 42년 아우구스투스가 필리피전투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지어졌다. 전쟁의 신인 마르스를 위해 지어진 신전이 있으며, 전쟁에서 승리한 황제와 장군 석상이 있었다고 한다. 이곳은 주로 전쟁과 관련한 주요 정책을 결정하는 장소로 사용됐다. 전쟁과 관련된 장소여서 인지 약간은 투박하고 거친 느낌이 든다.


캄피돌리오 언덕 Capitoline Hill

계단이라고 하기에는 평탄한 도로같다.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원근감을 파괴한 계단. ⓒ신혜정 기자

광장에서 내다본 모습. 위에서 보니 더욱 도로 같아 보인다. ⓒ신혜정 기자

중앙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기마상이 있다. ⓒ신혜정 기자

캄피돌리오 언덕의 '캄피돌리오'는 수도 '캐피탈(Capital)'을 뜻한다. 로마의 일곱 언덕 중 하나로, 이 중 가장 높은 언덕이다. 캄피돌리오 광장은 1547년 미켈란젤로가 설계했으며, 광장을 중심으로 로마 신화의 최고신이였던 유피테르 신전과 로마 시청이 위치해 있다. 로마에서는 가장 작은 언덕이자 신성한 언덕이다.

광장으로 가기 위해서는 계단을 이용해야 하는데, 이 계단 역시 미켈란젤로가 설계했다. 계단이라고 하기에는 경사진 도로 같다. 이 계단에는 미켈란젤로의 천재성을 엿볼 수 있는 장치가 숨겨져 있다. 상당한 길이에도 불구하고 계단의 길이를 짧게 보이기 위해 계단 폭을 점차적으로 넓혀 원근감을 없앤 것이다. 원근감 마저 파괴할 수 있는 미켈란젤로의 천재성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평지처럼 보이게 포장한 것은 마차가 올라갈 수 있게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계단을 따라 도착한 광장에는 3개의 건물이 보인다. 정면에 보이는 것은 현재 로마 시청으로 사용 중인 세나토리오궁, 우측에 보이는 것은 비스듬하게 남겨져 있던 콘세르바토리 궁, 좌측에 보이는 것은 미켈란젤로가 고의적으로 대칭을 맞추기 위해 비스듬하게 지은 누오보 궁이다. 미켈란젤로에 의해 대칭적이지만 그래서 더욱 신비해 보이는 마름모 모양의 광장이 완성됐다.

중앙에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기마상이 있다. 기독교를 공인했던 중세 초기에는 황제의 기마상이 우상 숭배를 연상시킨다고 하여 대부분 철거됐다고 한다. 요한 성당 앞에 있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기마상을 철거하지 않고 캄피돌리오 광장으로 옮긴 이유는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미상으로 착각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황제를 착각할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덕에 살아남은 기마상은 1538년 교황 바오로 3세의 요청으로 지금의 캄피돌리오 광장으로 옮겨질 수 있었다. 현재 광장에 있는 기마상은 모조품이고, 진품은 콘세리바토리 궁 안의 박물관 안에 보관되어 있다.


무장한 경찰들이 로마 시청 주변으로 보인다. ⓒ신혜정 기자

나무보단 푸른 잎사귀에 아름다운 꽃이 더 많은 로마. ⓒ신혜정 기자

사실 로마에 도착했던 시점부터 무장한 경찰들을 종종 볼 수 있었다. 마침 도착한 4일 날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성베드로 성당에서 주례 미사를 집전하고, 로마 일정을 마무리하고 떠나는 날인 6일 날에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바티칸을 떠나 보스니아 수도인 사라예보를 방문했다고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일정상 경비가 상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일시적인 것인지 상시적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차만 타고 다니는 한국의 경찰과는 사뭇 다른 모습임은 분명해 보인다. 그래서 인지 로마의 인상은 더욱더 신비스럽게 남겨졌다.

갈수록 디지털화 되는 세상에서 아날로그 감성이 대세가 되고 있다. 한국만 봐도 최근 다시 복고풍으로 돌아갔고, 사색과 명상, 독서와 강연 프로그램이 점차 늘고 있다. 아무리 기술이 발달해도 사람은 단순하고 감성적인 것을 찾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인지 현대적이지 않은 로마가 더욱 매력적이게 느껴진다. 수천 년 전 이곳은 어떤 모습이였을까. 정교하고 세밀한 건축물과 잘 보존된 유적들이 계속해서 로마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한다. 
글·사진 _ 신혜정 기자  ·  라펜트
다른기사 보기
ssinkija@naver.com

네티즌 공감 (0)

의견쓰기

가장많이본뉴스최근주요뉴스

  • 전체
  • 종합일반
  • 동정일정
  • 교육문화예술

인기통합정보

  • 기획연재
  • 설계공모프로젝트
  • 인터뷰취재

커뮤니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