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Ⅱ_ 삶터 경작을 위한 “네 번째 정원”

[경공환장] 다시 보는 일상, 느껴 보는 도시” Part 2: 01 정원
라펜트l안명준 조경비평가l기사입력2014-05-16

"경공환장: 다시 보는 일상, 느껴 보는 도시" Part 2: 01 정원

[ 01 정원(garden) ] 삶터 경작을 위한 “네 번째 정원”

 

안명준 조경비평가

 

정원Ⅱ_ 삶터 경작을 위한 “네 번째 정원”


정원은 인간 욕구의 본질과 닿아있다. 삶터가 기계 같아진 오늘날, 정원은 가꾸고 돌보며 함께 어울리는 인간의 본성을 일깨운다. “정원은 누구의 것이며 무엇인가?” 공원과는 달리 놓이는 이 질문에 조경가가 답해야 할 때가 되었다.


“네 번째 정원”


현대의 정원은 인공 환경에서 자연을 즐기고자 하는 본능과 연관된다. 모더니즘의 시대를 지나며 비대해진 도시에서 정원은 공원으로 탈바꿈하기도 하였지만, 본능으로 내재한 정원(+정원일)은 여전히 우리에게 남아 있다. 그러다보니 도시가 발전하고 성장하면서도 끊임없이 정원이 만들어지고 진화하는 것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최근 도시농사, 둘레길이라는 형태로 재등장하며 요란스러운 것도 이 때문이다. 재미있는 것은 도시가 발달하면 할수록 정원 개념이 복원되는 것과 동시에 새로운 정원 개념이 출현한다는 점이다. 새로운 정원은 그리고 결국에는 인공적 환경에 문화적 자연을 덧붙이는 작업으로서 나타나게 된다.


본능의 차원에서 이해되는 정원은 본질적으로 ‘인간이 자연을 다루는 방식’이라는 점을 부각시키며 그것이 변함없는 핵심이라는 점을 강조해준다. 자연을 다루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울타리 안에서와 밖에서의 모습이 그 기준이 된다. 울타리 안에서의 그것을 우리는 Horticulture라고 부르고 그 반대를 우리는 Agriculture라고 부른다.  그리스어로 ‘horti~’는 ‘성 안의’, ‘agri~’는 ‘성 밖의’를 뜻한다. 전통적으로 조경은 이 둘 다를, 또는 이 둘의 경계를 오가며 성장해왔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정원도 몇 가지로 범주화되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 번째 정원은 원형적 자연으로서 지구 정원 그 자체가 된다. 두 번째 정원은 개인 정원이자 소유된 정원(배타 정원)이 있을 수 있다. 세 번째 정원은 우리가 흔히 부르는 공원이자 도시 내 시설로서 제한된 자연을 들 수 있다. 혹은 도시의 산과 같이 삶터에 침투한 자연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네 번째 정원은 공공정원으로 함께 가꾸고 함께 즐기는 공동의 정원이다. 네 가지 모두 정원의 본질을 포함하고 있으면서도 그 유형이 달리 나타나는 것은 그 주체인 인간을 어디에 놓고 보느냐에 따라서이다.


네 번째 정원은 그렇게 재등장하고 있으며, 새롭지 않지만 새롭게 창조되고 있다. 전통적으로 정원은 ‘위요공간, 생산환경, 열락장소’의 세 가지로 이해되었으나 이 네 번째 정원은 ‘자연경관’이라는 새로운 차원을 창출하고 감추어졌던 본능을 일깨운다.
 


