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시선] 도시공원정책은 행정을 이끄는 리더의 의지에 달려있다

김수봉 논설위원(계명대 생태조경학과 교수)
라펜트l김수봉 교수l기사입력2017-05-24
도시공원정책은 행정을 이끄는 리더의 의지에 달려있다



_김수봉 교수(계명대 생태조경학전공)




필자가 2014년 번역한 벤 휘태커와 케네스 브라운의 공저 “우리의 공원”(원제: Parks For People)은 1970년대 영국의 도시공원이 왜 몰락했는지에 대한 이유를 다양한 관점에서 분석하고 있다. 이 책의 저자들은 도시공원이 시민을 위한 공원이 되기 위한 실질적인 아이디어를 여러 나라의 많은 예시를 통해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은 많은 외국의 예 중에서 도시민으로부터 외면 받았던 뉴욕의 도시 공원이 어떻게 시민들의 생활의 일부로 만들었는지 도시의 행정을 이끄는 리더의 역할을 특히 강조하고 있다.

1965년 이전까지 뉴욕의 도시공원은 뉴욕시민들에게 어떠한 역할도 하지 못하고 있었으나, 독특한 방식과 뛰어난 능력을 가진 톰 호빙(Tom Hoving 1931-2009)이라는 젊은 국장이 취임하면서 1965년부터 큰 변화가 일어났다고 한다. 당시 뉴욕의 공원 중 주민들이 이용하지 않아 황폐해진 브루클린(Brooklyn)의 프로스펙트파크(Prospect Park)는 방문객수가 15년간 1/3이 감소했다. 그리고 한 때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센트럴파크(Central Park)도 공원 내 빈번한 강도 사건과 문화파괴행위(Vandalism)로 인해 공원 이용자들이 낮에도 안심하고 이용할 수 없었고, 밤에는 생명까지 위협을 받는 상태에 이르렀다. 그러자 당시 사회풍자로 유명했던 코미디언 레니 브루스(Lenny Bruce)는 ‘센트럴파크에서 볼 수 있는 여자라고는 범인을 잡기 위해 여자로 변장한 경찰관 뿐’ 이라고 공원의 실태를 비꼬았다고 한다.

도시문제 전문가 제인 제이콥스(Jane Jacobs)는 1961년에 쓴 그녀의 책 〈미국 대도시의 쇠퇴와 발전, The Death and Life of Great American Cities〉에서 ‘도시민들로 하여금 공원을 자주 이용하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안전체제’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톰 호빙은 공원을 뉴욕시민들을 위한 생활의 중심지로 만드는 계획에 착수했다. 그는 직접 주민들의 의견을 경청하여 지역 주민들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를 알아내었으며, 그 결과를 토대로 적어도 주택단지 8개소에 하나정도의 공원과 비슷한 형태의 녹지를 조성하였다고 한다. 건설 예정지로 되어있던 공지는 소공원이나 어린이들의 놀이터로 사용하게 했고, 상업지구나 사무실건물의 옥상은 그곳에 근무하는 사람들을 위해 녹지를 조성하여 근무자들의 오아시스로 만들었다. 톰 호빙은 주말에는 센트럴 파크에 자동차의 접근을 통제하고 대신 이용자들에게 자전거를 대여하였는데, 그 결과 범죄는 감소하고 뉴욕 중심지역 사람들이 센트럴 파크로 모여드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호빙의 노력으로 1965년 이후 센트럴 파크 이용객은 매년 10%씩 증가했다. 톰 호빙은 그의 후계자인 오거스트 헥셔(August Heckscher)와 협력하여 사람과 건물이 밀집한 뉴욕의 슬럼지역에도 그곳 빈민들을 위하여 새로운 공원과 60개의 어린이용 수영장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결정적으로 센트럴 파크와 프로스펙트 파크(Prospect Park)를 조성 초기의 모습으로 복원시키는 작업을 시작했다. 이러한 공원 행정가의 탁월한 리더십은 시민들의 주변 공원에 대한 관심을 가져왔고, 이러한 시민들의 관심은 1967년 메트로폴리탄 오페라(Metropolitan Opera)가 뉴욕의 시내 여러 공원에서 최초 무료야외공연 행사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한편 시인들도 공원에서 시낭송회를 개최했는데 이전에는 이런 시인들의 모임이 불법행사였다고 한다. 1997년 4월 7일자 뉴욕 타임스(New York Times)의 오거스트 헥셔의 추모 기사는 “헥셔가 뉴욕 공원국장으로 재임 중 가장 주목할 만한 일은 1967년 25만 명의 관중이 운집했던 당대 최고 가수였던 가수 바바라 스트라이샌드(Barbra Streisand)의 센트럴파크 공연과 1970년에 열린 센트럴파크의 뉴욕 마라톤 대회 그리고 공원 내에서의 크고 작은 규모의 반전집회를 허가한 것” 이라고 썼다. 공원 행정가들이 기획했던 공원 내에서의 연 날리기 대회와 패션쇼(Fashion Parade)에는 관중이 늘 가득했다고 한다. 예술가들은 다양한 주제의 키네틱아트(Kinetic Art)작품으로 행사장 주변을 장식했다. 한편 뉴욕의 도시공원국은 도로의 보도를 그림으로 장식하는 대회를 열었으며, 5,000명의 시민들은 주최 측에서 제공한 분필을 사용하여 보도에 설치된 90미터 길이의 캔버스에 그림 그리는 행사에 참여했다.

이러한 공원의 변화로 인해 무엇보다도 뉴요커들은 뉴욕에 대해 더 이상 불평불만을 늘어놓지 않았고, 그들의 도시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아울러 그들은 이웃과 서로 대화하기를 시작했으며, 이러한 기적이 있었기에 뉴욕은 시민들의 낙원이 되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뉴욕의 도시생활에 “도시공원이라는 새로운 관점”이 추가되었다. 톰 호빙은 뉴욕 도시공원국장을 성공적으로 마친 후 1967년부터 1976년까지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의 관장을 역임했으며, ‘(2차 대전 이후)가장 창조적이며 영향력 있는 박물관 행정가’로도 그 능력을 인정받은 인물이었다. 뉴욕시에서 보듯이 도시공원정책의 성공여부는 행정을 이끄는 리더의 의지에 달려있다고 필자는 믿는다. 그 리더들은 ‘공원이 시민의 것’임을 알고 있었으며, ‘공원을 시민들에게 돌려주려고 모든 노력’을 다했다. 필자는 우리나라의 공원녹지 담당 공무원들께 이 책의 일독을 권하며, ‘공원은 시민의 것’임을 잘 아는 우리의 “톰 호빙”이 탄생하기를 기대한다.


_ 김수봉 교수  ·  계명대학교 생태조경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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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kim@km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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