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고 깨끗함을 보물로 삼아 청빈하게 살았던 보백당 김계행의 안동 만휴정(晩休亭)
[조경명사특강]이재근 교수의 ‘한국의 별서’ 24회라펜트l이재근 교수l기사입력2014-08-22
層層授急水: 층층이 급하게 내린 물이
滙處自成釜: 모여든 곳이 절로 가마소 되었네.
十丈靑如玉: 푸른 옥 같은 물이 열 길이나 되어
其中神物有: 그 가운데 신령스런 사물이 있을 듯하네.
爆淵猶或有; 폭포 밑에 연못이야 더러 있으나
盤石最看大: 바닥에 서린 바위 가장 커 보이네.
白白如磨礱: 희디 흰 것이 갈아낸 듯한데
百人可以坐: 가히 백 명은 앉을 만하네.
鑑前三釜燒: 난간 앞으로 가마소 셋이 둘러 있고
詩興翼然亭: 시적인 감흥은 정자 추녀처럼 일어나네.
爛漫花爭笑: 활짝 핀 꽃들은 저마다 웃음을 다투고
一山盡醼形: 온 산은 모두 잔치하는 형국일세.
- 김계행의 후손 김양근의 만휴정시 -
만휴정근경(강충세.2013)
만휴정 내원도 (김영환.2014): 만휴정내원도를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는 내용으로 사실적으로 그렸다.
만휴정(晩休亭)은 조선시대의 문신 김계행(金係行:1431-1517)이 만년을 보내기 위해 건립한 별서이다. 김계행은 연산군이 집정하던 시절 정사가 어지럽게 되자 벼슬을 버리고 안동으로 내려와 송천 깊숙한 곳 바윗가에 쌍청헌(雙淸軒)이란 집을 지었는데, 이곳이 지금의 만휴정 옛터이다.
김계행은 자가 취사(取斯)이고 호는 보백당(寶白堂)이다.
그는 향교에서 공부하였으며, 17세에 이천 서씨를 첫 부인으로 맞았다가 23세에 사별하고 24세 되던 해에 의령 남씨를 둘째부인으로 맞았다. 그가 묵계와 관계를 맺은 것은 30세 때의 일이다. 연보에 의하면 김계행이 30세 때 거묵에 새로운 전장(田莊)을 열었다고 하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거묵동은 안동부 길 안에 있다. 숲과 골짜기가 깊고, 물과 바위가 절승을 이룬다. 선생은 자주 그곳을 왕래하며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져서 따로 전장(田莊)을 두어 만년에 기거할 곳으로 삼았다.” 이 글은 원래 묵계가 거묵동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어졌으며, 김계행이 이곳 자연의 아름다움을 좋아하여 머물게 된 것이라는 점을 알려준다. 김계행에게 있어 묵계는 일찍부터 만년을 위해 준비된 땅이었던 것이다.
그는 32세에 성주 교수를 시작으로 관리생활을 시작하였는데, 45세에 충주 교수를 역임하면서 아들 김극인을 먼저 거묵촌에 거주하게 하였다. 이때 그의 본집은 풍산현 남쪽 불정촌에 있었다. 그는 50세에 본격적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홍문관 부제학, 대사간에까지 이른다. 그의 벼슬살이는 67세까지 계속되었지만 말년에 간신들을 탄핵하려던 시도가 훈구파에 의해 저지당하자 안동으로 낙향하였다. 한때 무오사화,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투옥되었으나 큰 화는 면하였으며, 1706년 지방유생들이 그의 덕망을 추모하여 묵계서원(默溪書院)을 짓고 향사하였다.
만휴정 본제 ( 보백당 김계행의 종택): 만휴정과 700m 거리에 만휴정의 본제인 묵계종택이 있으며, 현재 종손 김주현 선생(1930~)과 그의 아들 김정기(1954)가 관리하고 있다.
묵계서원: 보백당 김계행(金係行:1431-1517)과 응계 옥고(玉古: 1382-1436)선생을 배향하기 위해 1687년 설립되었다.
김계행은 처음에는 풍산에 본제(本第)를 두고 생활하였으나, 60대부터는 풍산과 묵촌 사이를 오가며 생활하다 노년에는 묵촌에서 주로 생활하였다. 시문, 정자중수기, 기타 문헌 등을 분석해 볼 때, 김계행은 평소 때에는 본제를 안동 풍산에 두고 이곳 묵촌의 만휴정을 왕래하였으나, 말년에는 묵촌에 본제를 두고 이곳에서 생활했던 것으로 사료된다. 연보의 63세 조에는 “이때부터 풍산과 묵촌 사이를 오가면서 즐기며 노닐었다.”라는 구절이 보이는데, 이는 김계행의 만년이 시작되면서, 벼슬살이보다는 산간에 묻혀 사는 삶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암시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시기 그의 삶은 아직 묵촌보다는 풍산 본제에 더 무게 중심이 있었고, 68세 되던 해에는 풍산의 옛 집 곁에 작은 집을 짓고 보백당이라고 편액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그가 완전히 묵계로 삶의 터를 옮긴 것은 71세 이후부터이다. 이때부터 김계행은 본제를 묵촌으로 옮기고 그곳에서의 은일생활을 즐겼다. 그러므로 현재 만휴정의 본제(本第)는 묵계서원이 있는 묵촌리 묵계종택으로 보아야 옳다.
