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유산 창덕궁 후원 부용정, 조영의도를 알고 보자

문화재청 창덕궁관리소 ‘창덕궁 깊이 보기’ (1)
라펜트l기사입력2021-07-20


문화재청 창덕궁관리소는 창덕궁의 역사와 문화적 가치를 조명할 수 있는 분야별 전문가를 초청하는 ‘창덕궁 깊이 보기’ 행사를 지난 9일 창덕궁 후원에서 열었다. 이날 행사는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를 지켜 진행됐으며, 해설은 무전으로 이루어졌다.


이번 행사는 8일부터 10일까지 매일 1회씩 총 3회 진행됐으며, 올해는 ‘왕의 정원, 창덕궁 후원 깊이 보기’라는 주제로 후원의 권역별 전통조경의 특징과 가치를 배우는 시간으로 꾸려졌다. 창덕궁관리소에 앞으로 해마다 주제를 바꿔 심화답사 프로그램을 확대·운영할 계획이다.


9일에는 송석호 고려대학교 조경학연구실 연구원과 함께 ‘창덕궁 후원문화의 전승과 가치’라는 주제로 역대 왕들의 권역별 정원 조성 특징과 정원건축물과 경관 등을 답사했다. 특히 후원 깊숙한 곳에 있는 청심정 사각 정자와 빙옥지 등 그동안 일반에 공개하지 않았던 답사 동선도 한시·제한적으로 개방했다.


창덕궁은 조선시대 태종 5년(1405년)에 이궁으로 창건돼 태종이 개성에서 한양으로 재천도하면서 건립됐다. 1963년 1월 18일에 대한민국 사적 제122호로 지정됐고, 1997년 12월 6일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열린 제21차 유네스코세계유산위원회(WHC)에서 등재기준 (ⅱ), (ⅲ), (ⅳ)를 인정받아 세계유산(816)에 등재됐다.


유네스코세계유산위원회는 창덕궁의 가치를 ‘동아시아 궁궐 건축과 정원의 디자인에서 빼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건축물이 자연적 배경과 훌륭하게 조화된다는 점에서 독특하고 탁월한 유산’이라고 평가했으며, 특히 후원이 등재에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정원건축물과 수공간은 인위를 최소화하고 자연의 형세에 흐름을 맞추고 있어 자연에 순응했던 우리문화를 잘 보여주고 있다.


창덕궁 후원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왕의 정원’으로, 주체자인 임금 개인의 취향이 반영됨과 동시에 당대의 철학과 문화사상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무엇보다도 후원은 조선왕조 500년의 영속정이 반영돼 있는 정원으로, 역대 여러 왕들의 정원문화가 꾸준히 발전됐고, 이 계승의 과정을 거치며 체계화된 특징을 보이고 있다.


창덕궁 후원은 세조연간에 확장됐고, 초기 모습은 수렵원이었다. 현재 모습은 임진왜란과 인조 즉위 후 대부분 조영됐다. 특히 인조는 창덕궁 후원 조영에 가장 열성을 보인 왕이다. 부용지는 인조 12년(1634년), 옥류천 일원은 인조 14년(1636년)에 조영했고, 병자호란을 겪고 난 후 존덕정 일원을 조영했다. 이후 효종, 현종, 숙종 또한 후원 조성에 영향을 줘 숙종시기 17세기에 대부분 조영됐다. 특히 숙종은 『어제궁궐지(御製宮闕志)』를 편찬, 궁궐 각 전각의 명칭, 위치, 연력 등을 기록해두기도 했다.


이후 정조는 후원에 규장각을 창설하고 내각상조회를 발족해 후원의 정원문화를 꽃피웠으며, 순조와 효명세자(익종) 댕서 후원을 애용한 기록이 전해진다.


후원은 고종연간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많은 부분이 변형되고 소실됐지만 최근 원형경관을 찾기 위한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송석호 연구원은 “창덕궁 후원에서 중요하게 인식해야할 점은 외면의 아름다움보다 조영의도를 파악해 본질을 탐구하고 정체성을 이해하는 일이다. 이는 결국 올바른 정원문화의 전승을 위한 가장 근본적인 일이며 세계유산으로써의 진정성을 확보하는 길”이라고 설명했다.



