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시선] 고대 히타이트 가상경관 제작일지 2편
김익환 논설위원(이스탄불 공과대학 조경학과 조교수)라펜트l기사입력2023-09-01
고대 히타이트 가상경관 제작일지 2편
(1편에 이어서) 그렇게 프로젝트를 수주받고 두근거리면서 연구원들과 함께 답사를 왔지만, 막상 부지 앞에서는 그 어마어마한 스케일에 압도될 수밖에 없었다. 아니, 무슨 발굴현장에서 지평선이 보이는지. 게다가 저 멀리 산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산마저 고대 도시의 흔적이었다. 나도 그렇지만 연구원들도 얼굴이 하얘졌다.
천운으로 해당 부지의 발굴팀에는 앙카라 대학교 고고학과 소속으로 프로젝트에 참여 중인 한국인 석사생이 있었다. 해당 학생과 학생의 지도교수님이시자 발굴 단장이신 교수님의 안내로 부지의 구석구석을 둘러보고, 여태 발굴되었던 유물들이 전시되고 있는 박물관까지 살펴볼 수 있었다. 프로젝트와는 별개로 대단히 인상 깊은 경험이었다. 흔히 고대 문명이라 함은 이집트 문명이나 아즈텍 문명 등을 곧잘 떠올리며 히타이트 문명은 등한시되는 경우가 종종 있어 왔지만, 실제 히타이트 문명이 세계사에 끼친 영향과 그들이 남긴 정교하고도 단단한 유물들을 살펴보자니 감탄스러웠다.
솔직히 이렇게 부지를 둘러보는 과정까지만 해도 정확하게 우리가 무엇을 얼마나 구현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았다. 막연하게 고대 문명을 VR로 복원해달라-라는 요청만 받아 출동했을 뿐, 정확하게 어느 정도 크기의 공간을 어떤 플랫폼으로 구동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설명을 듣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박물관과 부지에서 끊임없는 유물들을 살펴보며 나와 연구원들이 처음 느낀 위기감은 바로 이것이었다. “이건 하나하나 모델링을 거쳐야 한다.”
무슨 말인고하니, 보통 VR 상에 공간을 만드는 과정은 실공간에서처럼 절성토를 통해 공간을 ‘빚는다’기보다는, 여러 부품들을 조합해서 공간을 ‘조립하는’ 것에 더 가깝다. 화구에 붓으로 그림을 그린다기보다는 다양한 소스를 편집하고 이어붙이는 포토샵 작업에 더 가깝다. 그런 만큼 좋은 퀄리티의 VR을 조립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부품들이 요구되고, 많은 콘텐츠 기업들이 가장 많은 시간과 인력을 투자하는 영역이 이러한 부품, 에셋들을 모델링하는 작업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런 모델링, 렌더링에 가장 많은 시간이 요구된다. 사람이 갈려 나간다. 그렇기때문에 보통 디자이너들은 자체적인 라이브러리를 갖고 있다. 틈틈이 모델링 해둔 에셋이라든가, 주변에서 건네받은 에셋들. 그리고 언리얼 마켓과 같이 온라인으로 판매하는 에셋들을 마치 도토리 모으는 다람쥐마냥 차곡차곡 드라이브에 쌓아둔다. 이런 에셋들은 보통 지극히 무난하고 평범한 스타일인 경우가 흔하다. 그래야 여기저기 필요에 따라 최소한의 편집만으로 활용이 가능할 테니까.
그렇기 때문에 부지와 박물관에서 보게 되는, 기기묘묘하게 생겨서 우리가 여태 알고 있던 그 어느 오브제와도 닮은 점이 하나도 없는, 하지만 고고학적 가치 때문에 대충 비슷하게 생긴 것을 갖고 와서 같은 것이라고 우길 수도 없는, 그런 유물들로 가득한 공간을 보게 되자 나와 연구원들은 모두 등골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이걸 설마 손으로 하나하나 다 빚어 만들어야 하는가.
난해한 히타이트 고대 유물들
이렇듯 여태 모델링이 된 적이 없는 에셋들을 ‘제대로’ 만들려면 일일이 3D 스캔을 하거나 정확한 실측 과정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그런 모델에 맞는 텍스처, 질감도 하나하나 만들어야 한다. 그 과정에 요구되는 인력과 자본은 아득할 정도이다. 심지어 그렇게 만들어진 자료들도 바로 활용이 불가능하다. 상호교환이 가능한 VR에 배치하기 위해서는 후보정이 요구되고, 이러한 일련의 지리하고도 끝이 없는 과정들이 머릿속에 스치면서 나와 학생들은 얼굴이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설령 EU에서 받는 펀딩으로 모델링 전문업체에 하도급을 준다 하더라도 작업 기간이 얼마나 길어질지 쉬이 감이 잡히지도 않았다.
