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선을 통해 보는 조경, ‘땅에 쓰는 시’가 가진 메시지

공간과 사람을 연결하는 국내 1세대 조경가의 이야기, 4월 17일 개봉
라펜트l전지은 기자l기사입력2024-04-03

‘땅에 쓰는 시’ 기자간담회가 2일(화) CGV 용산아이파크몰에서 열렸다. 왼쪽부터 정다운 감독, 정영선 조경가, 김종신 프로듀서 


1세대 조경가 정영선의 작품과 철학을 담은 영화, ‘땅에 쓰는 시’가 4월 17일 개봉을 앞두고 있다. ‘땅에 쓰는 시’는 정영선 조경가가 가진 조경에 대한 철학으로, 그의 표현이 그대로 제목이 됐다. 이 영화가 담고 있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땅에 쓰는 시’ 기자간담회가 2일(화) CGV 용산아이파크몰에서 열렸다. 간담회에서는 정영선 조경가, 정다운 감독, 김종신 프로듀서가 함께 영화의 시작부터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에 대한 이야기들이 오고갔다.


‘땅에 쓰는 시’를 감상하기 전, 영화가 어떠한 내용을 담고 있는지에 대해 키워드로 알아보자.



#정영선


정영선 조경가는 1973년 처음 설립된 서울대 환경대학원 조경학과 1기 졸업생이자 한국 1호 국토개발기술사(조경)을 획특한 최초의 여성기술사이다. 1984년 서울시에서 조경설계사무소와 정식으로 맺은 첫 번째 설계 계약으로 알려진 ‘아시아선수촌 아파트’, ‘아시아공원’, ‘예술의 전당’ 설계공모를 시작으로 ‘여의도 샛강생태공원(1997)’, ‘선유도공원(2002)’, ‘서울 아산병원(2007)’, ‘오설록 티 뮤지엄(2011)’, ‘경춘선숲길(2016)’, ‘북촌 설화수의 집(2021)’, ‘성수 디올(2022)’ 등 모두에게 친숙한 랜드마크, 핫플레이스까지 다영한 공간을 탄생시켰다. 2023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조경계 최고영예상이라 불리는 IFLA 제프리 젤리코상을 수상하며 국제적 위상을 다시 한 번 입증했다.


정영선 조경가



#사계절의 시간성


영화는 정영선 조경가의 손을 거쳐 탄생한 아름다운 조경공간의 사계절을 엿볼 수 있다. 야생화가 만개한 정영선 조경가의 앞마당부터 남녀노소 모두가 즐기는 대규모 공원, 신비로움을 간직한 개인정원까지 다양한 장소를 종횡무진 누비며 계절이 지닌 고유한 경치를 온전히 담아낸다.


특히 그의 철학을 대표하는 선유도공원과 한국의 들녘을 고스란히 옮겨 놓은 듯한 그녀의 양평 정원을 중심으로 기존의 경관을 바탕으로 새롭게 창조해낸 또 하나의 자연을 화면 위에 되살렸다. 사라져가는 사계절의 풍미를 만끽할 수 있는 경험, 풍류를 즐기는 듯한 황홀한 드론 촬영과 생명력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클로즈업 등 다양한 촬영기법을 통해 자연이 선사하는 심미적 즐거움을 극대화했다.


정다운 감독은 “조경가는 삶 속에서 자연의 요소와 사람들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고 있기에 ‘자연의 계절적 변화’라는 기본 특질을 담는 것은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부분이었다”고 설명하며, 각 공간이 매 순간 간직하고 있는 풍경의 디테일을 표현하는데 주안점을 두었다고 밝혔다.


아울러 “정영선 조경가의 작품 세계를 표현하는데 있어 사계절의 시간성이 기본 코드였고, 어떠한 공간을 어느 계절에 찍어야 하는지에 대한 기본 콘셉트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서 선생님(정영선)을 만날 수 있는 순간에 ‘어느 현장에 가자’로 말씀하시기도 했다. 그 시간에 그 장소에 가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더라. 선생님과 시간을 보내면서 저희에게 다큐멘터리적인 순간이 찾아왔고, 그러한 방식으로 작업이 이루어졌다”고 설명했다.


