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현의 “공간”과 감성적 삶터 - 1

경공환장: 다시 보는 일상, 느껴 보는 도시
라펜트l안명준l기사입력2018-02-09

"경공환장: 다시 보는 일상, 느껴 보는 도시" 

Part 2: 11 공간 Ⅰ



체현의 “공간”과 감성적 삶터

 



_안명준 오피니언리더

조경시공연구소 느티 대표│조경비평가




공간Ⅰ:  공간 개념의 혼돈과 소통을 위한 공간 이해...


다시 도시와 개념으로 돌아와 보자. 도시는 모여 사는 터이다. 공간이자 장소다. 도시가 메마른 삶터로 성장해온 것은 지난 시대의 역사, 문화에 이유가 있다. 그리고 이제는 근현대적 시행착오를 뛰어넘는 새로운 ‘관점’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살펴볼 것이 많다. 그 중 ‘공간(space)’은 중요하게 보아야 할 개념이다. 지나치다 싶을 만큼 집요하게 여럿이 꼼꼼히 살펴야 할 개념이다. 불통과 오해는 그러할 때 드러나고 진화는 그렇게 새로이 형성될 것이기 때문이다. 


‘기능 공간’에 대한 반성, ‘공간’에 대한 희망
우리 삶의 터는 이미 공간‘들’로 가득 차 있다. 옆으로 놓고 앞뒤로 놓아도 모자라 위로도 아래도로 가득 쌓아 터보다 공간이 먼저 주인이 된 격이다. 최소한 도시에서는 터보다 공간이 먼저다. 그러고 남은 부분에 나무도 있고 가로도 있고 공원도 있다. 지난 시대 공간으로 채우던 도시의 그러한 관성이 아직 그대로이기는 하지만 21세기 들어 뭔가 다른 현상들도 나타나고 있다. 눈밝게 보면 공간을 가로지르고 세로지르는, 즉 갈팡질팡 모던과 포스트모던을 오가던 눈빛들이 흔들린다. 다시 말해 기능적 공간의 도시가 아니라 감성과 이야기가 있는, 즉 삶의 도시로 주변을 다시 보려는 반성이자 노력이다. 


<우리 도시의 공간들>

그 반성의 몇 가지만 들어보자. 건축평론가 임석재(『건축의 지역성을 다시 생각한다』, UP출판, 2015)는 “20세기를 거치며 나타난 신종 한국인을 대입하지 못했다. 사람이 빠진 상태에서, 사람보다 먼저 건축의 물리적 틀을 정의했기 때문에 사회와 생활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겉돌고 따로 놀게 되었다.”며, “주인을 대입하지 못하고 행한 건축가의 개념 유희는 건축가의 작품집에 머물 수밖에 없다.”고 일갈한다. 그러며 “반드시 건축가들의 자폐적 예술지상주의를 넘어서야 한다. 일반 대중의 일상생활과 조형 형태로 치환해야 한다.”며 “건축가들만 아는 폐쇄적인 조형 형식으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최근 건축가 도미니크 페로는 “자폐 건축물”이라 부르며 저 혼자 서있는 건물은 더 이상 짓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 것과 일맥한다. 
이런 지적에 대한 건축가이자 문학가인 함성호의 지적은 보다 직설적이다.(『융합 인문학』, 이학사, 2016) “쉽게 말해서 건축가들이 무식해요. ... 문맹은 아니지만 의미맹입니다. 의미를 모릅니다. ... 그리고 건축가들이 자기 작업을 발표하고 글을 쓰는데 ‘인문 병신체’, ‘보그 병신체’가 있는 것처럼 ‘건축 병신체’가 나오더라고요, ... 어떤 개념, 말하자면 그 학문에서 인정받은 두루 통용되는 보편적 개념을 모릅니다.” 그러며 그는 건축하며 받는 스트레스의 상당부분이 동료들로부터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부정적이지 만은 않다. 마이클 폴란은 이러한 상황을 긍정적으로 이야기한다.(『주말 집짓기』, 펜연필독약, 2016) “다행히 지난 이십년 사이 건축은 유사 이래 가장 극단적이었던 문학적 자만심에서 점차 벗어났고 공간에 대한 육체적 경험의 중요성을 재발견하게 되었다.” 공간으로 치환된 ‘사고의 실로(失路)’가 체현의 닻을 가지게 되었다는 긍정인 것이다. 그가 『세컨 네이처』(황소자리, 2009)에서 보여준 통찰이 그렇게 확장된다. 그렇다, 희망은 또 그렇게 시작되고 있다.


