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시선] 조경의 죽음

김영민 논설위원(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 교수)
라펜트l김영민 교수l기사입력2019-07-31
조경의 죽음


_김영민(서울시립대 조경학과 교수)




Manfredo Tafuri / Casabella


…내 에세이는 묵시적 예언으로 간주할 수 있다. 포기의 표현이며,
건축의 죽음에 대한 궁극적 선언 말이다.
                                                                      - Manfredo Tafuri

조경이 위기라고 한다. 대학이 학생의 감소로 조경학과를 통폐합하면서 학문적 정체성은 점점 모호해져 가고, 토목과 건축이 주도하는 건설 산업에서 조경은 스스로 시장을 창출하고 이끌어 나아갈 힘이 부족하다. 도시재생이라는 큰 계획적 패러다임의 전환기에서 조경가의 역할은 모호하게만 보인다. 게다가 전통적으로 조경가가 맡아오던 의미 있는 공공의 영역은 건축가들이 차지하여 조경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지고 있다. 이대로 가다가 조경이라는 분야가 사라지게 되지 않을까라는 섬뜩한 우려도 농담처럼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희망적인 기대와 함께 새로운 방향을 찾기 위한 논의들도 공존한다. 조경의 기술적인 전문성을 차별화하면서 새로운 분야와 접목하려는 시도들이 나타나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의 흐름에 맞추어 빅데이터 분석과 VR, AR 같은 새로운 기술을 적극적으로 조경의 연구와 설계에 도입하고 있다. 또한, 과감하게 교육 체계를 국가직무능력표준에 맞게 바꾸고 설계와 역사이론 교육을 축소하자는 의견도 있다. 심지어는 대학 평가에서도 취업률이 중요하며 학생들도 최대의 목표가 취업이니, 아예 대학에서 공사나 대기업 입사시험을 대비한 교과목을 만들자는 실로 혁명적인 주장들도 들려오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노력과 기대가 실현되면 이제 조경은 괜찮은 것인가? 조경을 하는 우리 모두가 남부럽지 않게 먹고살 만하게 된다면 우리는 더는 조경의 죽음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가?

타푸리는 1969년 “건축 이데올로기의 비판을 향하여(Toward a Critique of Architectural Ideology)”에서 건축의 종말을 선언한다. 그 죽음은 자기 살해의 형태로 표현된 자발적인 포기가 아니라 신이 예정한 종말처럼 그 어떠한 노력을 한다 하더라도 피할 수 없는 운명적이고 절망적인 형태의 죽음이었다. 

건축의 종말에 대한 타푸리의 묵시적 서사는 18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753년 프랑스의 수도사 로지에(M. A. Laugier)는 숲으로서의 도시 모델을 제시하면서 도시의 설계는 공원을 설계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구의 전통에서 늘 도시는 문명과 이성의 상징으로서 비이성적인 혼돈을 상징하는 자연과 대립적 구조를 형성해왔다. 그런 의미에서 도시를 자연적 현상으로 환원하려는 로지에의 전환은 혁명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왜 로지에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도시와 자연을 통합하려 했을까? 새로운 자본주의 체제가 등장하면서, 근대적 합리성에 근거하고 있다고 여겨지던 구체제가 더는 작동하지 않을 징후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17C 바로크적 자연관을 18C의 낭만적이고 경험적이고 자연주의로 대체함으로써 생산 구조와 체제 사이의 균열은 일시적으로 봉합된다. 건축은 이러한 변화의 상황에서 이국적 요소와 과거의 양식을 무분별하게 조합하는 절충주의를 추구하거나, 이미 생명을 다한 고전적 합리주의로 회귀하는 길을 택했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건축가 피라네시(Giovanni Battista Piranesi)는 지옥과도 같은 이미지를 통해 합리적인 건축의 이상이 도시의 영역에 실현되었을 때 내재된 비합리성을 고발한다.


