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회상과 망각이라는 양 날개, 장소 기억 설계의 재해석

글_이성진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환경조경학과 석사과정
라펜트l이성진l기사입력2023-02-09
회상과 망각이라는 양 날개, 장소 기억 설계의 재해석


_이성진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환경조경학과 석사과정
 


모든 동물은 필연적으로 망각의 존재다. 인간은 평균 한 시간이 지나면 절반을 망각하고, 하루가 지나면 70%가량을 잊어버리며, 한 달이 지날 무렵엔 기억의 20% 정도만 남는다고 한다. 그 유명한 헤르만 에빙하우스의 ‘망각의 곡선’ 모델이다. 필자가 입시학원에서 국어 강사로 일하던 때, 망각 주기에 따라 단기 기억을 장기 기억으로 바꾸는 커리큘럼을 고안하여 학생들 성적향상에 효과를 봤던 기억이 있다.

인간이 동물과 구분되는 점이 있다면, ‘호모 메모리스’로서, 부단히 빠져나가는 기억의 모래를 움켜쥐며 다음 시간대로 끌어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기억술을 토대로 인간은 일상생활을 영위하며 사회를 이루고, 역사와 문화를 축적하여 기술과 학문 발전을 이루었다. 개인의 몸에만 저장되던 기억은 말로서 구전(口傳)되다가 문자로, 활자로, 20세기에 들어서는 전자 대중매체를 통해서 타인과 공유하고 후세대에 넘겨줄 수 있는 기억으로 무게중심이 옮겨갔다. 어느덧 우리는 뇌뿐만 아니라 다양한 매체로 자신의 기억을 남기고 타인의 기억을 읽을 수 있다.

새삼 놀라울 것도 없지만 조경을 비롯한 환경 설계 분야에도 기억의 전승 작업과 관련한 지분이 있다. 바로 ‘장소’에 기억을 담는 설계 작업이다. 피에르 노라가 『기억의 장소』에서 역사책 속 죽은 자들에 대한 건조한 담론을 넘어 살아있는 자들의 기억을 발굴하자고 주장한 이래로, 장소가 가지는 기억 매체로서의 가능성이 지속해서 논의되었다. 국내 조경계에도 설계로 장소의 기억을 구현한 사례들이 이어졌는데, 선유도공원이나 경의선숲길 같은 포스트 인더스트리얼 파크가 대표적이다.

언제부턴가 땅의 맥락을 읽는 작업은 대학과 설계사무소에서 약방의 감초처럼 교과서적으로 수행되고 있다. 그러나 기억 재현을 표방한 장소라고 해서 모두가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진 않는다. 게다가 기억을 매개로 공간의 장소성을 살려야 한다는 주장에는 반론을 제기하기조차 쉽지 않다. 조경계에서 장소 기억 설계가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장소 설계에서 땅의 기억을 기계적으로 살려내는 것은 언제나 바람직한가? 왜 어떤 장소 기억 설계는 성공적이고 어떤 장소 기억 설계는 성공적이지 않을까?

장소 기억 설계가 칸트식의 정언명령이 되어버린 오늘날 조경계에 다소 불경스러운 질문일지 모르겠지만, 당연함의 풍토에 던져진 의문의 돌을 자양분 삼을 수 있는 생명력을 가진 것 또한 조경계다. 고로 이 논의의 끝에 닿고자 하는 바는 장소 기억 설계의 전복(顚覆)이 아닌 담론의 회복이다.

고대부터 망각이 결함이나 손실로 여겨진데 반해, 기억은 무엇인가를 잊지 않는 좋은 능력, 개체와 공동체의 생존기술이었다. 인간이 레테의 강을 지나며 잊었던 기억 속 이데아를 현상세계의 모범으로 본 플라톤의 사상은 서양 철학에 깊게 뿌린 내린 기억-긍정을 엿볼 수 있다. 하긴, 고대 그리스와 대서양 너머로 갈 필요도 없이 우리에겐 입버릇처럼 오르내리는 망각-부정의 경구가 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란 없다.’ 비록 출처는 불분명하지만, 망각이 미래의 삭제로 연결된다는 우리 사회 통념의 기저를 엿보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과거를 기억할 때 부여되는 긍정적 속성은 이미 일어난 일을 바탕으로 현재와 미래를 살아갈 지혜를 준다는 점에서 정당화된다. 특히 집단의 틀 속에서 이루어지며 사회적 상호작용을 거치는 ‘집단기억’은 공적 공간을 다루는 조경 및 환경 설계 분야에서 매력적인 활용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장소의 옛 쓰임을 드러내는 물성의 보전과 전시의 학습 기능, 그 외에도 기억의 장소는 이용자에게 숭고나 노스탤지어와 같은 독특한 미적 경험을 선사할 수 있다는 것은 수차례 논의된 바 있다.

그런데 인간은 기억하는 존재이면서도 망각의 동물이라는 카테고리에 속해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동물의 삶이 보여주듯 기억 없이 살아가는 것,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은 가능하지만 망각 없이 산다는 것은 전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니체의 말은 퍽 의미심장하다. 그는 한 번 존재한 것에 대한 기억이 이상적이고 모범적이며 절대적인 과거로서 현재의 실존에 부담을 요구하는 경우, 건강한 삶과 문화를 방해한다고 보았다. 망각은 이미 일어난 사실을 저장하지 못하는 ‘수동적 결함’이 아니라 현재 삶의 균형을 위해 ‘저지하고 제어하는 힘’으로 여겨져야 마땅하다는 주장이다. 잘 기억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잘 잊는 것이라는 양가적 가치의 균형은 우리네 장소 기억 설계에서 얼마만큼 구현되고 있는지 의문이다.