가꾸기 본능을 지적한 다이애나 발모리의 홈리스가든 사례


새로운 정원도시


우리에게 서구식 정원문화의 전통이 있었던가 살펴보면 문제는 조금 복잡해진다. 정원문화가 수입된 초기의 상황을 면밀하게 검토해야 하겠지만, 알려진 바에 따르면 일본을 통해 공원문화가 수입되면서 정원문화의 일부도 함께 소개되었다. 직접 서구 공원문화를 체험하고 돌아온 사람들도 있었으나, 당시의 국내 상황에서 서구식 정원문화의 뿌리는 안착하지 못한 채 계몽을 위한 도구로서 공원이 먼저 자리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아마도 마찬가지 상황이었을 서구식 정원문화에 대한 일본의 대응을 살펴보면 재미있는 부분을 발견할 수 있다. 하워드의 정원도시론이 일본 근대화와 도시계획에 있어 큰 영향을 주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이상도시론을 발 빠르게 벤치마킹한 일본 근대도시 형성기에 하워드가 생각한 정원의 모습은 제대로 적용되지 못하였고, 정원도시론이 가진 형식적 측면만이 도시녹지정책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레크레이션 장소이자 공공정원(Public Garden)으로서 공원이 만들어지게 된다. 이렇게 자리한 공원이 식민시대를 거치며 우리에게도 이식되게 된 것이다. 이때 서구식 정원문화의 일부가 우리에게는 도시계획 시설의 하나인 공원으로 자리하게 된 셈이다.(근대 일본의 공원정책에 대해서는 공원 편에서 살펴본다.)


어쨌든 우리 고유의 정원문화는 사라진 채 폭압 속에서 서구식 정원문화가 제대로 이식되지도 못하였던 셈이다. 하워드의 정원도시론이 잘못 수입되면서 정원이 공원으로, 도시계획 시설로 자리하게 된 것이다. 잘못된 적용이었고, 시간이 지나며 도시에서 자연공간에 대한 문제와 욕구들이 하나둘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정원의 본뜻이 되살아나고 있음에 주목하고, 이를 바로 잡을 방안을 고민하고 답해야 할 때이다. 


그 첫 시작으로서 현시대 수없이 분화된 채 시민들에게 먼저 다가가 있는 다양한 정원들의 성격을 구분해줄 필요가 있다. 그러할 때 그 다음의 문제의식이 분명해질 것이다. 이런 생각에서 현대 정원의 범주를 거칠게 나누어보면 감상중심형, 참여중심형, 표현중심형, 도시기능형 등의 네 가지로 나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정원의 공급자 입장이 아니라 정원의 이용자 입장에서 접근한 것으로 그간 공원을 구분하던 범주와는 다소 자른 결을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을 통해 현대 정원이 가진 이슈들을 점검해 볼 수 있는 단초를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생각에는 다소 무리가 있기는 하나, 도시에서의 정원 역할에 대한 재정립이 필요함을 역설하는 문제제기라는 점에서 의의가 충분하다. 이후 도시 정원에 대한 역할과 기능 정립 연구가 면밀한 현황 검토와 함께 연구되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기존 정원 연구에 대한 재검토와 성찰도 필요하다. 또한 정원의 이용 주체인 시민(이용자, 이용가)에 대한 면밀한 접근도 중요하다.


하워드의 정원도시론이 지금 우리 시대에 적절한 지는 차치하고 우리가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점이 있다. 도시가 하나의 거대한 생산시스템이자 자연의 일부라는 점에서 온통 콘크리트인 우리 도시에 전하는 메시지는 아직도 유효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 정원의 네 번째 차원이 새로운 정원도시를 꿈꾸게 할지도 모른다. 네 번째 정원은 지속가능성의 네 차원을 모두 포함한다. 하워드가 꿈꾸었던 정원도시의 꿈은 여기에서부터 다시 시작될 수 있다. 거대 담론이 아니라 그것은 정원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네 번째 정원이라야만 가능할 것이다.



우리 도시에 나타나는 일상의 새 정원들


정원은 무엇인가


자 이제 우리시대 정원에 던져지는 첫 번째 질문이 “이 정원은 누구의 것인가”라는 점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공공정원이 재설정될 필요가 있다는 것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정원과 정원일은 도시를 가꾸고 싶게 만든다. 각자로 나뉜 우리를 모두의 삶터로 불러들인다. 혼자 즐기는 정원이든 함께 즐기는 공공정원이든 정원은 이제 이 도시의 모두를 위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제 새로운 질문에 맞닿게 된다. “정원은 무엇인가?” 쉬운 것 같지만 쉽지 않은 이 질문에 흔쾌히 대답할 수 있는 전문가가 필요한 시점이다. 우리는 이제 분명히 정원과 정원문화에 대한 성찰의 단계를 지나고 있다.






우리시대 정원일은 자연과 만나고, 이웃과 만나는 즐거운 노동이다.

연재필자 _ 안명준 조경비평가  ·  서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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