피라네시의 “로마의 건축(Le Antichità romane)” / University of Wales, Trinity Saint David


피라네시의 “상상의 감옥(Le Carceri d'Invenzione)” 연작 중 “고문대의 사람” / Princeton University Art Museum

건축이 직면한 형태의 위기는 결국 도시는 이상적 건축의 집합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건축의 무능은 역설적으로 자연의 이미지가 투영된 낭만주의적 도시가 허구의 이데올로기적 장치에 불과하였다는 사실을 드러내었다. 새로운 대안이 필요하였다. 유일한 길은 가상의 유토피아를 추구하기보다 현실을 직시하고 수용하는 것이었다. 도시가 유토피아를 위한 예정된 장소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기술적 생산품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낭만적 이상은 폐기되고 사물의 논리와 정치가 예술에 수용된다. 인상주의 화가들이 추구한 과학적 빛의 탐구는 이러한 새로운 방향을 무의식적으로 보여준다. 이제 사실적 유토피아주의는 유토피아적 사실주의와 결합되어 새로운 모더니즘을 탄생시킨다. 예술은 전위부대의 역할을 자처하였고, 새로운 이데올로기적 임무를 요청하였다. 20세기의 모더니즘 예술은 낭만적 신화를 극복하고 욕망과 체제 사이의 균열을 봉합할 대안을 탐색하는 위대한, 그러나 결국 거짓으로 판명될 비극적 사명을 수행하게 된다.

막스 베버는 과학을 가치로부터 해방시킴으로써 과학을 이데올로기로부터 완벽히 분리한다. 이러한 선언은 역설적으로 체제가 그 안에서 부정된 요소를 분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렇다면 긍정과 부정은 어떻게 하나의 체계 안에서 작동할 수 있는가? 자본주의가 자신을 살해할 운명을 타고난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필연적 일부로 인정한 이상, 20세기의 유토피아는 잠재적 위협을 제거하면서 미래를 보장할 대안을 찾아내야 했다. 입체파는 과잉된 진실을 투여하는 방식으로 기존의 가치관에 충격을 주고자 했지만, 결국 자본주의적 도시가 만들어낸 새로운 자연의 실재를 제공함으로써 체제에 봉사한다. 다다와 초현실주의는 부르주아의 역사적 전통을 완전히 파괴하여 해방의 가능성을 찾고자 했지만, 결국 그 파괴적 가치는 부르조아적 가치를 대변하는 새로운 예술을 정초할 토대를 제공한다. 아방가르드 예술이 발견한 모더니즘의 방향은 결국 자살로 이르는 길이었는데, 하나는 모순을 이상화함으로써 소리 없는 도시의 체계 속으로 침잔해 들어가는 것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비합리적 예술의 소통 방식을 기존 체계에 폭력적으로 삽입하는 것이었다. 막다른 길에 도착한 예술은 결국 그 구원의 임무를 건축에게 위임할 수밖에 없었다.

새롭게 선봉에 선 모더니즘 건축은 형태의 창조자로서 건축가의 역할과 전통적인 건축의 모든 토대를 폐기하고 생산 과정의 조정자가 되고자 하였다. 막대한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건축은 실재의 경계에서 유토피아를 실현하고자 한다. 이를 가장 완벽한 형태의 모델로 제시한 것은 르 꼬르뷔지에(Le Corbusier)였다. 그는 계획을 통해 정신적 생산의 최대치와 프로그램적 생산의 최대치가 일치될 수 있으며, 질서는 다양성의 형태로 무질서를 흡수하여 체제 내부의 불가능성을 화해시킬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건축이 완전히 자본주의적 생산의 영역에 들어온 순간 건축은 계획의 주체가 아니라 객체가 될 운명에 처해 있었다. 건축적 이상은 이윤의 원칙으로 환원되며, 건축의 혁명은 건축을 가치 판단의 대상이 아니라 사용되고 살기 위한 기계적 프로세스로 만들어 버린다.