정영선 조경가는 “시간과 계절이라는 개념은 조경에서 굉장히 중요한 요소이다. 새벽이 다르고, 이른 아침이 다르고, 오전이 다르고, 오후가 다르고, 낮이 다르고 밤이 다르다. 사람들은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자연을 보면서 감동을 받는다. 어떤 순간에 보더라도 자연에 대한 감격을 가질 수 있는 것. 모든 순간에 자연과 대화할 수 있도록 하는 도구로서의 조경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싹이 트면 예쁘다고 말하고, 꽃이 지면 불쌍하다고 말하고, 그렇게 대화하며 하루를, 한 달을, 계절을 보낸다면 우리가 자연을 다스린다는 태도 대신 자연과 더불어 사는 정신, 자연을 존중하는 입장으로 갈 수 있다. 그렇다면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연을 사랑스러운 눈으로 볼 수 있게끔 하는 것이 조경가의 사명이 될 것이다.”



#미나리아재비


시골에는 미나리아재비가 많이 피어있고, 소설 ‘빨강머리 앤’에도 미나리아재리 밭에 대한 묘사가 등장한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알고 있던 미나리아재비는 정영선 조경가가 서울대 재학 당시, 학교 숲에 매일 나가면서 보던 식물이다. 그러나 흔히 볼 수 있던 미나리아재비를 이제는 잘 찾아볼 수가 없다. 정영선 조경가는 사라지는 꽃들에 대해 안타까움을 느끼며 조경공간에 가능하면 외래종 대신 우리 식물을 많이 쓰자는 마음이 들었다고. 그렇게 미나리아재비는 정영선 조경가에게 ‘초심’을 떠올리는 식물이 됐다.


우리 국토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미나리아재비, 개쑥부쟁이를 비롯한 야생화들은 한국적 경관의 현대적 완성을 빚어낸 조경가 정영선의 자연스럽고 감각적인 풍경을 담아낸다. 삼국유사 속 ‘검이불루 화이불치’, 소박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은 우리의 전통 미학을 뿌리를 둔 그녀의 철학이다. 땅이 간직한 고유한 맥락을 읽어 시를 그리듯 공간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정다운 감독



#조경


정다운 감독의 전작 ‘이타미 준의 바다’, ‘위대한 계약: 파주, 책, 도시’는 건축과 공간을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영화를 통해 탐구하는 스타일의 작품이었다. 이후 감독은 ‘땅에 쓰는 시’를 통해 “건축과 도시를 자연과의 관계성 안에서 탐구하는 과정을 거치며 그 사이를 연결하는 ‘조경’의 중요성을 자연스레 인지하게 됐다”고 한다.


“사람들은 건축이라는 커다란 규모, 강렬한 디자인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사실은 자연과 공간의 관계성 안에서 더 좋은 공간이 되는 것이다. ‘조경’이라는 분야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싶었다. 자연의 힘을 믿고, 스스로가 자연에서 큰 힘을 얻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땅에 쓰는 시’는 정다운 감독의 개인적인 경험으로부터 출발한다. “어렸을 때부터 시골에서 자랐지만 도시로 이주하며 자연이 다른 세계에 떨어진 기분이었는데, 그런 저를 잘 지켜줬던 것이 양재천, 예술의전당, 선유도공원이었다”고 말하는 정다운 감독은 감독 개인의 인생 속 중요한 공간을 탄생시킨 것이 정영선 조경가라는 것을 알게 됐을 때는 운명과도 같음을 느꼈다고 한다.


정다운 감독이 오랫동안 품고 있던 질문인 자연의 복원과 치유에 대한 희망을 ‘조경’으로 풀어나갈 수 있다는 확신이 영화의 시작이었다. 그는 영화를 통해 땅을 향한 진심이 담긴 정영선 조경가의 공간들이 우리가 꿈꾸는 내일을 향한 해답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암시를 넌지시 전한다.


“조경가는 삶에 숨 쉴 공간을 만들어준다. 도시든 시골이든 그곳의 경관이 있고, 그 경관을 공간과 연결한다. 그리고 결국에는 생명으로 연결시킨다. 인간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 본인의 스타일을 내세우기보다 그곳을 이용하는 사람들을 위한 자세로 접근한다. 영화 작업 내내 굉장히 많은 감동을 받았다. 조경가는 저희에게 굉장히 소중한 존재이다”


간담회에서는 정영선 조경가의 조경 이야기들도 들을 수 있었다.