‘공간’에 담은 개념, ‘공간’을 느끼는 방법

공간은 이미 충분히 다의적이다. 많은 전문분야에서 충분히 곱씹고 다루어온 개념이기도 하다. 그렇더라도 ‘공간’과 관련된 직접적 개념들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인간과 공간』, 에코리브르, 2011. 밑줄 및 이탤릭체는 필자 강조.) 

- 공간은 모든 것이 제자리, 제 장소, 제 위치를 갖고 있는 포괄적인 곳이다.
- 공간은 인간이 자유롭게 움직이기 위해 필요한 운신의 장소이다.
- 공간의 본뜻은 숲을 벌목해 인간의 정착지로 만든 빈 곳이다. 따라서 공간은 원래 비어 있었다.
- 공간은 압박하지는 않지만 근본적으로 닫힌 곳이다. 공간은 원래 무한하지 않다.
- 이른바 열린 공간이라는 것도 추상적인 무한대가 아니라 방해받지 않고 뻗어나갈 가능성을 말한다. 창공을 나는 종달새가 그렇고, 넓게 펼쳐진 평지가 그렇다.
- 공간은 인간의 삶이 전개되는 곳이며, 주관적이고 상대적으로 규정되는 좁고 넓음에 따라 측정된다.
- “공간을 차지한다”거나 “공간을 허용한다”는 말은 인간의 발전 욕구에 자리 잡은 경쟁 관계를 뜻한다. 공간이 부족할 때 인간은 서로 부딪치고 공간을 나누어 써야 한다.
- ‘여지, 여유’(Spielraum)를 뜻하는 공간은 사물 사이에도 존재한다. 이 경우에도 공간은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고 사물 사이에 있는 틈새 공간이다. 공간은 비어 있는 경우에만 공간이다. 다시 말해 사물의 표면을 넘어 사물 내부로는 침투하지 못한다.
- 공간은 인간의 질서를 통해 만들어지고 인간의 무질서로 인해 사라진다.
- “공간을 내주다/양보하다”(einräumen)와 “공간을 마련하다/치우다”(aufräumen)는 합목적적인 행위를 위한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인간의 생활 영역을 조직하는 형식이다.
물리학적 공간 개념이나 동양 사고에서의 공간 개념은 빠져 있지만 일반적으로 논의되는 공간의 개념적 범주는 이 정도에서 충분히 드러나는 것 같다. 중요한 것은 공간이 그 자체로 비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고 공간을 규정하는 ‘표면’들을 넘지 못하는 한계를 가진다는 것이다. 잊지 말아야 할 점은 공간이 개념적으로 그렇게 설정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공간은 어떻게 인식되는가? 극단적으로 말하면 “공간은 그 자체로 지각될 수가 없고 오로지 형태의 네거티브로서만 인식될 수 있”고 “지각할 수 있는 사물의 존재를 전제로 하여 성립하고 이러한 사물들 간의 관계를 통해 공간에 대한 인식의 틀이 형성된다”고 까지 할 수 있다.(권영걸, 『공간디자인 16강』(국제, 2001)) 그런 면에서 공간과 물체는 기본적으로 상호매체적인 관계이며 공간 그 자체로서는 물리적으로 성립이 어려운 개념일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의 생활과 행동은 공간이 필수적일 때가 있고 그러한 공간을 만드는 작업을 우리는 흔히 ‘짓기(build)’라고 부른다. 

