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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백년 수도서울, 도시환경의 맥을 짚어본다 ; 도시공원 체계 변천

월간 환경과조경1994169l환경과조경

한성의 도읍
풍수도참설이 풍미했던 14세기말 선조들은 지맥의 좋은 지기가 감응하여, 그것이 왕성을 기할 수 있는 즉 장풍득수할 수 있는 장소를 나라의 수도 입지로 마련하였다. 즉 북악산, 인왕산, 타락산, 남산을 내사산으로 북한산, 덕양산, 아차산 관악산을 외사산으로 하며, 동에서 서로 흐르는 한강의 물은 성밖의 동남일대를 에워싸는 형태인 산하금대형의 형승지를 길지로 택하였다, 백두대간에 의해 백두산을 부모로 출발하여 목간의 땅인 북안산 밑에 정궁인 경복궁을 배치하고, 중국의 고대로 부터 전해오는 이론서인 「주례고공기」에 의한 「좌묘우사전 조후시」의 기본적인 도시계획에 의해 성곽내의 도시계획을 마련 하였다. 

공원개념의 변화
조선시대 공원에는 왕이나 사대부를 위한 시설이 있었으며, 강무나 습사하는 곳으로 잡목을 식재했다는 기록을 통해 서양과 같은 넓은 지역을 공공의 이용보다는 국익을 위해 녹지를 관리했음을 알 수 있다.
「경국대전」에 “경복궁과 창덕궁의 주산과 내맥에는 산배 산록에 경작을 금한다, 외산인 경우에는 산배에서의 경작만을 금한다,”라고 쓰여있다. 이것은 풍수지리사상에서 나온 고려 신종때의 산천비보문제와 같이 산천의 길흉 순도를 따지게 하여, 즉 주산 내맥의 산에는 산배, 산록 일체의 경작을 금하고 외부에는 산배만 경작을 금한다는 것이다, 또 군사적인 목적이나 연료의 공급을 위해 송목금벌정책을 세우고 입표금표를 세워 녹지를 보호한 기록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이 20세기초부터 변화하기 시작하여, 1934년에 조선시가지 계획에 경성부 공원계획에 의한 공원의 정의를 보면 “시민의휴양 · 오락 · 아동의 교육또는 도시의 미관에 공하는 외에 화재등에 대해서 방화선이 되어 연소를 방지하고 또 피난처로서 필요 불가결의 시설이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특히 전쟁시에 있어서 도시의 공습은 물가피함에 다라 도시공원을 방공의 목적으로 구성함이 가장 중요한 요건으로 작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개항기~일제말의 근대공원
1930년 성안한 경성부 최초의 도시계획에 의해 계획된 도시계획공원은 경복궁, 창경국, 덕수궁을 포함한 모두 38개의 공원과 자연공원을 포함하여 총 20.28k㎡로서 전시가지 면적의 18.6%로 q인당 28.3㎡에 해당하는 공원계획이었다, 1934년 조건시가지계획령의 제정을 계기로 경성부내에 대공원 11개소, 근린공원 42개소, 소년공원 168개소, 아동공원 672개소, 도합 903개소의 공원이 계획되었으나 이것은 수치상의 계획일 뿐 실제로는 토지취득의 난점 또는 지형 등의 문제로 단지 140개소의 계획에 머물렀다.  이로서 계획구역 134k㎡에 대한 공원면적비는 10.3%이었고, 1,100,000인을 계획인구로 한 도시계획으로 1인당 공원면적은 12.6㎡에 달하였다.
이와같이 도시계획에 의한 최초의 공원은 1934년 조선총독부의 조선시가지계획령에 의거한 1940년 3월 총독부 고시 제 208호로 결정 고시된 약 1,380ha에 달한 서울의 공원들이 장기적인 계획공원이었다.

그 후 현재까지의 공원
해방 후 전쟁과 정치 등의 혼란기동안 공원계획은 임기응변적으로 국부적인 변경을 해왔으나 도시계획의 편입 및 급진적인 인구증가로 공원용지의 잠식에 대비하여 변경이 절실히 필요하게 되었다. 공원에 대한 인식부족과 관리 미숙의 문제점은 있었지만 1962년 도시계획법이 제정되어 도시계획법이 제정되어 도시계획시설로서 입법된 이후 특기할 만한 사항은 경복궁·창덕궁·덕수궁·종묘의 5개 문화재 유적지를 근린공원으로 바꾸고 새로이 묘지공원이 신설되어 동작동 국립묘지를 현충묘지공원으로 변경 고시하였다. 1968년 도시공원기본계획에서 서울의 공원녹지의 기본계통은 환상방사형을 기본형태로 하여 산포식으로 근린 및 아동공원을 배치하도록 계획하고 있다.
1970년대에는 그 동안 시대적인 혼란으로 공원용지의 침식, 도시의 팽창과 신시가지조성등으로 계획된 도시공원은 자연공원으로 북한산공원외8개소, 보통공원은 28개소, 근린공원은 47개소, 도로공원은 봉천공원, 묘지공원3개소 그 외 유원지 3개소가 되었다. 초기에 조성된 낙성대공원은 정책입안자의 의지로 강감찬 장군의 유적지를 다듬은 사적공원이었을 뿐이며, 본격적인 근린공원은 서소문공원, 도산공원과 자매도시공원이었다. 
70년대에 들어서면서 서울 컨트리클럽의 골프장부지를 기증받아서 종합대공원인 어린이 대공원(1973년)이 조성되었다. 1977년부터는 문화재 유적지의 복원을 이루면서 동적위락시설의 제공의 일환으로 서울대공원(1984년)이 경기도 과천시 청계산 기슭에 동·식묵원과 운동시설, 현대미술관(1986년), 서울랜드(1988년)가 연합해서 기본계획이 이루어져 도시민의 문화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기에 흡족한 시설이 제공되었다.
서울의 도시계획의 변경과 확충 그에 따른 인구 이동의 결과로 강북의 학교가 강남으로 이전됨에 따라 그 이전지를 공원으로 조성한 예로 신문로 서울고등학교 자리에 경희궁공원(1986년), 양정고등학교 자리에 손기정공원(1990년)이, 또 공군사관학고 이전지에는 보라매공원(1986년)이 조성되었다. 서대문 구치소 이전지에 서대문 독립공원(1992)과 생태적인 환경조성을 위한 용산가족공원(1993년)은 도시민의 새로운 여가행태를 야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 키워드 : 도시공원, 도시변화, 역사, 도시역사, 도시변화역사, 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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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기수  ·  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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