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시선] 누구도 아닌 우리의 에덴

김수봉 논설위원(계명대 생태조경학과 교수)
라펜트l김수봉 교수l기사입력2018-05-02
누구도 아닌 우리의 에덴



_김수봉(계명대학교 공과대학
도시학부 생태조경학전공 교수)



영국 유학 중이던 1992년 리우환경회의가 열렸다. 그 회의에서 채택된 리우환경선언문은 원칙20에서 환경관리와 개발을 위한 여성의 역할과 그 중요성을 인식하고, 지속가능성의 성취를 위해서 여성의 참여가 반드시 수반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당시 나는 공원녹지계획과 정책에 관한 학위논문을 준비하면서 ‘공원녹지와 젠더(Gender)’라는 주제에 관한 글을 한참 쓰고 있었고 후에 그 주제는 박사 학위논문의 한 장으로 소중하게 남았다. ‘공원녹지와 젠더’를 공부할 때 필자는 지속가능한 도시개발을 위해서는 공원녹지의 사회적인 의미를 주민의 입장, 특히 여성의 입장에서 새롭게 파악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지방자치시대의 공원녹지정책은 ‘지금까지 모더니즘시대의 도구적 이성에 의한 남성과 생산자 중심에서 포스트모던 시대의 여성과 소비자가 그 권위를 발휘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사고가 전환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귀국 후 박사논문을 바탕으로 쓴 논문을 A학회에 투고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학회에서 보내준 논문 심사 의견서에는 “여성만의 의견은 의견이라 할 수 없으니 남성과 비교된 연구결과로 다시 투고해 달라”고 하였다. ‘공원녹지정책에 대한 여성대학생만의 의견’은 학회에서 수용할 수 없다는, 요약하면 논문의 질이 형편없어서가 아니라 단지 논문 주제가 여성대학생만의 의견이라서 게재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혹시 내 이름이 가수 심**을 닮아 나를 여성 연구자라고 생각하고 그런 의견을 보낸 것은 아닐까? 아니면 정말 형편없는 논문인데 그 정도로 의견을 순화해서 심사의견서를 써 주지는 않았을까? 등과 같은 우습지만 그때 그런 생각을 했다.

작년부터 조경을 사회학이라는 관점에서 새롭게 조명 해볼까하는 생각도 들고 해서 지난 자료들과 논문들의 데이터를 다시 읽고 재해석을 시도하다가 “도시라는 아이디어 자체가 젠더화된 이분법에 기초하기 때문이며,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만 해도 그곳은 ‘남성’ 시민권자들의 전유물이었지 여성과 노예, 어린이는 논의 대상에서부터 제외 되었다. 근대적 시민들의 공론장이라고 불리는 광장도 알고 보면 남성들의 전유물”이라는 정현주 교수의 글을 읽고 속으로 유레카를 외쳤다. 그랬다 그때 A학회지는 고대의 폴리스처럼 오직 남성의 전유물이었으며, 여성은 논문의 대상에서 제외된 주제가 아니었을까?

필자가 ‘공원녹지와 젠더’에 대한 주제를 연구할 무렵, 실제 베를린에서 행한 여성의 도시공원이용에 관한 연구에 의하면 공원구역 전체를 이용하는 여성은 극소수였는데 그 이유가 공원 내부를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는 부랑자들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융페른하이테 공원을 이용할 때 대부분의 여성 인터뷰 응답자들은 부랑자들의 폭력이나 공격으로부터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호수 근처나 넓은 잔디밭’ 주위만을 많이 이용한다고 응답하였다. 이외에 많은 관련 연구들이 여성들의 도시공원 이용의 동기나 태도가 남성과는 사뭇 다르다는 결과를 발표했다. 이러한 당시의 연구를 바탕으로 필자가 A학회지에 투고한 논문은 심리치료에 사용되는 ‘심층 소규모 그룹 토론 방법(In-depth small group discussion method)’을 사용해서 여성대학생 그룹과 4주에 걸쳐 대구시의 공원녹지에 대한 심층 토론을 분석한 ‘여성의 공원녹지에 대한 가치와 태도’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것을 요약하면 토론 참여자들은 생활환경 주변에서 발견되는 공원녹지를 좋아하였다. 그리고 그 공원녹지 자체가 가지는 특성이나 분위기 그리고 추억이나 아름다운 기억 등과 관련하여 그들의 생활 속에서 자주 접하는 녹지공간에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공원이용자의 반은 여성이다(더블린 피닉스파크에서)

