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시선] 조 바이든, 워싱턴 D.C.,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정원

안승홍 논설위원(한경대 교수)
라펜트l안승홍 교수l기사입력2021-01-19
조 바이든, 워싱턴 D.C.,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정원 




_안승홍(한경대 조경학과 교수)



미국 대선이 있는 해는 전 세계 언론은 이목을 집중한다. 대선 주자의 성장과 성향에 대해 분석하고 세계 질서와 안보, 경제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자국의 이해득실을 분석하여 대책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우리 역시 트럼프와 바이든에 따라 받게 되는 영향을 집중분석하며 초미의 관심을 보였다.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에 따라 세계의 미래 지형 변화가 불가피하여 관심이 집중될 수밖에 없다. 트럼프 대통령이 임기를 시작하며 표방한 미국 우선주의는 지난 몇 해 동안 미중 무역전쟁을 비롯한 세계 각국의 경제에 크나큰 영향을 주었다. 우리 또한 FTA나 미군 주둔 예산 등에 오랜 진통을 겪었다. 세계는 실리외교를 바탕으로 자국의 안보와 경제를 최우선으로 한 국제 질서의 지형을 시시각각 새롭게 만들고 재편하고 있다.

2020년 11월 3일 미국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결과는 민주당 조 바이든이 승리하며 제46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미국 대선은 선거인단이 대통령을 선출하는 간접선거방식이다. 총 선거인단 538명 중 과반수인 270명을 얻으면 당선이 된다. 선거인단 투표에선 조 바이든이 306명의 선거인단을 확보해 232명에 그친 트럼프 현직 대통령을 크게 이겼다. 간접투표로 진행된 대선에 이어 주별 선거인단 투표에서도 승리하였다. 2021년 1월 6일, 미 의회는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주별 선거인단 투표 결과 인증과 당선인 발표를 할 예정이었으나 트럼프 대통령을 지지하는 시위대가 의사당 건물에 난입해 의원들이 대피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예정보다 하루 늦은 7일, 의회는 조 바이든의 대통령 당선을 인증했다. 대통령 취임식이 1월 20일 거행될 예정이다.

조 바이든 대통령 당선인은 선거를 치른 직후, 11월 11일 재향군인의 날(Veterans Day)에 필라델피아 한국전 참전기념비를 찾아 헌화했다.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목숨을 바친 이 지역 용사들을 기리기 위한 곳으로 필라델피아와 그 주변 출신으로 전사하거나 실종된 참전용사 622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곳은 미국 현충일인 메모리얼 데이(Memorial Day, 5월 마지막 월요일)에도 매년 추모식이 열린다. 당선 직후 바이든 당선인이 한국전 기념비를 찾은 것은 한·미 동맹 강화에 대한 강한 의지로 보인다. 바이든 당선인은 오바마 행정부 부통령 시절과 대선 기간에도 한국을 ‘친구’, ‘혈맹’으로 칭하며 각별한 사이를 강조했다.

바이든 당선인의 한국전 기념비 방문 기사를 읽으며 지난 여름, 무더위 속에 다녀왔던 워싱턴 D.C.의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정원(Korean War Veterans Memorial)이 떠올랐다. 2020년 3월부터 미국 커네티컷대학(University of Connecticut)에 연구년으로 머무는 동안 뉴욕, 보스턴, 필라델피아, 워싱턴 D.C., 프로비던스 등지의 공원과 정원, 식물원, 도시개발 프로젝트를 둘러봤다. 특히 워싱턴 D.C.의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정원은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 당시 미국을 중심으로 한 UN의 헌신과 희생, 지원에 공조한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는 곳이여서 특별한 감동을 주었다. 그리고 한가지 궁금증이 생겼다. 바이든이 강조하는 ‘친구’, ‘혈맹’은 어디에서 시작되었고 어떻게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는지? 시간을 되돌려 한국과 미국의 인연과 궤적을 살펴보았다.

