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시선] 조경, 다른 이름을 가지는 것은 어떤가?

최정민 논설위원(순천대 조경학과 교수)
라펜트l최정민 교수l기사입력2016-07-10
조경, 다른 이름을 가지는 것은 어떤가?

_최정민 교수(순천대 조경학과)


“조경을 영어와 한자로 쓰세요”. 이제 막 조경에 입문한 신입생들에게 내는 퀴즈 가운데 하나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궁금해 할 것 같지 않지만, 답은 Landscape Architecture와 造景이다. 이 둘은 ‘경관 건축’ 또는 ‘경관 조성’ 쯤으로 직역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조경’이라는 용어는 꽤 잘 지은(번역한) 이름이라는 생각이 든다.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라는 서구적 개념의 전문분야가 이 땅에 들어오면서 이름 짖기를 고민했을 조경 선배들의 유산이기도 하다. 그로부터 40년이 훌쩍 지난 지금은 익숙하고 친근한 이름이 되었다.

“고래 잡는 건가?” 조경학과에 다닌다고 하면 되돌아오던 “조경이 뭐하는 거냐?”는 류의 질문 가운데 하나였다. 고래잡이를 뜻하는 포경과 조경의 어감이 비슷해서였는지, 포경업이 조경업보다 인지도가 높았기 때문인지 모르지만, 조경을 공부하는 학생에겐 황당 그 자체였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그들은 “조경이 뭐하는 거냐”고 묻고, 우리는 설명해야 하는, 유쾌하지 않은 상황이 반복되었다.

그 후로 사회적, 환경적 변화와 함께 조경에 대한 인식은 꽤 높아졌다. 조경이 자산 가치를 높이는 데 기여한다고 인식하기 시작했다. ‘아파트 조경’은 주부들이 선호하는 최고 히트 상품이 되었다. 조경은 도시 경쟁력을 높이는 핵심 전략이기도 했고, 유력 정치가들의 입지를 강화하는 효과적인 공약이기도 했다. 여전히 “조경이 뭐하는 거냐”고 묻는 이가 있다면, 농담이거나 자신의 무지에 대한 고백일 뿐이었다. 조경에 대한 인식이 달라진 것은 분명해 보였다. 

“조경학과 교수가 이런 걸해요?” 농촌마을 활성화 계획을 주관하는 자치단체 장에게 명함을 건네자 돌아온 질문이다. 아주 최근 일이다. 이젠 하지 않아도 될 줄 알았던 유쾌하지 않은 설명을 다시 해야만 했다.

“조경은 정원법(수목원·정원의 조성 및 진흥에 관한 법률)을 반대했잖아요?” 정원의 진흥을 추진하는 기관이 조경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이유다. 정원을 사랑한다는 그들의 관심은, 공원과 정원을 구분하고, 정원과 조경을 나누는 데 열심이다. 현대조경의 모태가 정원이고, 퍼블릭 가든이 공원이라는 실제는 외눈박이 세상에 양눈박이 신세 같다. 그들의 관심은 조경의 영역 한정에 있는 것만 같다.

“랜드스케이프 건축”, “경관 건축”, “조경 건축”, 건축 잡지나 건축가들이 애용하는 Landscape Architecture의 번역이다. 그들은 우리의 조경이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라는 의미를 전달하는 데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같은 이유로 랜드스케이프 아키텍트는 조경가라고 하지 않는다. 이런 인식이 ‘마포 석유비축기지 공원화 설계공모(2014)’나 ‘서울역 고가도로 공원화 설계공모(2015)’ 같은 ‘건축과 조경의 혼성’이라고 칭하는 프로젝트에서 조경을 배제하거나 들러리 수준으로 전락시키는 배경인 것도 같다.  