만휴정 위치도: 만휴정의 위치를 낙동강 수계별서도에 표시하였다.
묵계종택의 별당채 보백당: “吾家無寶物 寶物惟淸白“: 내집에는 보물이 없으며, 보물 이라면 오직 맑고 깨끗함이 있을 뿐이다”라는 뜻의 별당채다.
묵계의 깊은 산골짜기 송암동 폭포위에 위치한 만휴정은 김계행의 만년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지녔던 곳임에 틀림없다.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된 정자의 전면 3칸은 삼면이 개방된 누마루형식으로 누각 주위 삼면에는 계자각 난간을 돌렸다. 양퇴칸은 온돌방을 들였는데 방의 앞부분은 일반적인 쌍여닫이 세살문을 달았다. 그리고 마루 쪽으로는 띠살 무늬의 세 짝 들이 열개문을 설치하였다.
마루영역은 가장자리로 낮은 난간을 돌렸다. 마루 위 천장 서까래 아래쪽으로는 여기저기 현판들이 걸려있다. 동쪽 방 앞에 걸려 있는 나무판에는 “持身謹愼 待人忠厚: 겸손하고 신중하게 몸을 지키고 충실하고 후하게 대하라”는 뜻의 김계행의 유훈이 쓰여 있다. 서쪽 방의 앞 나무판에 “吾家無寶物 寶物惟淸白: 내 집에는 보물이 없으며, 보물이라면 오직 맑고 깨끗함이 있을 뿐이다”라는 글씨에서는 선생의 집마루 편액(寶白堂)에서 이 뜻을 취했다는 설명이 덧붙여져 있다.
만휴정원경1
만휴정내부에서 본 차경1
만휴정 중수기(晩休亭 重修記)에 보면 만휴정(晩休亭)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다.
“묵계서원 남쪽 두 산 사이의 시냇가에 날아갈 듯이 새로 지은 정자가 있는데 바로 만휴정이다. 정자의 주인은 누구인가? 곧 대사성을 지낸 보백당이다. 일찍이 묵계의 남쪽 동천을 사랑하여 숲이 그윽하고 천석이 빼어난 곳에 별채를 지어놓고 왕래하며 시를 읊조리고 감상하였다. 이는 본인 스스로가 만년에 소요하실 계책을 삼으신 것이다. 그가 송암(松巖)에서 폭포를 구경하러 간 것은 실제 어지러운 세상에 대한 귀를 씻으려 한 것이다. 어찌 단지 경물(景物)의 아름다움에만 끌려 간 것이겠는가?”
“상류 전의곡(全義谷)에서부터 시냇가 동쪽으로 치달리며 가물가물 뻗어 내리는 굴곡이 10여리나 된다. 그러다 문득 마당만한 큰 바위가 있는데, 그 언덕이 바로 산과 시내가 만나는 곳이다. 모두 또렷하고 가지런한 모습이 마치 하얀 양탄자를 첩첩이 포개놓은 듯, 백설을 골고루 덮어놓은 듯하다. 그 사이를 빙빙 돌며 흐르는 시냇물은 악기를 연주하듯 청아한 소리를 내며 흐른다. 그 발원지에서 멀어짐에 따라 계곡은 점점 더 낮아진다. 곧 한 줄기 허공으로 떨어지는 물은 드디어 대단한 기세로 격렬하게 쏟아져 내리며 뿜어내는 것이 층층의 폭포가 되고, 그 떨어지는 곳에 깊은 못 셋을 만들었다. 흔히 깊은 못을 가마솥이라 하는데 모양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물의 깊고 얕음은 또한 가마솥의 크고 작은데 따른 것이다. 비온 뒤 가득한 날 그 경치는 알만하지 않겠는가? 또 저절로 이루어진 편편한 바위가 있는데 수백 명이 앉을 수 있을 정도로 넓다.”