최초의 서방 외교 : 조·미수호통상조약

1866년 8월 21일,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General Sherman)호는 대동강을 따라 올라가 평양에서 통상을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하자 행패를 부려 평양 군민들이 불 태워버린 사건이 발생하였다. 박규수의 지휘하에 관민들의 저항으로 배는 소각되고, 선원들은 처형되었다. 1867년 미국의 해군 제독이자 외교관인 로버트 윌슨 슈펠트(Robert W. Shufeldt)는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황해도 오차포(吾叉浦)에 입항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돌아갔다. 그는 1879년에도 군함 티콘데로가(Ticonderoga)호를 타고 세계일주를 하던 도중, 1880년 부산항에 입항했다. 이때 슈펠트는 일본을 통하여 조선과 조약을 맺고자 일본 외무경(外務卿) 이노우에 가오루(井上聲)의 소개장을 가지고 부산의 일본 영사 곤토(近藤眞鋤)로 하여금 동래부사를 방문하고 자기의 내한 목적이 통상수호에 있음을 밝혔다. 그리고 조정에 서계(書契)를 올려 주기를 원했지만 실패하였다. 하지만 조선의 김홍집 등 원로대신들은 미국에 대한 지식과 통상의 이익을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무렵 청나라의 북양대신(北洋大臣) 이홍장(李鴻章)은 조선의 종주국 역할을 하기 위해 조선에 구미 여러 나라와 통상을 권고하였는데 슈펠트가 이홍장에게 조선과의 수호 통상을 알선해 주기를 청했다. 수차의 회합과 사신 파견으로 1882년(고종 19) 4월, 슈펠트 제독은 청나라 사신 마건충(馬建忠)·정여창(丁汝昌) 등과 인천에 도착하여 정부의 전권대관 신헌, 부관 김홍집 등과 5월 조·미수호통상조약(Treaty of Peace, Amity, Commerce and Navigation, United States–Korea Treaty of 1882)을 맺었다. 이 조약은 조선이 중국, 일본을 제외한 구미 국가와 맺은 최초의 수호 통상조약이며 이후 다른 구미 국가와의 통상조약 내용이 유사하였다. 미국을 가리키는 한자인 ‘대아미리가합중국(大亞美理駕合衆國)’을 줄여 ‘미국’이라 표기했다. 이 조약문 제1조에 거중조정(居中調整), 서로 어려움을 겪을 때 개입하여 중재한다는 내용은 흥미로운 점이다. 하지만 조선의 생각과는 달리 미국은 정부 차원에서 조선, 대한제국에 도움을 주지 못했다. 외교관계가 수립되자 미국은 다음 해 푸트(Lucius H. Foote) 특명전권공사를 조선에 파견했으나 조선은 재정 부족과 청나라의 간섭으로 주미공사를 파견하지 못 했다. 

보빙사, 최초의 미국 사절단

임오군란 이후 청의 간섭이 극심했던 조선은 외교관 파견 대신 1883년 미국에 보빙사(報聘使)란 이름의 사절단을 보냈다. 보빙사는 조선이 최초로 서방 세계에 파견한 외교 사절단이다. 민영익을 전권 대신으로 홍영식, 서광범, 현홍택, 유길준, 변수 등 사절단과 중국인 통역관 우리탕(吾禮堂), 일본인 마야오카 스네지로(宮岡恒次郎), 미국인 퍼시벌 로웰(Percival L. Lowell) 등이 참여하였다. 인천에서 미국 해군의 배로 태평양 건너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대륙을 횡단하였다. 보빙사 일행은 당시 아서(Chester A. Arthur) 대통령을 뉴욕 호텔에서 만나 우리식으로 큰절을 올려 화제가 되었다.

당시 일행은 전기회사, 철도회사, 의약회사, 방직공장, 세계박람회, 병원, 소방서, 육군사관학교, 해군연병장 등 공공기관을 시찰하였다. 또한 워싱턴에서 내무성 교육국 국장 이튼(Eaton, J.)을 방문하여 미국의 교육제도에 대하여 소개받았고 특히 우편제도, 전기시설, 농업기술에 관심을 보였다. 훗날 조선에서 우정국 설치, 경복궁의 전기시설, 육영공원, 농무목축시험장 등이 실현되는 계기가 되었다. 수행원 중 유길준은 보스턴에 남아 Governor's Academy에서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 되었다.

보빙사가 뉴욕을 방문할 당시 이미 브루클린 대교가 완공되었고 민영익이 1896년 세계일주를 하며 다시 뉴욕을 방문했을 때는 자유의 여신상과 맨해튼 생명보험 빌딩(Manhattan Life Insurance Company Building)과 같은 100m가 넘는 초고층 빌딩들이 들어선 시기였다. 보빙사가 봤던 거대도시 뉴욕은 조선과 비교했을 때 엄청난 충격이었다. 조선은 줄곧 쇄국양이정책(鎖國攘夷政策)을 시행했던 터라 보빙사의 파견은 역사적 사건이 되었다.