구체적인 사례에 앞서, 기억이 단순한 보관능력, 과거 경험의 순수한 재현이나 이미 일어난 절대적 사실을 오차 없이 담아내는 작업이라는 통념을 내려놓을 필요가 있다. 최근 인지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개인의 기억은 오(誤)기억이라는 일반적 현상(이를테면 작화confabulation, 출처 혼동source confusion, 상상 팽창imagination inflation 등)에서 볼 수 있듯, 창조적이고 적극적인 ‘구성적’ 능력에 가깝다. 사회적 측면에서도 셀비는 기억을 재현한 장소는 의도적으로 구성된 것이며 타협된 과거를 공간에 담아낸 것이라 보았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기억하고 장소에 기억을 담는 일은 그런 의미에서 기계적 수용이 아니다. 이는 오히려 의도를 갖고 선별하여 택하는 작업이기에, 공간에 켜켜이 쌓인 기억 중 어떤 기억을 남길지, 어떤 기억은 잊게 할지 판단할 책무가 설계가에게 새로이 부여된다. 니체의 지혜를 재차 빌려온다면, 공간에서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잊게 하느냐의 판단 기준은 과거의 오차 없는 재현이 아닌 ‘그렇게 하는 것이 현재의 삶에 이로운가, 해로운가’가 되어야 함은 더할 나위가 없다.

사실 기억의 장소와 달리 망각의 장소는 떠올리기조차 쉽지 않다. 잊었음을 떠올리는 일은 그 자체로 모순을 함의하기 때문일까. 그래도 거칠게 분류해보면 장소 망각 설계는 대상지의 기억을 연상하지도 못하게 배제하는 방식과 이전의 기억을 환기시킨 뒤 새로운 기억을 선택하여 덮는 방식으로 나눌 수 있다. 전자가 근대 산업화 시대의 수동적 망각이라면 후자는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에 수행할 수 있는 능동적이고 창조적인 망각이다.

우리 조경 설계에서 능동적이고 창조적인 망각이 구현된 사례가 없을 리 없다. 당장 『한국 조경 50년을 읽는 열다섯 가지 시선』에서 소개된 사례만 봐도, 참여를 강조하는 설계기법을 도입하여 새로운 장소기억의 구축 틀을 마련한 서울숲, 쓰레기 산을 생명이 숨 쉬는 땅으로 바꾼 하늘공원 등이 그렇다. 그중 단연 백미는 현재 시점에서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선유봉의 기억을 과감히 배제하고, 정수장의 기억을 부상시키는 한편, 시간의 정원과 녹색기둥의 정원을 통해 두께감 있는 시간의 층위 경험을 새로운 기억으로 채택한 선유도공원이 아닐까. 재차 말하지만 우리에겐 수준 높은 망각의 장소가 없는 게 아니다. 망각의 장소를 말할 수 없는 장소 기억 설계의 관습, 거대 담론에 맞설 전략의 부재와 설계 언어의 부재만이 있을 뿐이다.

같은 책에 소개된 영등포공원과 담금솥 조형물, 매화공원과 유리조형물은 경물로 장소성을 드러낸 사례이다. 앞서 배정한은 점적인 오브제로 공장의 기억과 그 속의 삶의 역사를 담으려는 시도는 ‘이 공장은 OO공장이었다는 식의 안내판을 세워놓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평을 남겼다. 안내판은 과거의 쓰임새 정보를 제공하는 유용성이 있지만, 현대인의 실존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거나 미래로 이어지는 삶의 지평을 여는 일에는 도움을 줄 수 없다. 어쩌면 이들 대상지가 장소 기억 설계의 실패 사례로 언급되는 이유는 기억 재현의 미흡이 아닌 망각 전략의 실패, 현재와 미래의 족적으로 남을 새로운 기억을 제시하지 못한데 있는 게 아닐까 한다.

기억은 과거 사실을 수동적으로 떠올리기보다는 이 시대가 수긍할 수 있는 가치를 선택적으로 재구축하는 일이다. 그러니 장소 기억 설계에서 회상과 망각은 능력과 무능력의 척도로 볼 수 없다. 오히려 설계가와 이용자가 장소를 대하는 양 날개, 좋은 장소 만들기라는 목표로 비상하는 데 쓰일 좌익과 우익의 균형적 합작이다.

본 글에서 필자는 장소 설계에서 망각에 부여된 부정적 속성을 해방하려는 목적 아래, 니체의 망각 개념을 활용해 장소 기억 설계에 새로운 해석을 제안하였다. 아쉽게도 환경과 조경 분야에서 긍정적 망각 개념이 수용되기에는 넘어야 할 봉우리가 많다. 우선 장소 망각은 계획가와 설계가들에게 민감하기 그지없는 ‘장소 상실’ 담론을 극복해야 한다. 또한 개인기억과 집단기억은 성질이 다른데 개인 수준에서 논의되는 니체의 망각 개념을 집단기억 수준의 장소 설계에 일대일 대응시키는 건 비약일 수 있다. 아울러 손은신이 논의했듯이, 장소는 외부적 기억 매체로, 기억이 저장되는 매체와 기억하는 주체가 분리되어 있다. 즉 감상자는 방문이라는 매개행위로 기억을 떠올리기 때문에 대상과 자유롭게 거리조절을 하는 특징이 있는데, 이는 장소 망각 설계의 당위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러나 설계가가 의도하든 그렇지 않든, 망각의 장소는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창조되고 있다. 익숙한 김춘수 시의 한 구절처럼,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적어도 과거의 것을 변형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상처를 치유하고 상실한 것을 새로 보충하는, ‘조형력’ 있는 우수한 조경 공간을 부를 언어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장소 기억 설계의 지평이 뻗어 나가 회상과 망각을 자유로이 넘나드는 풍부한 조경 담론이 형성되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_ 이성진  ·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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