송암폭포 원경(강충세.2013): 계류하부에서 본 송암폭포의 모습
만휴정 상류 가마솥 계담.(강충세.2013)
김계행이 정자를 세운 곳은 이 중 세 번째 못 위인데, 시내와 산이 어울려 하나의 별천지를 이루는 곳이다. 이후 정자의 이름을 만휴정(晩休亭)이라 하였으니, 당시 선생의 맑고 깨끗한 경지를 상상할 수 있다. 이는 휴관만퇴좌(休官晩退坐: 관직을 그만두고 저녁에 물러나 앉았다)라고 했는데, 여기에서 만(晩)과 휴(休)를 따 온 것으로 추정된다. “지극한 즐거움을 산수에 부치고, 행함과 그침은 천기(天機)에 따르며, 세상 밖에서 노닐며 세상사를 뜬 구름같이 가볍게 보았다”는 보백당의 맑고 깨끗한 경지를 상상 할 수 있는 용어인 것이다. 또한 김양근의 만휴정 노래 3편과 만휴정 판상현판은 만휴정이 작정자 김계행은 물론 묵객들의 안식처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휴정내원마당
만휴정과 쌍청헌 현판
만휴정의 주변에는 동쪽으로 계명산(鷄鳴山: 530m)아래를 흐르는 길안천(吉安川)이 있으며, 북쪽으로는 묵계서원(默溪書院)과 묵계종택(默溪宗宅)이, 남쪽으로는 임봉산(682m), 황학산(黃鶴山: 782m)이 위치해 있다.
만휴정 외원도(김영환. 2014): 만휴정 주변의 외원도를 진경산수화기법으로 그렸다.
만휴정에 들어가려면 우선 계곡을 건너야 한다. 만휴정에서 길까지는 좁은 다리가 가설되어있다. 만휴정은 적절하게 공간이 차단되어 있는데, 앞쪽에 담이 나지막해서 더욱 좋다. 담이 높을 경우 오히려 심리적으로 계곡과 차단되기 때문에 트여있는 것이 오히려 아늑한 느낌을 준다.
만휴정에 앉아 경관을 바라보면 물길이 흘러가는 모습과 그 앞쪽 산자락의 중간쯤을 정면으로 볼 수 있다. 이때 감상자의 시선은 길의 흐름, 산허리의 흐름과 직각으로 만나게 되고, 앞쪽 산허리의 흐름을 따라 만들어져 있는 소로와도 90도의 각도로 교차하게 된다. 위쪽에서는 계곡의 물이 너럭바위의 사면을 타고 내려와 이룬 소와 그것이 또 태극의 형상을 지으며 짧은 유영을 한 끝에 아래쪽에 만들어 놓은 소로 내려간다. 이때 굉음을 발하면서 떨어지는 폭포는 가히 장관이다.
만휴정내부에서 본 차경2(강충세.2013)
만휴정은 커다랗고 둥그런 바위를 등에 지고 물길로부터 조금 안쪽으로 움푹 패여 들어간 공지 안에 서 있다. 만휴정이 등지고 있는 바위의 아래쪽은 상당한 단층면을 이루고 있으나 위쪽은 밋밋한 곡선을 드러내고 있고, 그 위에 여기저기 소나무들이 뿌리내리고 있다.
만휴정 정자에서 바라보이는 계곡의 깨끗한 바위와“寶白堂晩休亭泉石“이라고 쓴 암각, 청렴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시문, 깨끗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가훈 등은 김계행의 청백리사상을 시대적 교훈으로 나타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에 비추어볼 때 이곳은 작정자가 은일하며 자연으로 돌아가 안빈낙도(安貧樂道)하던 장소로, 별서명승으로서의 가치가 크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만휴정은 버스에서 내려 걸어가는데 700m 거리에 있다. 고요한 산길을 고즈넉이 걷다보면 불현듯 나타나는 것은 높이 24m의 위용을 자랑하며 떨어지는 송암 폭포다. 봄가을에도 물이 마르지 않아 아름답지만 여름에는 물량이 많아서 더욱 장관을 연출한다. 이 장소는 2008년에 영화 “미인도”, 2011년에는 KBS에서 “공주의 남자”를 촬영한 배경이 되어 더욱 유명해졌다. 한여름에는 백일홍이 흐드러지게 피어 그윽한 정취를 자극하기도 한다.
계류상류에서 본 만휴정(강충세.2013)
후원쪽에서 본 만휴정원경2(강충세.2013)
최근 만휴정 건물은 목재의 부식이 많아 건축물을 해체 수리하는 과정에 있다.
차제에 본제와 묵계서원, 묵계종택, 들어오는 입구의 주차장이나 안내표식판, 담장의 정비와 담장주변의 수목식재 보완 등이 이루어져 명승으로서 부족함이 없도록 해야겠다. 그리고 묵계리 만휴정의 본제인 묵계종택과 묵계서원, 그리고 만휴정을 국민정신계승과 별서명승 패키지로 묶어 홍보함으로써 지역의 브랜드 가치를 높혀 나가야 할 것으로 사료된다.
- 연재필자 _ 이재근 교수 · 상명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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