보빙사 파견 이후 민영익, 홍영식 등 당시 젊은 지식인들은 외교 업무와 외교관 파견의 중요성에 대해 인식하게 되었다. 1887년 조선은 중국의 내정간섭을 피하고 자주외교를 위해 박정양을 초대 주미전권공사로 파견하였다. 박정양은 공사관 개설, 필라델피아 영사 임명 등의 활동을 펼쳤으나 중국의 압력으로 10개월 만에 귀국하였다. 그후 이하영·이완용 등이 대리공사를 맡았고, 이승수·조민희 등이 공사를 역임하였다. 그러나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포츠머스조약에 힘입어 1905년 을사늑약을 강요하며 외교권을 박탈하였다. 마지막 대리공사였던 김윤정이 1906년 귀국하며 미국과 외교관계가 단절되었다.

광복, 남북 분단, 한국전쟁

일본은 1910년부터 광복되던 1945년까지 조선을 36년간 식민지로 강제 통치하였다. 미국이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고 소련이 8월 13일 청진전투를 발발하자 1945년 8월 15일,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여 제2차 세계대전은 종결되었다. 조선총독부는 9월 2일 미 군정과 소련 군정 주둔 이후 9월 28일까지 행정권 인수인계 기간 동안 존속하였다.

미국은 소련군이 8월 15일에도 청진시에서 4천명의 일본군과 청진전투를 계속 전개하자 한반도 전체가 소련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38선 북쪽은 소련군이, 남쪽은 미군이 주둔하기로 했다. 소련은 일본 패망 후 돌아가지 않고 원산을 지나 평양에 도착했고 미군은 서울에 주둔하여 군정을 실시하였다. 군정 3년 이후인 1950년 1월, 미국의 국무장관 애치슨은 조선이 제외된 방위선인 애치슨 선언(Acheson line declaration)을 실시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김일성은 38도선과 동해안 연선(沿線) 등 11개소에서 경계를 넘어 남한으로 진격하였다. 전쟁 이전 김일성은 중국의 마오쩌둥(毛澤東)과 소련의 스탈린의 협조와 지지를 얻었다. 전쟁 1주일 만에 김일성의 승리로 끝날 뻔했으나 유엔(UN)은 바로 안전보장이사회에서 결의 제82호를 의결하고 미국을 주축으로 결성된 유엔군을 한국에 파병하였다. 1953년 7월 27일 22시에 체결된 휴전협정에 따라 한반도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현재까지 휴전하고 있다.

유엔(UN)은 1945년 10월 24일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세계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국제법, 국제적 안보 공조, 경제 개발 협력 증진, 인권 개선을 목적으로 출범했다. 1950년 북한이 남한을 침략한 직후 안보리는 이를 침략 행위로 규정하고 즉각 철수를 요구했다. 1950년 7월 유엔은 일본 도쿄에 본부를 세우고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원수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유엔군을 결성하여 처음으로 참전하였다. 군대 파견을 신청한 21개국 중 실제로 파병한 국가는 16개국이었으며 미국, 캐나다(북미 2개국), 콜롬비아(남미 1개국),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필리핀, 태국(아시아 4개국), 남아프리카 공화국, 에티오피아(아프리카 2개국), 영국, 벨기에, 프랑스, 그리스,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터키(유럽 7개국)였다.

한국전쟁은 영어 Korean War를 뜻하며 국내에서는 6.25사변 혹은 6.25전쟁으로 부르고 내전 의미를 강조하는 한국동란, 6.25 동란으로도 불린다. 약칭으로 6.25, 육십갑자를 적용하여 경인동란(庚寅動亂)이라 한다. 조선전쟁은 북한과 일본에서 쓰이는 용어로 중국도 가끔 쓰며 중국은 항미원조전쟁(抗美援朝戰爭)이라 부른다. 미국과 캐나다 등 서구 국가들은 2차 세계대전과 베트남 전쟁 사이에 벌어져 젊은 세대들이 잘 알지 못 하여 잊혀진 전쟁(The Forgotten War) 또는 알려지지 않은 전쟁(The Unknown War)으로 부르기도 한다.

1950년 7월 1일 미군의 파견은 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최초로 한국전선에 투입된 이래 점차 증가하여 1년 후에는 253,250명, 2년 후 265,864명, 휴전 직후인 1953년 7월 31일에는 302,483명을 기록하였다. 이처럼 미국은 전쟁 기간 중 연인원 179만 명이 참전하였으며, 이들 중 전사 54,246명, 부상 103,284명, 실종 8,177명, 포로 7,140명의 고귀한 희생으로 자유 대한을 지켜냈다.