또 여성대학생들은 공원에 직접 가거나, 아파트베란다에서 그리고 등·하교 길 버스 안에서 도시의 자연인 공원녹지를 몸과 마음으로 접하고 있음을 토론에서 보여 주었다. 여성대학생 토론자들이 바라는 공원녹지의 이상적인 모습은 집이나 직장에서 쉽고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공원녹지가 있었으면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대학생들은 대구의 부족한 공원녹지의 대안으로 작은 규모의 체육공원의 개발과 학교운동장의 개선 및 동네 자투리땅의 활용을 제안했다. 특히, 여성토론자들은 공원녹지 내에서의 각종범죄의 위협과 공격 그리고 반달리즘의 공포에서 자유로운 도시공원을 원하고 있었다.

다른 학회지에 투고한 논문에서 필자는 “비록 소수의 여대생들이 모여 도시녹지와 환경의식을 주제로 토론한 내용을 오늘날 우리의 도시가 안고 있는 환경과 녹지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일반화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러나 세상은 바뀌고 있으며 우리 조경분야에서도 지속가능한 사회의 구현에 조금이라도 기여하기 위한 한 가지 방법으로 도시개발의 정책결정과정에서 여성의 목소리를 조금이라도 반영해 줄 수 있는 제도적 뒷받침과 꾸준한 연구와 우리 모두의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러한 모두의 노력이 결실을 맺을 때만이 진정한 우리 모두를 위한 도시공원이 탄생할 것이며 아울러 이와 관련된 후속 연구가 뒤따라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뒤로 필자는 더 이상 젠더에 관한 연구를 하지 않았고, 아쉽게도 이 주제에 관심을 두는 제자도 없었다. 그리고 최근 공원이용의 사회학이라는 책을 준비하면서 검색해 본 조경관련 학회지에서도 도시공원과 젠더에 관한 국내 논문을 찾기는 어려웠다.


조경이 만드는 에덴은 누구의 것도 아닌 우리의 것이다(더블린 동물원에서)

나에게 조경은 ‘도시에 에덴(Garden of Eden) 만들기’다. 고대 그리스로부터 공공녹지는 도시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리스인들은 신에게 작은 숲을 바치고, 신탁을 받던 신전에는 정원이 딸려 있었다. 페르시아에 망명했다가 그리스로 돌아온 역사가 크세노폰(Xenophon)은 페르시아 왕이 소유했던 향기가 많은 관목과 꽃과 열매를 맺는 과수에 둘러싸인 정원인 파이리다에자(Pairi-daeza)를 극찬했다고 한다. 그것이 그리스말로 번역된 파라데이소스(Paradeisos)였고 영어의 파라다이스(Paradise), 즉 정원은 낙원이었던 것이다. 원래 에덴의 기원인 파이리다에자는 왕이나 소수 권력자를 위한 정원이었지만, 에덴(Garden of Eden)은 모든 동식물과 남녀가 동등한 권리와 즐거움을 동시에 누렸던 공공의 정원이었다.

지금까지 도시의 모든 공공공간은 남성위주로 계획되고 조성되었다. 사회적 약자인 여성이나 노인 그리고 아이들을 배려해서 조성된 공간은 찾기가 쉽지 않다.

여성이라고 사회적 약자라고 공공공간에 접근하고 그 공간을 이용하는 권리가 제한받거나 무시당해서는 안 된다. 도시의 낙원은 우리 모두의 것이어야 하며 지속가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조경이 좀 더 따뜻한 시선으로 여성을 포함한 사회적 약자들을 바라보아야 한다. 도시의 공공공간은 우리 모두의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조경의 시작은 바로 도시에 만드는 에덴이 ‘누구도 아닌 우리의 에덴’이라는 생각에서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글·사진 _ 김수봉 교수  ·  계명대학교 생태조경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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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kim@km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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