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시론] 자인의 거리, 블라디미르의 정원

김영민 논설위원(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 교수)
김영민 교수-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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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펜트l기사입력2019-04-09
자인의 거리, 블라디미르의 정원


_김영민(서울시립대 조경학과 교수)



가버나움은 레바논 영화다. 영화는 하늘에서 촬영된 베이루트의 슬럼가를 보여주며 시작한다. 거리는 빠져나올 수 없는 미로처럼 뒤얽혀 있고 헐벗은 태양 아래 아이들은 아이들의 놀이를 한다. 부모가 출생신고를 하지 않아 나이를 정확히 모르는 소년 자인은 이 거리에서 산다. 자인은 낮에 누이들과 거리에서 과일이나 음료를 팔고 해가 지면 가스통을 배달한다. 집에는 생계를 걱정하지만 아무런 대안도 없는 부모가 있고, 아이들은 아무렇게나 뒤엉켜 자고 일어나 다시 거리에 나간다. 자인은 천진난만한 아이가 아니다. 거친 욕을 해대며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 누이들을 챙긴다.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이미 “사는 게 개똥 같다”는 걸 알고 있다. 식료품 가게 주인에게 누이가 팔려가자 자인은 자책감을 안고 무작정 거리를 떠난다. 자인은 놀이공원에서 청소일을 하는 라힐을 만나 도움을 받는다. 불법체류자인 라힐이 걸음마를 막 시작한 아들 요나스와 자인을 집에 두고 나갔다가 이민국에 잡혀가자 자인은 자신이 돌봐주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아이를 안고 살아가려 애쓴다. 집세가 밀려 살던 집에서 쫓겨나자 자인은 인신매매를 하는 브로커에게 요나스를 넘기고 외국으로 밀항을 하게 해달라고 한다. 신분증이 필요하다는 말에 자인은 집으로 돌아왔다가 성적학대 끝에 누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식료품 가게 주인을 칼로 찔러 체포가 된다. 자인은 감옥에서 자기를 태어나게 했다는 이유로 부모를 고소한다. 재판장은 자인에게 물어본다. 부모가 어떻게 하기를 바라냐고? 자인은 더는 나 같은 삶을 살 동생을 낳게 하지 말아 달라고 한다. 

이 지옥도 같은 소년의 서사에 눈을 돌려버릴 수 없는 이유는 삶에 대한 응시가 정의를 위한 고통스러운 고발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태어난 것을 끊임없이 저주하는 자인이 살아갈 수 있고, 살아가야 할 이유는 고통과 착취의 밑바닥에 남겨진 마지막 인간의 선의 때문이다. 자인이 굶주리고 있을 때 손을 내밀어준 청소부 라힐. 자인에게 말을 걸어주고 음식을 건내는 꽃을 파는 난민 소녀. 유치장에 잡혀 온 라힐에게 위로를 해주러 온 수도승들. 하지만 이보다 더 무겁고, 뜨거우며, 무서운 선의는 타인에게 받은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줄 것이 없는 상황에서 나보다 약자를 위해 건네야 하는 자인의 선의이다. 내가 없으면 나보다 더 삶이 비참한 동생 이잠과 요나스를 위해 똥 같은 삶을 살아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선하고 슬픈 소년의 눈빛은 섬뜩하고 절망적인 현실을 비현실적으로 아름답게 만든다. 자인은 전문 배우가 아니라 실제로 거리에서 배달일을 하는 난민 출신의 소년이다. 동생 이잠도 길거리에서 껌을 팔던 소녀이며, 라힐도 불법체류자이다. 요나스역을 맡은 아이의 부모도 불법체류자로 아이를 남겨두고 강제추방 되었다고 한다. 영화 속의 삶이 허구가 아닌 실제 삶이라는 사실이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다가와 어설픈 동정도, 공감도 함부로 할 수도 없게 한다. 영화의 제목 “가버나움(Capharnaum)”은 영어사전에서 찾으면 “뒤죽박죽의 혼란스러운 잡동사니, 무질서하게 물건을 쌓아놓은 장소”라는 뜻이다. 동시에 가버나움은 지명인데, 예수가 사도들을 만나 기적을 행하고 복음을 전파하던 장소라고 한다. 


Square Four, Beirut, Lebanon  https://www.asla.org/2010awards/069.html


Gebran Tueni Memorial, Beirut, Lebanon ⓒ https://www.asla.org/2014awards/059.html


Aga Khan Park, Toronto, Canada ⓒ https://www.agakhanmuseum.org/

블라디미르 드로빅(Vladimir Djurovic)은 레바논의 조경가이다. 단언하건대, 블라디미르는 현재 활동하는 조경가들 중에 가장 시적인 작품을 만들어 내는 작가이다. 나는 설계를 하는 후배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아무도 이 작가를 모른다기에 의외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미 미국조경가협회에서 매년 최고의 작품에 수상하는 ASLA 어워드를 이미 네 번이나 받은 저명한 조경가이기 때문이다. 생소한 이름의 작가를 궁금해 하던 조경가들에게 그의 작품을 보여주었을 때 반응은 그저 그랬다. 요즘 우리가 멋지다고 생각하는 조경의 취향에 맞지는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그의 작품은 단순하다. 형태, 재료, 식재 모든 것이 극도로 절제되어있다.