송석호 고려대학교 조경학연구실 연구원



부용정의 공간적 함의


부용정(芙蓉亭)은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조형원리에 따라 조성한 부용지에 지은 정자로, 독특한 평면형태, 공간구성, 건물 장식 등이 뛰어난 비례와 대비 등으로 인정받아 2012년 3월 4일 보물 제1763호로 지정됐다.


부용정 권역은 주로 동궐도(東闕圖)를 중심으로 복원돼 왔다. 송 연구원은 “아직까지 부용정의 외관형태를 두고 십자형(十) 또는 정(丁)과 아(亞)의 형태가 결합된 정원건축물로 설명하고 있어, 부용정을 가시적인 맥락에서 풀이하고 있는 경향을 보인다”며 아쉬움을 표했다. 부용정의 조영배경을 바탕으로 문화적 가치와 정체성을 알아야 한다는 설명이다.


부용지는 임진왜란(1592~1598), 인조반정(1623), 이괄의 난(1624) 등의 수난 이후 창덕궁을 재건하면서 함께 개발됐는데, 인조 12년(1634)에 정묘호란(1627)으로 대부분 퇴락한 어수당(漁水堂)을 개수하고, 열무정가에 못을 판 것이 부용지이다. 이후 현종은 중도(中島)에 청서정(淸署亭)을 조영했으나 훗날 무너지고 숙종연간에 철거됐으며, 숙종 18년(1692)에 작은 섬만 쌓아두었다가 같은 해 애련정을 조영한다. 이는 당시 후원의 중심이 어수당이었기 때문이며, 숙종 24년(1698)에는 애련정을 지당의 북쪽으로 옮겨짓고 지당의 이름을 태액지(太液池)라 명명, 전서체로 지당의 돌에 새겼다.


애련정 이건 9년 뒤 숙종 33년(1707) 겨울, 부용지 남변에 정자를 조성했는데 이것이 훗날 부용정으로 증축되는 택수재(澤水齋)이다. 택수재는 정조 즉위년(1776)에 맞춰 새롭게 개축됐고, 정조 17년(1793)네 또 증축하며 공간구조가 변화했고, 정자 이름이 부용정으로 개칭됐다.


정조는 왕세손으로 봉해지면서 15년간 경희궁 존현각과 주합루에서 학문을 연구했으며, 1776년 왕위에 오르며 선왕의 어진, 어필, 어제를 보관하는 장소로 창덕궁 후원에 규장각을 세웠다. 개축된 택수재를 기준으로 규장각, 어수문, 개유와를 남북의 긴 축선으로 연계해 일대의 공간구성범위를 확장시켰는데, 이는 정조가 군왕등륵의 당위성을 내세우고, 정치적 이상을 실현할 중추적 장소로 부용정 일원을 계획·설계한 것이다.


특히 규장각내 ‘초계문신(抄啓文臣)’제도를 두어 인재를 양성, 자신을 지지해줄 신진세력을 키웠다. 또한 규장각의 핵심 관원들인 제학, 직제학, 직각, 대교 등 가인(家人)처럼 대우받은 각신(閣臣)들을 두었다. 정조의 적극적 개혁정책은 신하들에게 후원을 구경시켜주는 계기가 됐다.


정조 5년(1781)년에 『소요정갱재축』과 강세황의 『표암고』 기록이 가장 앞선 기록으로, 특히 강세황의 표암고 중 임금을 모시고 후원을 구경한  「호가유금원기」에 따르면 임금과 신하가 후원을 출입한 것에 대해 ‘전례를 찾을 수 없는 일’로 기록돼 있다.


어찌 우리 임금께서 몸소 이 미천한 신하들을 거느리고 좋은 경치와 명승지를 낱낱이 일러주면서 온화한 얼굴과 부드러운 음성으로 한집안 식구나 다름없이...(중략)... 이는 과거의 기록을 두루 찾아보아도 전혀 없던 일이다. 