조경이 지금까지 적지 않은 일을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조경이라는 이름이 외면 받는 것은, 조경이라는 번역이, 조경이라는 어감이 좋지 않아서는 아니다. 동시대의 대중들이, 의사결정자들이, 인접분야의 전문가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를 조경가들이 정확하게 읽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잉여의 극대화를 추구하면서도 조경이 사회적 메시지를 제시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조경이 여러 곳에서 수세에 몰리고 있는 상황을 목격한다. 건축물과 결부된 공원은 건축에게, 가로시설물은 디자인 분야에게, 정원은 자칭 정원 작가에게, 경관계획은 도시 분야에게, 어린이놀이터는 자칭 놀이 전문가에게, 농촌 계획은 관광 분야에게. 자칭 공원 전문가가 나타난다면, 공원은 그에게 내주어야 할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 대해 “잘하는 사람이 하면 된다”고 쿨 하게 반응하기도 한다. 물론이다. 그러나 문제는 더 열정 있고, 더 잘하고, 잘할 수 있는 사람이 참여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 단지 ‘조경’이라는 이유로. 그들의 인식이 조경이 하는 일을 제한하고 있다.

그들이 생각하는 ‘조경’과 우리가 아는 ‘조경’이 같아지기 위해 우리는 조경을 끊임없이 설명하고 통역해야 할까? 그들이 아는 조경과 우리가 아는 조경이 같아지기를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할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조경이, 조경이 하는 일이, 조경하는 사람들이 전문성을 인정받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지 않을까. 자신이 인정받기 어려운 사회적 위치를 알고 뛰어들 조경 새내기들이 얼마나 될까. 그렇다면 조경이 다른 이름을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조경 스스로 조경에 대한 인식을 바꾸기 어려운 것처럼, 조경이라는 이름을 바꾸는 것 또한 쉽지 않다. 언어는 일단 정해지고 나면 마음대로 바꿀 수 없는 사회적 약속이기 때문이다. 조경이라는 이름을 바꾸는 논의를 마치 조강지처를 버리는, 지조없는 행동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조경의 생산 소비에는 동시대 대중들의 욕망과 그 대중들이 속해 있는 사회집단의 힘이 스며들어 있다. 현실세계와 가상세계를 동시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실용과 허세라는 양면을 동시에 가진 우리에게, 자본과 명예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우리에게, 조경을 한다는 것은 이미 조경 아닌 것과 간통하는 것 아닌가. 조경이라는 이름에 대한 고민이 지조의 문제일 수 없는 것이다. 

언어는 사회적 약속인 동시에 창조성이 있다. 새로운 생각이나 상황에 맞게 언어는 만들어진다. 이를 통해 국면 전환을 시도하는 사례가 많다. 조경학과들이 많이 속해있는 생명과학대학, 생명산업과학대학, 생명환경과학대학 등이 대표적이다. 시대 상황에 맞게 농대의 이름을 바꾼 경우다. 여전히 농대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이름이 두 가지인 셈이다. 행정 단위를 개명하는 경우도 많다. 경북 울진군 서면과 원남면은 금강송 군락지와 매화나무 단지를 부각하여 ‘금강송면’과 ‘매화면’으로 바꿨다. 경북 고령군 고령읍은 ‘대가야읍’으로 바꿨으며, 경북 포항 대보면은 해맞이로 알려진 ‘호미곶면’으로 개명했다.

이름은 자신을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다. ‘조경’이라는 이름이 ‘조경이 하는 일이나 결과물’을 대변하지 못하고, 조경이라는 이름이 조경이 하는(할 수 있는) 일을 제한하고 있다. 자식의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자식의 이름을 바꾸듯이, 앞으로 조경하는 후배들을 위해서라도 새로운 이름을 고민할 필요가 있지 않은가? 사람이 유아명이나 호를 가지듯이, 조경이 또 다른 이름을 가지는 것은 어떤가? 조경의 구성원들이 스스로의 이해관계를 초월해 허심탄회한 자세로 머리를 맞댈 필요가 있지 않은가? 이런 생각의 단초는 월간 『환경과조경』 6월호에 실린 배정한 편집주간의 에디토리얼 “조경이라는 이름”이었다.
_ 최정민 교수  ·  순천대학교 조경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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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mchoi@sc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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