한국전쟁 동안 미군은 전쟁을 주도적으로 운용하고 유엔군 역할의 대부분을 담당하였다. 전체 유엔군 중 미군의 비율은 지상군 50.3%, 해군과 공군은 각각 85.9%와 93.4%를 차지하였다. 미 지상군은 약 10일간의 전투 외에 거의 모든 전투 및 작전에 참여하였는데 미군 주도의  전투 및 작전은 약 140여 개에 달하고 소규모 전투까지 포함하면 약 200여 개에 이르렀다. 결과적으로 미국은 참전을 결정하면서 설정한 ‘전쟁 이전 상태로의 회복이란 목표를 달성하였고 국제평화의 유지와 안전이라는 유엔의 목적과 목표에 기여하였다.

한·미 상호방위조약과 미국의 원조

미국 주도의 휴전협정이 진행되고 있던 1953년 6월,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 브릭스(Ellis O. Briggs) 대사와 만난 자리에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거듭 강조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보다 북한의 완전히 응징을 주장하고 미국은 전쟁을 끝내겠다는 의도가 강했다. 휴전 전 안정적인 국가 안보를 위해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과의 상호방위 조약을 요구했지만 미국은 무반응이었다. 당시 미국은 고립주의 전통으로 필리핀만 양자 상호방위조약을 맺었고 현재도 한국, 영국, 일본, 필리핀 4개국만 조약을 체결하고 있다. 영국은 미국의 핵기술 제공을 위한 조약이고 일본은 재무장 금지와 맞물린 조약이다.

조약의 진전이 미미하자 이승만은 6월 18일, 2만 5천명의 반공포로를 석방시킨다. 당시 휴전협정을 무산시킬 수도 있는 강행이었지만 조약을 강력히 요구하는 이승만 대통령의 승부수였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약속 파괴라고 이승만을 비난했고, 미국 내에서는 이승만 제거를 검토했다. 휴전협정 직후인 1953년 8월 한미상호방위조약 최종안이 서울에서 가체결되었다. 이승만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성립됨으로써 우리는 앞으로 여러 세대에 걸쳐 많은 혜택을 받게 될 것이다. 이 조약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앞으로 번영을 누릴 것이다. 한국과 미국의 이번 공동조치는 외부 침략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함으로써 우리의 안보를 확보해 줄 것이다.라며 크게 만족하였다. 1953년 10월 1일, 한국과 미국은 상호방위조약(Mutual Defense Treaty between the Republic of Korea and the United States of America)을 체결하고 1954년 11월 18일 조약 제34호로 발효되었다.

해방 이후 1970년까지 20년 동안 미국은 우리에게 물자와 외화 부족에 대해 무상으로 지원해 주었다. 특히 1950년대까지 유일한 외자도입 창구 역할을 한 미국의 원조 정책은 한국 경제부흥에 큰 기여를 했다. 미국의 무상원조는 약 44억 달러, 유상원조는 약 4억 달러에 달하여 국제수지 적자 보전과 경제 재원 투자로 경제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가난한 우리 정부 예산에 큰 도움이 되었다. 미국은 2019년 현재 우리의 대외무역에서 중국에 이은 2위 국가이며 수출 733억 달러, 수입 619억 달러, 115억 달러 무역수지 흑자를 보이고 있는 주요 교역국이다.

한반도는 지정학적으로 중국, 일본, 러시아와 같은 강대국에 둘러싸여 역사적으로 많은 시련을 견뎌야 했다. 하지만 이 조약의 체결로 미국이란 세계 최강의 동맹을 얻은 것은 한반도의 지속적 평화를 보장하는 카드가 되었다. 6․25 사변 이후 잿더미 속에서 우리 국민들은 각고의 인내와 노력으로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 냈고 70년 가까이 경제 성장을 이루어 세계 10위의 경제 대국이 되었다.

워싱턴 D.C. 내셔널 몰 : 미국 건국 기념물 전시장

지난 8월말, 무더위가 채 가시지 않은 워싱턴 D.C.를 방문했다. 코로나로 인해 여행을 다녀올 경우 2주간의 자가격리가 기다리고 있어 매일 인터넷으로 정보를 살피다가 마침 자가격리 지역에서 해제되어 뉴욕과 필라델피아를 거쳐 6시간 장거리 운전으로 도착하였다.