- 『표암고』 중 호가유금원기, 정조 5년 9월 3일

이후 정조는 계속 신하들을 데리고 후원을 유람했으며 대표적 목적지는 옥류천이었다. 유람은 9년간 즉흥적으로 지속되다가 정조 16년(1792)에 공식적으로 내각상조회(內閣賞釣會)을 발족, 창덕궁 후원 유람을 정례화 했다. 이후 내각상조회 활동은 부용정이 조영된 직후, 참여인원이 급증하고 참여 신분도 대신들까지 확대되면서 국가적 문화활동으로 발전했다.


당시 정조가 부용정을 증축하는 이유를 「부용정 상량문」에 밝혔는데, 선대의 업적을 계승하기 위한 ‘계책’ 때문이다. 그 계책의 실마리는 부용정이 조영된 정조 17년(1793) 전후 내각상조회 활동의 차이점에서 볼 수 있다. 부용정 조영 이후 국가의 대신과 중신이 등장하면서, 후원에도 편전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건물이 필요했는데, 그 장소가 바로 규장각 일원이었고, 건물은 부용정이었던 것. 즉, 「부용정 상량문」에 따라 선대의 업적인 영조의 사대부중심 탕평책을 군주중심의 탕평책으로 계승해 왕도정치를 실현하고자 하는 의도가 스며있는 것이다.


부용정의 모습


「부용정 상량문」에 의하면 ‘부용(芙蓉)’은 ‘연(蓮)’을 상징하고 부용지의 섬은 봉래산(蓬萊山)을 의미해 신선이 사는 성역을 나타내는데, 이를 바라볼 수 있는 물가에 부용수전(芙蓉水殿)을 지어 이상세계를 동경하고자 한 것으로 풀이된다. 정자의 이름을 부용으로 지은 것은 마음이 잔물결에 씻은 것처럼 깨끗하니 바로 군자임을 알겠다는 뜻에서였으며, 부용정을 태을선인(太乙仙人)으로 의인화시킨 것은 도가의 불로장생을 상징적으로 염원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숙종 33년(1707)년 겨울, 부용정 자리에 택수재가 처음 조영됐고, 정조 즉위년(1776)에 개축되는데 이 모습은 「규장각도(奎章閣圖)」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당시 모습은 사우정(四隅亭)의 형태로, 원도(圓島)와 연결되는 다리가 있었고, 정자의 형태도 전주(前住)를 가지고 있지 않은 모습이었다. 이같은 정자는 분류상 지안형(池岸形) 수사(水榭)로 구분한다.


이후 대신과 중신도 함께 하기 위한 장소를 마련하고자 정조 17년(1793) 택수재를 부용정으로 증축하는데, 원도와 이어지던 다리는 정조 18년(1794)까지 기록에 의해 확인되나 1년 후의 기록부터 보이지 않고 있어 부용정이 편전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고쳐지며 다리를 철거한 것으로 보인다.


신하들과 유생 중에서 뱃놀이를 하고 싶은 사람은 모두 배에 타도록 하라.” (중량) “다리 위에는 사람이 걸어가고 누각 위에는 사람이 앉아 서로 바라보니 모두 그림 속 풍경입니다. 인ㄹ 신선이 될 인연은 어찌 너와 나의 차이가 있겠습니까.”

- 『일성록』 절조 18년 갑인 3월 15일 임인, 1794년


상께서는 또 여러 신하들에게 배를 띄우라고 명하고 배 안에서 시를 지었는데, 정해진 시간 안에 시를 지어 올리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연못 가운에 있는 조그만 섬에 안치시키기로 하였다. 몇 사람이 과연 그 섬 가운데로 귀양을 갔는데, 곧 풀어주었다.

-『다산시문집』 제14권 부용정 시연기

부용정은 지안형 수사였던 숙종의 제로를 계승해 정조 17년(1793) 지변형(池邊形) 수사로 증축됐고, 정조의 정치적 목적상 신하들과 함께 입실해야 했기에 내부공간은 위계를 지니게 됐다.




북쪽만 단이 올라가 있다.


부용정의 측면을 보면, 주출돌이 지당에 있고 물 위에 떠있는 북쪽공간만 다른 곳보다 단(段)이 높게 설계돼 있는데, 이는 경복궁 경회루와 같은 것으로 단차를 두어 임금의 공간을 표현하는 수법이다.


