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하게 길을 건너고 싶다

[조경명사특강]임승빈 교수의 도시사용설명서_1회
라펜트l기사입력2013-01-06

 

인류는 석기시대, 수렵시대 이후 농업혁명을 통하여 비로소 정착생활을 시작하였으며, 16세기 기계의 발달과 더불어 시작된 산업혁명 이후 노동자들이 도시로 모이면서 도시의 발달이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2012년 현재 전 세계 인구의 50% 정도가 도시에 살고 있다. 우리나라는 도시거주인구가 1970년대 50%에서 2011 90%를 넘어 도시화가 급속하게 진행되어 선진국 중에서도 도시거주 인구율이 매우 높은 편이다.

 

국민 90% 이상의 대다수가 도시에 거주하고 있다고 하는데 과연 우리는 도시에 대해 잘 알고, 효율적으로 이용하고 있는가? 많은 사람들이 생()의 대부분을 도시에서 보내고 있는데 도시를 조금만 더 이해하고 관심을 갖는다면 한결 효율적으로 도시생활을 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편리하고 아름다운 도시를 만드는데 기여할 수 있다.

 

도시의 작동원리, 도시사용법, 도시 즐기는 방법을 알고 있으면 도시 사용 중 불편하거나 합리적이지 못한 점이 생기더라도 그냥 불평만 하는 것이 아니고 문제의 원인과 가능한 해결방안까지 제안할 수 있게 되어 더 좋은 도시를 만들어 갈 수 있다. 이른바 하향식이 아닌 상향식 도시관리가 가능해져 시민이 단순한 거주자가 아닌 도시의 주인이 될 수 있다. 더 나아가 프로슈밍(Prosuming) 도시, 즉 우리가 도시를 만들고 우리가 도시를 소비하는 새로운 의미의 자급자족 도시를 만들 수 있다.

 

도시의 경관은 사람이 도시를 지각하는 일차적 매개체이다. 도시경관을 통하여 사람들은 도시와 대화하고, 도시 활동을 위한 정보를 얻게 되며, 도시의 장소성을 느낀다. 도시경관은 단순한 경치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도시인들의 생활의 장이며, 손때가 묻어있는 역사인 동시에 미래 도시인을 만들어가는 하나의 틀이 된다.

 

이제 도시경관을 도시인, 즉 사람의 관점에서 바라보며 문제점을 찾고, 사람중심의 도시가 되기 위한 방향을 함께 모색하고자 한다.

 

경관에 몰입되어 경관과 내가 하나가 될 때 진정한 경관의 모습이 드러난다. 자연경관에서는 이러한 몰입을 경험할 기회가 있겠으나, 과연 도시경관에서도 이러한 자아몰입이 일어날 수 있을까?  나 자신이 도시의 모습과 혼연일체가 되어 도시의 진정한 모습과 의미를 경험할 수는 없을까? 이번 연재를 통하여 사람과 도시가 하나 되는 혼연일체의 도시경관을 만들기 위한 하나의 초석을 놓고자 한다.

 

1회_도시의 길: 편하게 길을 건너고 싶다

 

길은 인류가 지구상에 존재하기 시작할 때부터 세상과 소통하는 수단이 되어왔다. 인류는 길을 통하여 자연과 접하고, 생존을 위한 사냥감을 찾아 나섰다. 또한 현대인은 길을 통하여 도시의 여러 곳을 경험하고 일상을 살아나간다. 숲 속 오솔길, 해변의 백사장, 골목을 감아도는 돌담길은 언제 보아도 걷고 싶어진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나라 도시인들은 도시에서 과연 걷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는가?