워싱턴 D.C.는 미국 동부 포토맥강 북쪽 유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서쪽으로 버지니아주와 동북쪽으로는 메릴랜드주와 경계를 맞대고 있다. 1790년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대통령은 이곳을 수도로 정하고, 새 수도 설계를 위해 프랑스의 피에르 샤를 랑팡(Pierre Charles Langfang)을 초청하였다. 잘 정비된 현재의 모습은 그의 설계를 골격으로 만들어졌다. 워싱턴 D.C.의 인구는 70만명이며 컬럼비아 구역을 포함한 워싱턴 대도시권의 인구는 613만 명으로 미국의 대도시권 가운데 6번째로 큰 규모이다.

미국 의회와 백악관에서 시작해 포토맥 강 유역까지 이어지는 미국의 건국 과정을 기념하는 내셔널 몰(National Mall)은 40㎢가 넘는 녹지에 조성된 80개 이상의 역사적인 건축물과 150개의 공원, 광장이 배치되어 있다. 몰의 중앙에 높이 솟은 워싱턴 기념탑(Washington Monument)은 169m 높이의 대리석 기둥으로 내셔널 몰의 랜드마크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49m까지 올라가 박물관에서 소장품을 관람하고 주변 도시의 전망을 감상할 수 있다. 길이 618m, 폭 51m의 고요한 거울연못(Reflecting Pool)을 중심으로 링컨(Abraham Lincoln) 기념관과 제2차 세계대전 기념정원이 연결된다. 또한 프랭클린 D.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와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등 미국 대통령과 제1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및 베트남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참전용사들을 기념하는 장소로도 유명하다. 또한 인권 운동의 지도자 마틴 루터 킹 Jr.(Martin Luther King Jr.)가 조각된 기념정원이 업적을 기리고 있다. 포토맥강과 내셔널 몰 사이의 있는 타이달 베이신(Tidal Basin) 주변은 1912년 도쿄 시장이 선물한 아름다운 벚나무가 매년 봄 분홍색 벚꽃을 만개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출처 : National Park Service www.nps.gov/kowa/index.htm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정원

석사과정을 다니던 1990년대초 Landscape Architecture Magazine에서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정원(Korean War Veterans Memorial)에 관한 기사를 처음 접했다. 당시 통상 6․25 사변 또는 6․25 동란으로 칭하던 ‘한국전쟁’이 생소했었고 원과 삼각형을 기본 골격으로 한 기하학적 조형미는 나의 호기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후 TV나 잡지, 논문에서 간간히 봐왔던 터라 꼭 한번 가 보고 싶은 곳이었다.

이 정원은 미국 워싱턴D.C. 내셔널 몰의 서쪽에 있는 링컨기념관 동남쪽 인근에 있으며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군을 기리기 위한 현충시설이다. 1986년 4월 20일 미 의회(공법 99-572)에서 승인되었으며, 레이건 대통령이 임명한 한국전 참전 기념사업 위원회와 미국 전투기념위원회가 설계와 시공을 관리했다. 초기 설계공모전에서 1986년 펜실베니아 주립대학교 4명의 건축가팀이 선정되었지만 자문위원회와 미술위원회의 요구로 설계안 수정이 필요하자 철수하였다. 최종 설계는 여러 디자이너 간의 협업을 감독한 Cooper-Lecky Architects에 의해 만들어졌다. 1992년 6월 조지 부시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착공식이 있었으며 참전비 건립위원회와 미육군 공병대의 공동 주관으로 3년 1개월 만에 완공됐다. 휴전 42주년인 1995년 7월 27일 빌 클린턴 미 대통령과 김영삼 대통령이 개막식에 참석했다. 조성비용은 기념주화 판매 수입, 참전용사들의 소액 기부, 현대자동차, 삼성 등 한국 기업의 도움으로 충당된 1,800만 달러가 소요되었다.

이 정원은 원과 삼각형이 교차하는 독특한 형태의 조각공원 같으며 회상의 연못(Pool of Remembrance), 전장(戰場, Field of Service), 벽화의 벽(The Mural Wall)으로 구성되어 있다.

직경 40m의 원형에는 중앙의 성조기 주변으로 지름 9m의 얕은 ‘회상의 연못’이 있다. 원형의 연못은 물이 바닥에서 쏟아나와 계단으로 흐르면서 소리가 난다. 연못을 둘러싼 28그루의 참피나무(linden tree)는 연못에 반사되고 나무 아래 7개의 벤치는 방문객의 휴식과 미국 젊은이들이 전쟁 중에 치른 대가를 반성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연못에서 확장된 벽에는 25cm 은색 글자로 ‘자유는 거저 얻어지는게 아니다(FREEDOM IS NOT FREE)’란 문구가 새겨진 돌판이 있다. 화강암 비문에는 한국전쟁의 전사자와 부상자, 실종자, 전쟁 포로의 숫자가 기록되어 있으며 남쪽에는 한국의 나라꽃인 무궁화가 3그루 식재되어 있다.