오직 마룻대를 올리고 서까래를 얹어 집을 짓는 규모는 대대초 『역경(易經)』 대장괘(大壯卦)의 견고한 상(象)을 취하였고, 무릇 방에 들어가거나 마루에 오르는 인사는 아울러 가인괘(家人卦)의 한집안의 안팎이 모두 바른 상을 견주었도다.

-『홍재전서』 제55권 잡저 2, 「부용정 상량문」 1793년

대장괘는 『주역』 64괘 중 34번째 괘 이름으로 대(大)는 양(陽)을 의미하고, 장(壯)은 왕성하다는 뜻이다. 즉 부용정의 북쪽공간에 마룻대를 올린 것은 양이 왕성한 기운을 뜻하며, 임금이 존재하는 공간임을 암시한다. 가인괘는 37번째 괘 이름으로, 가인은 집안사람을 말한다. 즉, 신하들이 정자에 입실하는 것을 가인상으로 취한 것이며, 부용정 내부공간이 군신의 위계에 따라 나뉘었음을 알 수 있다. 외관적으로도 창호 문양을 북쪽공간만 이자살로 차별화했는데, 이 또한 왕의 자리를 가시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당대의 건축수법으로 보인다.







부용정의 평면구조는 십자형(十) 모양에 남서쪽과 남동쪽의 귀퉁이공간이 덧대어진 형태로 증축됐으며, 동쪽, 서쪽, 남쪽을 통해 출입이 가능하도록 조영됐다. 이는 유교적 관점에서 보면 임금은 남쪽 출입구를, 신하들은 동·서쪽 출입구를 이용했을 것으로 판단되며, 부용정 동·서쪽 공간도 자연스럽게 신하들의 공간으로 활용됐을 것이다.


신하들은 못가에 둘러앉아 각각 낚싯대를 드리우되, 대신과 중신은 부용정의 왼쪽에 앉고, 각신은 부용정의 오른쪽에 앉고, 승지와 사관은 못의 서쪽에 앉고, 각신의 자제는 못의 동쪽에 앉으라고 명하였다.

- 『일성록』 정조 18년 갑인 3월 15일 임인, 1794년

중앙공간의 서측으로는 원형의 불발기창이 있는 불발기분합이 존재하나 머름이 설치돼 출입이 불가능하고, 동측에도 팔각과 사각의 불발기창이 불발기분합으로 존재하지만 머름이 없는데, 이는 동쪽으로 충분한 채광을 확보하고, 일시적으로 물품의 이동을 위해 분합을 둔 것으로 사료된다. 남측은 들어걸개문의 분합으로 설치돼 신하들이 임금을 배알하기 위해서는 남측을 통해 중앙으로 입실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부용정의 귀퉁이공간은 동-서쪽 공간의 신하들이 임금을 배알하기 위해 남쪽공간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덧붙여진 공간으로, 최소한의 증축을 하면서도 유기적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설계된 전이공간의 역할을 한다.


정조는 택수재가 가지던 지변형 수사제도를 계승하면서 자신의 정치이념을 부용정에 투영해 설계했으며, 이는 조선후기 성리학적 사상이 정자에 반영된 독특한 사례로 볼 수 있다. 또한 각 공간을 위계별로 구분하고, 최소한의 공간에 군신이 함께해 편전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설계된 정원건축물이다.


송 연구원은 “창덕궁 후원이 베르사유 궁전의 정원과 다른 점은 선왕의 유산을 계승해 발전시켰다는 점으로, 영속적이고 당시의 문화가 반영됐다는 측면을 꼽을 수 있다”며 “형태적 특징에 더해 조영의도에 대해 보다 상세히 설명해줄 수 있다면 왕의 정원의 본질을 탐구하고 정체성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술성각


부용지 서쪽 물가에 있는 비각인 ‘사정기비각(四井記碑閣)’으로 통용되고 있는 건물의 이야기는 이러하다. 후원이 수렵원의 모습일 시절, 세조가 후원에 거둥해 군사진법을 의논하고, 활 쏘는 것을 구경하며 주연을 베푼 ‘열무정(閱武亭)’ 가에 4개의 우물을 파 마니(摩尼), 파려(玻瓈), 유리(琉璃), 옥정(玉井)이라 명했다. 이후 병화로 남은 2개의 우물을 숙종이 수리, 사정기를 지어 비각을 세웠다.