스퀘어 포(Square Four)는 베이루트 중심에 있는 작은 광장이다. 단 차이가 있어 거리에서 들어 올려진 느낌의 광장은 데크와 수반으로 구성되어있다. 예전부터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큰 무화과나무 두 그루가 짙은 녹음을 드리운다. 수반은 주변의 모스크와 교회, 그리고 거리를 그대로 비춘다. 광장의 설계는 그곳의 장소성 이외에는 아무것도 더하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것이 저마다의 신념과 증오로 뒤얽힌 베이루트의 도심에 의미를 제거함으로써 장소를 드러낸다. 나무가 물 위에 떠 있는 듯한 착각에 이끌려 광장에 들어서면 나는 거리에서 이격되고 녹음 아래 현실에서 잠깐이나마 벗어난다. 그가 설계한 두 메모리얼은 대조적이다. 암살당한 총리를 위한 하리리 메모리얼(Hariri Memorial)은 경사진 삼각형의 부지에 있다. 삼각형의 어느 각과도 일치하지 않는 어긋난 기하학적 형태는 이 땅에 강한 존재감을 부여한다. 잔디와 현무암의 단과 물의 단. 그리고 길가를 따라 심긴 나무는 가장 단순한 방식으로 베이루트에 없던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낸다. 반면, 죽은 언론인을 기리는 투에니 메모리얼(Tuneni Memorial)은 사람들이 늘 지나다니는 거리에 있다. 검은 화강석, 잔디, 자갈로 구성된 선형의 공간을 지나다니며 사람들은 이곳이 다르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 다름은 낯섦이 아니라 늘 주변에 있던 재료의 다른 배열을 통해 드러나는 새로움이다. 

사실 블라디미르는 공공프로젝트가 아니라 고급주택의 정원설계를 통해서 유명해졌다. 정원이지만 최소의 식재만을 사용하며 절제된 재료를 사용하는 그의 모던한 설계는 레바논뿐 아니라 아랍 부호들의 고급스러운 취향에 잘 맞았다. 최근에 캐나다 토론토에 완성된 아가 칸 공원(Aga Khan Park)은 그의 절제된 설계 언어의 정점을 보여준다. 페르시아 전통조경의 구성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하얀 바닥과 검은 수반의 기하학적 배치는 현대 추상화를 연상시키는 백과 흑의 미학을 보여준다. 열식된 벚나무와 라벤더의 정원의 분홍과 보라는 시간의 색으로 흑백의 추상적 영원성을 잠시나마 무너뜨리고 봄과 함께 사라진다.

블라디미르의 조경은 모순적이다. 그는 전쟁으로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피폐해진 베이루트의 공공장소를 다루었다. 기독교도와 회교도가 절반으로 구성된 레바논은 15년의 내전을 겪었다.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12만 명을 서로 죽였고, 그 과정에서 시리아, 이스라엘의 주변국이 번갈아 가며 레바논을 점령했다. 모스크와 교회가 마주보는 베이루트에서 증오와 상처는 봉인된 채로 침묵하고 있다. 이 도시에서 공공장소를 설계한다는 것은 함부로 치료할 수도 없는 이런 감정과 의미를 다룬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부호들의 저택과 별장을 위한 고급스러운 작품을 만들어왔다. 상상을 초월하는 부를 거머쥐고서도 전쟁과 기근으로 뒤엉킨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눈을 돌린 왕족과 종교지도자들의 가장 사랑받는 조경가가 되었다. 저예산의 공공프로젝트나 개인의 고급정원을 관통하는 블라디미르 조경의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시적인 예술성이다. 어쩌면 블라디미르의 조경은 단 한 번도 모순적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예술성은 도덕의 잣대나 정치적인 가치와는 무관하다. 어떠한 성격이든, 어떠한 조건이든, 블라디미르는 조경을 통해 일관된 미학의 예술성을 보여주었고 그것이 그가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들게 하였다.






가버나움 ⓒ https://movie.naver.com/

위대한 사상가들은 한결같이 예술이 시대의 구원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들의 글을 꼼꼼히 따라가면 예술이 지닌 구원의 가능성을 알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나는 아직 예술이 어떻게 시대가 아닌 자인이라는 아이를 구원할지는 잘 알지 못한다. 지금도 베이루트의 길거리에서 과일을 컵에 담아 파는 이잠들에게, 자기 몸만한 가스통을 배달하는 자인들에게, 어린 아이를 집에 남겨두고 강제로 추방되어야 하는 라힐들에게, 블라디미르의 시적인 조경이 어떤 구원을 줄 수 있는지는 알 것 같기도 하고 영원히 모를 것 같기도 하다.
_ 김영민 교수  ·  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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