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시선] 조경가의 정원
김영민 논설위원(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 교수)라펜트l김영민 교수l기사입력2021-10-15
조경가의 정원
글_김영민(서울시립대 조경학과 교수)
정원 작가
정원박람회에 초청할 작가를 선정하는 회의에서 한 소장님께서 반대 의견을 제시하셨다.
“조경가와 정원 작가가 나누어져야 하죠? 정원도 조경의 한 분야인데 조경가면 다 정원전문가 아닌가요?
다른 소장님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반박하였다.
“보통 조경가들은 시공까지 직접 하시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정원을 다루려면 시공을 직접 관여를 해야 합니다. 일반적인 조경가와 정원 작가는 다르죠.“
두 분 모두 틀린 이야기를 하신 건 아니다. 정원은 조경의 한 분야이다. 그래서 조경가는 당연히 정원을 다룰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최근 유명한 정원 작가 중에 조경을 공부하지 않은 분들도, 딱히 기성 조경씬에서 활동하시지 않은 분들도 많다. 취미로 정원을 가꾸시는 아마추어 정원가들 중에도 전문적인 조경가의 실력을 뛰어넘는 고수들도 있다. 그러니 조경의 학제적, 업역적 자격을 갖추어야만 정원을 다룰 자격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정원은 어느 프로젝트보다도 현장에서 디자인이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꼭 직접 손에 흙을 묻히고 호미질을 해야 비로소 정원을 잘 할 수 있는 것만도 아니다. 마샤 스왈츠나 마틴 레인 카노와 같은 조경가는 직접 현장에 관여하지 않고 설계안만을 제시하여 정원을 만들었는데, 이들의 작품을 훌륭하지 않은 정원이라고 함부로 깎아내릴 사람은 없다. 오히려 식물이 없는 이 이상한 정원들은 새로운 정원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정원이 공간을 넘어 예술이 될 수 있는 문을 열어준다.
이주은의 자세히, 오래 보아야 하는 정원 / 출처: https://lhgardenshow.com ⓒ유청오
Martha Schwartz의 Garden of Labyrinth / 출처: https://msp.world/
Martin Rein-Cano의 Big Dig / 출처: https://www.topotek1.de/
조경가 대 정원가
지금이야 정원이 가장 인기 있는 조경의 분야가 되었지만, 내가 조경학과에 다녔을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조경학과에서 정원은 거의 다루지도 않았다. 조경학은 국토와 도시를 다루기 위한 계획과 설계를 배우는 학문이었지 정원의 꽃이나 풀 따위를 심는 것은 꽃꽂이에 수준의 취미 생활로 치부되었다.
이렇게 조경과 정원을 칼처럼 나눈 장본인은 아이러니하게도 조경의 아버지로 칭송받는 옴스테드였다. 옴스테드가 센트럴 파크의 설계를 진행할 때 스스로를 조경가라고 지칭하면서 현대적 의미의 조경이 성립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누군가가 어느 날 스스로 조경가로 선언한다고 갑자기 한 분야가 성립될 리는 없다. 사실 조경가가 오늘날처럼 독립된 영역의 전문가로서 인정받기까지는 많은 논란과 쟁점들이 있었다. 옴스테드가 최초의 조경가로 선언하기 이전에도 누군가는 정원을 만들고 공원을 설계해왔다. 스스로 경관정원가(Landscape Gardner)라고 불렀던 이들은 옴스테드가 조경가라는 말을 사용하기 시작했을 때 강하게 반발하였다. 이 분야의 뿌리는 정원이며 정원가가 엄연히 존재하는데 왜 굳이 건축가에서 차용한 조경가(Landscape Architect)라는 개념을 만드느냐는 것이었다. 특히 당시 정원에 대한 글을 많이 쓰던 저명한 작가 반 렌셀리어(Marianna G. Van Rensselaer)는 공개적으로 조경가의 개념에 반대하였는데, 옴스테드는 수차례 서신을 보내 조경가라는 개념의 정당성을 설득하기 위해 노력했다. 결국, 현대적 의미의 조경을 만들어내기 위해 옴스테드를 비롯한 초창기 조경가들은 스스로를 정원가와 차별화해야 했다. 조경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조경의 토대였던 정원을 버려야 했던 것이었다.
1899년 미국조경가협회가 만들어지고 1900년 미국 하버드 대학에 최초의 조경학과가 만들어지면서 논쟁의 종지부를 찍고 공식적으로 조경이 정원에 승리를 거두게 된다. 조경은 정원사의 영역이 아닌 더 큰 국토와 도시, 그리고 환경을 다루어야 했기 때문에 전통적인 정원의 지식은 조경학과의 교육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져 정원은 조경학과에서 없으면 안 되지만 그렇다고 주인공이어서는 안 되는 천덕꾸러기처럼 남게 되었다.
정원과 꽃
사람들은 정원을 좋아한다. 어머니들은 큰 상을 받은 건축물보다 정원박람회를 좋아하신다. 교과서에 실린 공원보다 작은 가게 앞의 정원에서 찍은 인스타그램이 훨씬 많다. 내가 정원을 찾은 이들에게 왜 정원을 좋아하냐고 물었을 때 가장 많이 들은 대답은 “꽃이 예뻐서요”이다. 정원 작가들의 인터뷰와 정원 서적들에 등장하는 심오한 정원의 의미에 비하면 너무 뻔한 직설적인 답. 대개 가장 단순한 답이 진실에 가장 가까운 경우가 많다.