“조경이라는 것은 잔디 심고, 나무 심고, 꽃 심는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 국토는 그 자체가 굉장히 아름다운 하나의 정원이다. 지금은 국토가 난개발되어 엉망이 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경은 우리나라 경관을 잘 보존하고 잘 가꾸는 것에 초점을 둔다”


“조경은 주변 경관과 맞아야 한다. 어떤 위치에 어떤 건축물이 어떤 나무에 기대어 있는지, 물이 흐르는지, 산이 어떻게 보이는지 등 원경 근경 중경을 전부 고려하며 공간을 조성하는데, 이는 선조들이 가장 중요시했던 ‘차경’, 주변 경관을 바라보는 정신에서 비롯된다. 우리나라 경관이 풍부하고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우리의 기본 정신은 자연을 바라보며 무엇을 느낄 것인가, 어떠한 시를 읊고, 어떠한 도를 닦을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이었지, 공간을 예쁘게 만든다는 개념은 아니었다. 이 정신을 전파 시키자는 것이 저의 생각이었다”


“조경은 건축을 예쁘게 장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조경가는 건축가와 잘 지내야 한다. 건축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건축가의 뜻을 살리고자 노력하는 태도를 취했다. 국토개발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토목, 건축분야와 소통하며 처음부터 같이 이야기하고 호흡을 맞춰오며 최대한 우리 경관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했다. 조경은 혼자 하는 직업이 아니다. 여러 분야의 전문가와 일꾼들이 지혜를 모으고 힘을 다해야 완성된다. 협력과 조화, 그리고 무엇보다 땅을 아끼고 사랑하는 심성이 필요하다”



#미래세대를 위한 연서


“조경가의 역할은 우리가 간직하고 있는 기존의 것을 더욱 아름답게 번영시켜 자손에게 물려주는 것”


조경가 정영선의 조경 철학 중 미래세대에 대한 키워드를 빼놓을 수 없다. 더 큰 맥락과 먼 시간을 고려할 줄 아는 자세, 땅이 겪은 모든 역사를 머금은 채 건강하고 아름답게 미래세대에게 물려주는 것. 이것은 조경가이자 한 사람의 어른으로서의 정영선이 오랜 시간 소망해온 마지막 과제이다.


영화의 시작과 끝에 등장하는 우리 땅을 즐기고 가꾸는 아이들의 모습이 바로 이러한 철학을 대변한다.


“정원을 만드는 것은 단순히 꽃을 심고 나무를 기르는 것이 아니라 치유와 회복의 장이자 자연을 보살피고 서로 소통하는 장을 만드는 것”이라 말하는 정영선 조경가는 터가 가지고 있는 특성과 정신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공간, 사람, 자연의 관계를 읽어내는데 집중해왔다. 이러한 작품관을 바탕으로 자연과 경계를 구분하지 않은 한국 경관과 가장 잘 어울리는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완성시켜왔다.


영화는 자연이 간직하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존중해온 정영선 조경가의 자세를 통해 관객 스스로 돌아보게 하고, 벌과 나비가 사라져가는 오늘날, 미래세대를 위한 땅의 모습을 고민하게 만든다. 결국, 우리가 서 있는 이 땅은 모두가 함께 가꾸고 매만져야 하는 하나의 거대한 정원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정다운 감독은 “조경은 특정한 순간이 아닌 거시적 관점의 ‘미래’를 바라보는 직업이라는 점에서 더욱 가치있고 매력적이다. ‘땅에 쓰는 시’는 미래세대를 위한 연서이다. 정영선 조경가의 철학을, 그리고 아름다운 경관을 미래세대에게 전달하고 싶다”고 전했다.


경춘선숲길은 철길 근처에 살며 소음에 괴로워했던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자 ‘길’이기에 화려한 이벤트 장소가 아닌 ‘걷는 공간’이 됐으면 한다는 정영선 조경가의 마음이 담겨있다.


“서양의 철학자들이 걸으며 사유하는 것을 중요시했듯 우리에게도 그러한 공간이 필요하다. 요즘은 사람들이 공원에서 건강을 위해 뛰기만 한다. 운동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조용히 생각하며 걷는 공간도 필요한 것이다. 경춘선숲길을 아침저녁으로 걷는 학생들이 훗날 훌륭한 철학자나 시인이 되는 것을 소망하고 있다”


정다운 감독과 정영선 조경가는 그들의 방식으로 미래세대를 위한 연서를 남긴 셈이다.


 

글·사진 _ 전지은 기자  ·  라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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