르 꼬르뷔지에의 빌라 사보아(Villa Savoye) / Le Corbusier Foundation

모더니즘 건축은 파시즘과 스탈린주의 때문에 패배한 것이 아니다. 종말은 소비에트의 경제 계획과 케인즈의 수정주의라는 서로 다른 가면을 쓰고 있지만, 결국에는 동일한 실체를 드러내는 이데올로기로 인해 도래한다. 건축이 제시한 계획의 유토피아는 이제 실재적 매커니즘으로 실현되었고, 자본주의가 모더니즘 건축이 제시한 이데올로기를 실재로 만들어 버리자, 역설적으로 건축은 이데올로기적 가능성을 모두 소진해버리고 오히려 성가신 장애물이 되어 버렸다. 스스로 눈을 멀게 하고, 귀를 봉인하고, 혀를 잘라내어 버린 절대적 오브제를 통해 구원을 쫓는 미스(Mies van der Rohe)의 완성된 모더니즘과, 다양성과 의미의 복원을 주장하는 네오-아방가르드의 소음은 동일한 진리를 드러낸다. 그것은 구원은 저항이 아닌 비의지적인 항복에 있다는 것이다. 타푸리는 마지막에 이렇게 말한다.


미스 반 데어 로에의 시그램 빌딩(Seagram Building) / archidaily.com


찰스 무어의 이탈리아 광장(Piazza d'italia) / dezeen.com


출구 없이 완전히 닫혀버린 세계에서 탈출을 위한 노력은 헛되이 고통스럽다. 모더니즘 건축의 위기는 지루함이나 방종의 결과가 아니다. 오히려 건축의 이데올로기적 기능의 위기이다… 그곳에 더이상 구원은 없다. 다양성이라는 이미지의 미로에서 끊임없이 헤매다 종국에 침묵하든가, 스스로 완벽을 추구하는 완고한 기하학적 침묵에 갇힐 뿐이다.
타푸리가 건축의 종말을 선언한 지 정확히 50년이 되었다. 물론 건축은 타푸리의 예언처럼 죽음을 맞이하지 않았다. 오늘날 산업과 예술로서의 건축 모두 전례 없는 전성기를 맞이한 듯 보이며, 건축가의 문화적 역량과 힘도 어느 때보다 강력해 보인다. 그러나 한편으로 타푸리의 예언은 정확히 실현된 것처럼 보인다.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이윤을 창출하는 문화적 상품 이상의 의미가 건축에 남아있는가? 20세기 초 모더니즘의 영웅들이 제시했던 비판적 건축의 가능성과 건축의 사회적 메시지는 환영에 불과했는가? 타푸리의 건축의 종말에 대한 선언이 우리에게 던지는 본질적인 질문은 “지금 우리는 왜 건축이 필요한가”이다. 설령 모든 출구가 막힌 희망 없는 미로에 던져져 있다 하더라도, 애초부터 구원의 길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더라도, 끊임없이 그 무용한 고민과 노력을 고통스럽게 하지않으면 안된다고 그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조경을 하는 모든 이들에게 타푸리가 제시한 명제에서 건축을 조경으로 바꾸어 읽어보라고 요청한다. 그러면 우리는 그 끝에 동일한 질문에 마주하게 된다. 만일 단 한 번이라도 제대로 된 질문을 스스로 던지지 못한다면 조경이 가는 길은 죽음에 이르지는 않더라도, 닥치는 대로 게걸스럽게 먹을 것만을 찾아 헤매며, 더 큰 개가 먹이를 뺏으려 하면 두려움에 떨며 짖어대고, 항상 다른 개의 먹이통에 담긴 기름진 고깃덩이를 부러움의 눈으로 응시할 수밖에 없는 굶주린 개의 비틀거림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마주해야 하는 질문은 다음과 같다.


지금 여기, 우리에게 조경이 왜 필요한가?

_ 김영민 교수  ·  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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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mkim@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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