 

우리가 경관을 볼 때는 심리학자인 깁슨(Gibson))이 말한 경관의 행태적 지원성(Affordance)을 우선적으로 지각하게 된다. 즉 길을 보면어디론가 갈 수 있다라는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매력적 경관일 경우에는가고 싶다혹은 걷고 싶다라는 생각이 저절로 나게 된다. 자연경관에서는 이러한 경험을 쉽게 할 수 있지만 도시경관에서는 흔치 않은 경험이다. 도시에서 걷고 싶은 마음이 우러나오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남아공 케이프타운 해변

 


남아공 스텔렌보쉬 와인농장입구



제주도 함덕 해수욕장(좌), 아산 외암리 민속마을 돌담길(우)

 

걷고싶은 길은 걷기 편안하고 매력적인 경관을 가진다. 이 두 가지 원칙은 도시에도 적용된다.

 

길과 도로의 주인은 태초부터 사람(보행자)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차량이 주인공 행세를 하고 보행자를 좁은 보도로 몰아냈다. 대다수 보행자들도 다소 불편하게 느끼고는 있으나, 의례 그래야 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돌이켜보면 자동차가 등장한 초기에는 자동차가 사람을 피해 다녀야 했다. 그런데 자동차가 많아져 보도와 차도를 분리하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차도가 도로가운데 그리고 보도가 차도의 양 옆에 위치하다보니 보행자가 건너편 보도로 가려면 차도를 가로질러야 하는 문제가 생겼다. 이때 자동차입장에서 해결책을 만들다보니 오늘과 같은 보행자의 불편함이 생기고 말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보행육교이다. 사람이 지상에서 편하게 건널 수 있는 횡단보도 대신에, 차량이 거침없이 지나가게 하고 사람은 육교를 통해 계단을 오르내리는 불편을 겪어야 길을 건널 수 있게 했다. 노약자, 휠체어, 유모차, 자전거는 어떻게 하란 말인가?

 

과천시는 전국의 지자체 중에서 보행육교 없는 도시를 만든 모범적인 도시다. 보행자와 도시경관을 고려하여 2006년에 마지막 육교를 철거한 시장의 판단에 찬사를 보낸다. 앞으로 더 많은 지자체가 과천시의 사례를 따라주기 기대한다.

 

 

철거전의 보행육교(과천성당 앞): 과천시는 보행육교 없는 도시이다.

철거 후에는 관악산으로의 조망이 열리고 편안하게 길을 건널 수 있게 되었다.

지하철역이 생기면서 주요 교차로는 자동차 전유물이 되었다. 보행자는 지하철역을 통해 건너면 되니, 지상은 자동차만 다니게 하고 기존의 횡단보도는 없애버렸다. 이후 보행자는 지상보행권을 차량에 빼앗겼으며 지하 계단을 내려가고 다시 올라가는 수고를 통해서만 차도를 건널 수 있게 됐다.

보통사람은 그래도 괜찮은데 자전거나 휠체어 혹은 유모차를 모는 사람, 그리고 짐이 있는 사람이나 노약자들에게는 불편하기 짝이 없다.

 

다행스럽게 보행자 중심의 도시를 만들기 위한 노력으로 서울시는 수년 전 서울시내 교차로에 횡단보도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지하철로 연결되는 지하보도가 있으나 지하철을 타지 않는 사람이나 자전거, 유모차를 끌고 건너려는 사람이 계단을 오르내리는 불편을 없애기 위함이다. 비록 보행신호를 기다려야 한다는 불편함은 있겠으나, 어깨를 펴고 햇빛을 받으며 대로를 건널 수 있기 때문에 사람이 대접받는 도시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보행신호를 기다리는 것이 불편하다고만 말할 수는 없다. 보행신호를 잠시 기다리는 동안 내가 살고 있는 도시의 모습을 감상하며 전에 보지 못했던 우리 동네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는 여유로움을 느낄 수도 있다.

 


서초동 교대전철역 사거리: 지하철역 계단을 이용하지 않고도 횡단보도를 통하여 길을 건널 수 있게 되었다.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며, 또한 길을 건너면서 우리 동네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2004년 서울시가 대중교통중심 교통체계개편의 일환으로 버스중앙차로제를 전면적으로 시행해 가로경관에 새로운 변화가 생겼다.