삼각형 모양의 ‘전장’은 비문이 새겨진 화강암 판석이 놓여있는 꼭지부분이 원의 중앙에 도달한다. 삼각형 부분은 광택이 나는 화강석으로 구분되어 있어 한국의 논을 상징한다. 화강석  사이에는 실물보다 약간 큰 우의를 입고 완전 군장한 19명의 미군 병사들이 승리의 V자 대형으로 원을 향해 두 줄로 행군하는 동상이 있다. 이 동상은 백인, 흑인, 아시아인, 남미인, 인디언 등 다양한 인종과 육군 14명, 해병 3명, 해군 1명, 공군 1명이 각 병과를 상징한다. 비장한 모습으로 주위를 살피며 수색 중인 모습이 묘사되었고 군인들의 무기와 장비를 덮은 판초는 한국의 차가운 바람에 날리는 것 같다. 게이로드(Frank Gaylord)가 조각한 2.1m 높이의 조각상은 삼각형 바닥의 주니퍼 사이에 배치되어 있다. 미국 국기로 이어지는 삼각지점에는 헌신의 돌(Dedication Stone)이라는 봉헌석이 있으며 아래와 같은 문구가 새겨져 있다.

우리나라는 그들이 결코 알지 못한 나라와 
만난 적이 없는 사람들을 지키라는 부름에 응한 
우리의 아들과 딸들을 존경한다.

‘벽화의 벽’은 루이스 넬슨(Louis Nelson)이 건축가와 조각가, 벽화가의 협업으로 만들었다. 38선과 38개월간의 전쟁을 상징하는 추운 겨울 전쟁터에서 정찰 중인 병사의 모습을 스테인레스강으로 만든 19개의 조각상이 이 벽면에 반영되어 총 38개 동상의 이미지가 나타나도록 하였다. 조각상의 레이아웃과 조화를 이루며 물결 모양으로 보이도록 모래분사(Sandblast)로 새겨져 있다. 멀리서 보면 한국의 산맥 모습이 연출된다. 이 벽은 국립 문서보관소에 보관된 2,400장의 한국전쟁 사진을 기초로 41개의 패널로 50m로 만들었다. 균일한 조명효과와 계획된 크기로 만들기 위해 컴퓨터로 보완하였다.

‘전장’과 ‘벽화의 벽’ 사이 산책로에는 한국전쟁에 참전한 전투부대 17개국과 의료지원 5개국이 알파벳순으로 새겨진 22개의 표식이 있다. 기념관 서쪽 입구에는 한국전쟁 명예 명부(Honor Roll)가 있는 키오스크(kiosk)가 있으며 공원 관리인이 방문객들에게 서비스하고 있다. 명예 명부 컴퓨터에는 한국전쟁 중 목숨을 잃은 모든 군인의 이름, 병역, 계급, 군번, 생년월일, 고향, 사망 원인과 날짜 등이 담겨 있으며 미국 전투 기념위원회(ABMC, American Battle Monuments Commission)에 정보가 있다면 소속 부대, 상훈, 사망 또는 실종을 둘러싼 상황 및 사진 등도 보관되어 있다.







이 정원은 국립공원관리청(National Park Service)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국립 사적지로 등재되어 있다.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재단(Korean War Veterans Memorial Foundation)은 이 기념정원을 영구적으로 유지하고 행사를 지원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비영리단체이며 2015년 삼성전자는 유지관리를 위해 이 재단에 100만 달러를 기부했다.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원을 다녀오는 차 안에서 그들의 고귀한 희생을 더욱 빛나고 뜻깊게 만드는 것은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더 나은 국가로 발전하는 것이 진정한 답변이 아닐까란 생각을 하였다. 워싱턴 D.C.에서 태평양 건너 대한민국 존립의 밑거름이 된 참전용사들의 숭고한 헌신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새겨졌다. 돌 위에 새겨진 문구가 전해주는 먹먹한 마음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마음의 빚이 되었다. 

“그들이 결코 알지 못한 나라와 만난 적이 없는 사람들을
지키라는 부름에 응한 우리의 아들과 딸들...”
글·사진 _ 안승홍 교수  ·  한경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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