이런 우리의 속도 모르시고 초대를 해주신 발굴 대장님은 유적과 박물관 구석구석을 직접 안내해주셨다. 본인이 직접 발굴하신 유물들이 안치된 박물관에서 직접 안내를 해주시다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리고 아주 신박한 제안을 하셨다. 이런 박물관에 안치된 유물만으로는 실제 고대인들이 살아 움직이던 과거를 상상하기 어렵지 않느냐. 유적지에서 차로 약 1시간 거리에 튀르키예 원주민들이 생활하는 오래된 동네가 있는데, 해당 동네의 건물들이 유적지의 고대 건물들과 거의 동일한 건축기법과 자재들로 만들어졌으니, 이를 보고 좀 더 고대 도시를 쉽게 유추해보자는 제안이었다. 설득력 있었다.
그렇게 방문하게 된 마을은 현재 사람이 살고 있지는 않은 거대한 유령마을이었다. 십수 년 전쯤 지진 등을 이유로 주민들이 이주한 뒤로는 관리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았던 이곳은 비록 닳을 대로 닳아 주저앉기 직전의 모습이었지만, 유적지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공간의 형태를 알아보기가 쉬웠다. 무엇보다도 흙벽과 돌담, 건물의 기둥 등이 잘 남아있었던 만큼 향후 VR에 대한 보다 생생한 정보들을 수집할 수 있었다.
유적지 인근 버려진 마을
이곳에서 우리가 중점적으로 살펴보고 기록을 남긴 것은 벽을 이루는 돌들이 쌓인 패턴(유적지에서는 벽의 기반만 남아있을 뿐, 벽 자체는 무너져서 살펴보기가 힘들었다), 그런 돌벽 위로 발라서 마감을 한 진흙의 질감과 색감(유적지와 해당 마을 사이의 거리가 가까운 관계로, 같은 지질학적 배경을 지닌 소재들이었다), 건축물의 높이와 층고(역시 유적지에는 터만 남아있었기 때문에 이런 수직적인 요소들에 대한 정보가 제한적이었다), 그리고 각각 공간의 용도와 공간과 공간을 연결하는 동선이었다. 특히 실제 사람들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생생한 경관을 만들기 위해서는 이 마지막 항목이 중요했다. 물론 유적지를 대상으로 하는 많은 연구들을 통해 각각의 공간들의 용도가 충분히 추론된 자료들이 있었으나, 여전히 실제로 어떤 공간감을 지닐지가 쉬이 상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버려진 마을에는 그나마 사람들이 남기고 간 흔적들이 뚜렷했던 관계로, 이들이 공간을 어떻게 활용했었을 지를 보다 쉽게 알 수 있었다. 또 그러한 활용에 따른 공간 내 동선 역시 중요했는데, 이러한 동선을 중심으로 각종 생활소품 등이 향후 배치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분주히 오가며 각종 자료들을 수집하고 난 뒤, 발굴 단장님은 또 다른 귀한 정보를 나누어주셨다. 오래된 노트로, 마치 영화 인디아나 존스에서 갓 나온듯한 이것은 제1대 발굴단장이 해당 유적지를 최초로 발굴하고 연구하면서 남겼던 스케치북이었다.
최초 발굴 기록 노트
해당 스케치북은 그 어느 자료보다 정확하게, 그리고 알아보기 쉽게 공간을 보여주었다. 단순히 벽과 기둥과 같은 구조의 위치뿐만이 아닌, 각종 가구와 도구들이 발굴된 위치를 기반으로 한 실제 그 당시 공간의 원형을 열정적으로 추론한 자료였다. 게다가 이 노트북에 스케치를 하던 분이 얼마나 기쁘고 흥분되었을지, 그 박력이 생생히 느껴졌다. 워낙 귀한 자료인 만큼 우리는 필요한 페이지를 촬영하고 복사하는 데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자, 그렇게 우선 필요한 기본적인 정보를 모았으며 부지를 직접 살펴봄으로써 우리가 어떤 공간감을 추구해야 하는지 그 대략적인 방향성을 알 수 있었다. 이제 정확하게 어느 정도 크기의 공간을 어느 정도 수준으로 구현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클라이언트, 발굴단장님과 담판을 지어야 할 때가 왔다.
각각 Chai 한 잔씩을 앞에 두고 발굴현장이 보이는 야외 테이블 앞으로 발굴단장님과 마주 앉았다. 그 와중에도 리라 환율은 바닥없이 떨어지고 있었고 바람은 싸늘했다.
(3편에서 계속)
- 글·사진 _ 김익환 교수 · 이스탄불 공과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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