 

왕복 8차선 이상의 넓은 차도를 볼 때 보행자는 건너갈 엄두를 내지 못하며 일종의 좌절감을 느꼈다. 더 나아가 인간척도를 훌쩍 넘긴 건물을 배경으로 한 아스팔트 가로경관에 보행자는 위축되고 위압감을 느꼈다. 그것은 더 나아가 인간이 왜소화됨을 느끼게 했다.

 

이러한 비인간적 가로경관은 도로 중앙에 새롭게 등장한 버스쉘터로 도로 공간이 분할되면서 다소나마 인간척도에 가까워진 모습이 되었음은 다행이라 할 수 있다.

더욱이 중앙 승강장에 부분적으로 가로수가 식재되어 한층 더 친근한 척도가 되었고, 자연성까지 도입돼 금상첨화라 불러도 좋다.

 

 


강남대로 중앙 버스승강장: 왕복 12차선이 넘는 강남대로 중앙에 버스승강장이 생기면서 도로폭이 반으로 분할되어 보다 인간적 척도로 지각된다. 또한 강남대로를 걸어서 건너간다는 생각조차 어려웠으나 중앙에 버스승강장이 생기면서 한결 쉽게 건너갈 수 있게 되었다.

최근까지 보행자는 자동차에 주눅이 들어 어깨를 펴지 못하고 피해 다녀야 했다. 이제는 보행자의 권리를 찾아야 할 때이다. 보행육교의 철거, 횡단보도의 부활, 도로중앙녹지의 도입 등 긍정적 신호가 나타나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자전거 통행권의 확립, 보행약자의 배려, 도로경관의 인간화 등 보행복지를 위한 보행자 중심의 도시구조정비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 ‘자동차 흐름이 다소 늦어지더라도 보행자가 편안해야 한다는 원칙이 확립되어야 걷고 싶은 도시가 만들어질 수 있다.

 

가로경관에서 사람은 경관의 활력을 부여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차도를 늠름하게 건너는 사람들의 모습과 표정, 옷차림은 도시장소성 파악의 단서를 제공하며, 더 나아가 도시경관을 더욱 활기차고 아름답게 한다.

 

진정으로 걷고 싶은 도시의 길을 보고 싶다.

보행자와 하나되는 도시의 길을 걷고 싶다.

 

   

     임승빈 교수(서울대 조경학과)

 

 학력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건축학과 졸업(공학사)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조경학과 졸업(조경학 석사)
 미국 펜실바니아대학교(조경학 석사)
 미국 버지니아주립 공과대학교(VPI&SU) 건축·도시대학(환경설계·계획학 박사)
 영국 런던대학교 건축·도시대학(POST-DOC)

 

 경력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 조경·지역시스템공학부 교수
 미국 버지니아주립공과대학교 건축·환경설계학과 강사
 미국 하버드대학교 디자인대학원(GSD) 조경학과 객원교수

 

 주요저서 
 경관분석론 서울, 서울대학교 출판부 281p.
 조경이 만드는 도시 서울, 서울대학교 출판부 333p.
 조경계획ㆍ설계 (공저) 서울, 보문당 355p.
 환경심리와 인간행태(2008문화체육관광부 우수학술도서) 서울, 보문당 416p.
 도시경관계획론 서울, 집문당 357p.

 

 참여단체

 2002 새국토연구협의회 공동대표
 2002 한국농촌계획학회 회장
 2003 (재)서울그린트러스트 이사
 2003 한국조경학회 회장
 2004 (재)환경조경발전재단 이사장
 2005 한국경관협의회 회장
 2008 녹색건축청색도시 시민디자인연대(녹청련) 공동대표

 2010 한국인공지반녹화협회 회장

연재필자_임승빈 교수 · 서울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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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ungbin@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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