이제까지의 공간은 “합목적적 행위”의 담지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근대적 공간 개념의 시작이기도 했다. 대량 생산의 혜택이 보편화되고 근대적 전문가 서비스, 교육 체계가 발달하면서는 공간에 사유가 쌓이게 된다. 경험보다 의미가 중요해지면서 우리 도시는 생각뿐인 공간으로 채워진 셈이다. 건축 교육은 그것을 가속화하였다. 공간의 표준, 국제화 경향은 그 단면이다. 문화와 역사가 보편적 생활이 되면서부터 우리는 쉽게들, 흔히들 “건축은 삶을 담아내는 그릇을 축조하는 과정”이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때의 그릇은 공간의 경계면(또는 표면), 물리적 건축물 정도로 이해되며 아직 삶(일상, 이야기)을 담을 준비는 부족하다. 공간을 개념적으로 재검토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 도시의 “꽉 찬 공터”>

모던과 포스트모던을 지나 우리가 얻은 한 가지 힌트는 거기의 삶을 경험으로서가 아니라 체현 상태(embodied state)로서 이해하고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건축물과 공간 사이에는 그렇게 체현의 프로세스가 공감되어야 한다. 건축 행위, 더 정확하게는 설계 행위를 예술이자 공간 생산 철학의 산물로 이해하고 건축가의 정신적 산물이자 작품으로 먼저 이해하는 태도는 여기에 중요하지 않다. 이러한 비판은 공간과 관련된 전문분야 모두에서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 “의미맹, 건축 병신체”가 아닌 “삶의 경험”, “삶(터)의 이야기”가 담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도시가 감성을 추구하며 진화하고 있음을 그렇게 지원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현대의 건축 공간에는 풍경에서처럼 충분한 “감흥의 시간”이 필요하다.

앞서의 함성호는 말한다. 대한민국이 과거와 완전히 단절된 채 20세기에 세워진 나라이기 때문에 “우리는 옛날 집이 가지고 있는 생활사들을 다 잃어버렸어요.” 그런 이유로 우리의 근현대 건축은 공간을 물리적 실체로 다루는 데에만 집중하였고 자폐적 건축으로 가득한 도시가 되어버린 것이다. 공간을 제대로 이해할 필요는 이렇게 다시 중요해 진다.


공간의 새이름, “꽉 찬 공터(Solid-void)”
“우리는 행동하기 때문에 느낀다.” 공간은 그렇게 드러나고 상정되는 개념이다. 실체 없는 공간이지만 실체 없이 상정되지도 않는 개념이다. 도시는 공간의 밀도 높은 집합소이다. 삶도 그 만큼 집합적이며, 집합적이고 고밀화된 행동으로 인해 공간도 도시도 그렇게 드러나게 된다. 이제 공간은 천경(Sky-scape, philosophy)이 아니라 경관(Land-scape)에 터 잡아야 한다. 삶과 삶터는 그런 후에야 주연이든 조연이든 역할을 가지게 된다. 지난 세기 우리는 물리적 풍요로움에 기꺼워 이것을 소홀히 했다.

‘숙/홀’은 ‘혼돈’에게 대접한다며 여러 개의 구멍으로 자신들의 고마움(생각)을 강요한다, 아니 주입한다. 그리하여 혼돈은 어떻게 되었는가? 우리시대 “공간”은 그런 혼돈의 상태가 아닐는지. ‘사유의 실로(길 잃음)’는 어쩌면 온화한 표현일지 모른다. 

* “병신체”라는 말은 비하의 의미가 있어 좋지 못하다고 보나 뜻을 살리기 위해 그대로 인용함. 

 

글·사진 _ 안명준  ·  조경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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