송 연구원은 “당시 숙종은 세조연간의 사정을 계승해 장하게 여긴다는 취지로 ‘술성각(述盛閣)’이라 명명했기에 ‘술성각’이라 부르고 ‘사정기의 비각’으로 해석함이 옳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울러 “당시 세조가 우물을 팔 만한 곳을 물색하게 한 점은 열무정에 거둥하며 습윤한 자연환경을 잘 알았기 때문으로 판단된다”며 자연환경을 살피는 선조들의 지혜를 설명했다.









글·사진 _ 전지은 기자  ·  라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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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oyal성균관대(조선.대한제국 유일무이 최고교육기관 성균관승계,한국 最古.最高대).Royal서강대(세계사반영,교황윤허,성대다음예우)는 일류,명문.주권,자격,학벌없이 대중언론항거해온 패전국奴隸.賤民불교Monkey서울대.주권,자격,학벌없는 서울대.추종세력 지속청산!

http://blog.daum.net/macmaca/733

http://blog.daum.net/macmaca/2967
2021-07-22
동아시아 세계종교인 유교나, 서유럽의 세계종교인 가톨릭의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절대적 초월자이십니다.

@ 공자님의 시호. 하늘이 보내신 성자이신 성인 임금 공자님은 황제 칭호인 문선제(文宣帝).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圣文宣王)의 오랜 전통으로 호칭되어 오고 있습니다.聖人에 이르신 스승(至聖先師). 은나라 왕족의 후손이신 공자님. 참고로 하면, 공자님 아버지 시호는 계성왕(啓聖王)이시고 공자님 어머니 시호는 계성왕 부인(啓聖王夫人)이십니다.

http://blog.daum.net/macmaca/3127

@한국 유교 최고 제사장은 고종황제 후손인 황사손(이 원)임. 불교 Monkey 일본 항복후, 현재는 5,000만 유교도의 여러 단체가 있는데 최고 교육기구는 성균관대이며,문중별 종친회가 있고, 성균관도 석전대제로 유교의 부분집합중 하나임.@일제강점기 강제포교된 일본 신도(불교), 불교, 기독교는 주권없음. 강점기에 피어난 신흥종교인 원불교등도 주권없음.

주권없는 패전국잔재 奴隸.賤民이자, 하느님.창조신을 부정하는 Chimpanzee계열 불교일본서울대Monkey와 추종세력들이 학교교육 세계사의 동아시아 세계종교 유교,윤리의 종교교육 유교, 국사등과 달리, 일본강점기때 일본이 유교를 종교아닌 사회규범으로 했으니까, 유교가 종교아니라고 최근 다시 왜곡하는데,이는 일제잔재 대중언론에 포진하여 루머수준으로 유교에 도전하는것임.한국은 미군정때,조선성명복구령으로 전국민이 조선국교 유교의 한문성명.본관을 의무등록하는 행정법.관습법상 유교국임은 변치않으며 5,000만이 유교도임.@인도에서 불교도는,불가촉賤民.조계종승려賤民한국과비슷.강점기 하느님에 덤비며(창조신내리까는 부처처럼)유교부정,불교Monkey일본.하느님보다높다는 성씨없는 일본점쇠賤民.후발천황(점쇠가 돌쇠賤民.불교Monkey서울대 전신 경성제대설립)옹립.한국은 세계종교유교국.수천년 유교,하느님,조상신,공자 숭배.해방후 조선성명복구령 전국민이 행정법.관습법상 유교국복귀. 동아시아(중국,한국,베트남,몽고) 세계종교국중 하나인 한국이 불교Monkey 일본의 강점기를 겪으며 대중언론등에서 유교가 많이 왜곡되고 있음.

http://blog.daum.net/macmaca/3131
2021-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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