정원에서 모두의 시선을 처음 사로잡는 것은 화려한 해당화나 바람에 흔들리며 군무를 펼치는 구절초 군락, 혹은 신비한 황금자주달개비이다. 하지만 정원에 꽃이 다는 아니다. 꽃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지고 싶다면 다면 플로리스트의 작품이나 꽃집에서 정성스럽게 선택해준 꽃다발이 더 매력적일 수도 있다. 그와 반대로 식물들이 만들어내는 자연스러운 조화를 만끽하고 싶다면 정원이 아닌 숲을 찾아가는 편이 좋다. 정원에서는 꽃과 잎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이 아니라, 정원이 만들어내는 분위기에 스며든다고 하는 것이 맞다. 분위기에 스며든다는 것은 경험이 확장되어 가는 과정이다. 하나의 꽃은 주변의 꽃과 어우러진다. 꽃의 경험은 풀과 바위가 만들어내는 무대로 확장된다. 작은 정원의 장면은 바람과 햇살과 어떤 날의 온도를 떠올리며 하나의 작은 풍경이 된다. 그 경험은 꽃을 바라보는 나, 혹은 정원의 일부가 되어있는 나로 돌아온다.
희원의 해당화 ⓒ김영민
작약과 황금자주달개비 ⓒ김영민
나의 정원
회현동의 핫플레이스에서 정원에 대한 전시가 열렸다. 비싼 입장료를 내고 정원의 이야기를 보러 한껏 멋을 낸 젊은 힙스터들과 나들이를 나온 어머니들이 함께 있는 모습이 꽤 낯설면서도 신기하였다. 이번 전시에 맞춰 건물 옥상에 작은 정원이 만들어졌는데, 이 정원은 전시의 마지막 기획이기도 했다. 일상의 삶에서 자신만의 정원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실제 작가의 정원을 하나로 묶은 기획도 좋았지만, 옥상에 마련된 이 정원은 그 자체로 좋은 정원은 어때야 하는지를 너무나 잘 말해주고 있었다.
정원은 화려하지 않다. 불꽃놀이처럼 감각을 한 번에 사로잡는 웅장한 오케스트라의 협주는 아니다. 오히려 정원은 하나의 음악을 연주하지 않는다. 어디선가 시골 할매의 흥얼거림이 흘러나오기도 하고, 다른 방향에서는 세련된 독주곡이 연주되고 있다. 앉으면 바람 소리에 간간이 선사의 풍경 소리가 섞여서 들려오기도 한다. 어디서 음악이 들리는지를 귀를 기울이면 꽃이 있다. 작은 음들이 모여 예쁜 소리를 내는 구절초가 있고, 하나하나의 음색이 돋보이는 용담이 피어있다. 무궁화가 이런 것이었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웅장한 무궁화와 마주치기도 한다.
정원은 작다. 옛 건물을 수리한 옥상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 꽃이 심긴 화단은 1m 폭이 채 안 되기도 한다. 공간도 네모반듯하지 않고 옥외수전이나 엘리베이터 시설 등 잡다한 시설물도 튀어나와 있다. 게다가 개인을 위한 정원이 아니니 방문객들이 돌아다니기도 하고 쉴 자리도 필요하다. 그런데도 정원은 크게 느껴진다. 고개를 들어 한발 물러서서 정원을 보면 사실 내가 보던 것은 큰 도시의 풍경이기도 하고 원래 있는 숲의 나무가 만들어내는 풍경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조금 더 세심히 귀를 기울이면 이 정원의 음악은 단순히 배경의 도시와 숲의 풍경이 만들어내는 것도, 플랜터에 심긴 꽃과 풀과 돌의 연주도 아님을 알게 된다. 정원을 통해 풍경을 봄으로써, 그리고 풍경 안에서 정원을 느낌으로써 이 음악이 가능해진다. 이 정원의 영역은 옥상에 국한되지 않지만 그렇다고 밖의 풍경이 주인공인 작품도 아니다. 꽃 한 송이에, 돌 하나에 집중하게 되지만 동시에 남산 자락에서 흘러나온 큰 나무가 이루는 하나의 흐름을 동시에 경험한다.
하나의 정원인데 여러 세계가 담겨있다. 작은 정원인데 큰 풍경을 이룬다. 유마경(維摩經)에는 “수미입개자중(須彌入芥子中)”이라는 말씀이 있다. 삼라만상이 작은 겨자씨에 담겨있다는 뜻이다. 좋은 정원은 큰 풍경을 품고, 온 세계를 담는다. 이 정원은 우리나라 최고의 조경가 정영선 선생님의 작품이다. 좋은 조경가는 당연히 좋은 정원을 만들어야 하고, 좋은 정원을 만들 수 있다면 마찬가지로 좋은 조경을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모든 조경가가 좋은 정원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조경가 큰 풍경과 넓은 세계를 다루려면 꽃 한 송이와 풀 잎사귀 하나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꽃잎 하나에 거대한 산이 담겨있고 큰 바다가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정영선의 나의 정원1 ⓒ김영민
정영선의 나의 정원2 ⓒ김영민
- 글·사진 _ 김영민 교수 · 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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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mkim@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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