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의 과정을 회화적으로 풀어 대중과 소통하다
[인터뷰] 안동혁 조경가(HLD 소장)라펜트l전지은 기자l기사입력2022-06-10
얼마 전 ‘자연을 이야기하지만 결국 조경은 개발 아닌가요?’라는 질문을 들었다. 이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을 해줄 수 있는 전시가 지난 5월 22일부터 6월 5일까지 가모갤러리에서 열렸다. 조경가 안동혁(HLD 소장)의 설계와 디자인을 담은 개인전 ‘인공자연: 그리고 그 무대의 뒷편’이다.
안동혁 조경가(HLD 소장)
인공자연
‘인공자연’이라는 주제는 안동혁 조경가가 오래 전부터 가지고 있던 조경관이다. 야생의 자연에서 혼자 살아남기 어려울 정도로 약한 인간은 사회를 이루어 집단으로 생존하며 도시를 생성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자연의 위협에서 벗어난 인간이 그리워하는 것은 그들이 떠나온 자연이다. 그런데 이 그리움의 대상인 자연은 있는 그대로의 순수한 자연이 아니다. 자연과 닮았지만 자연의 위험은 배제하고 인간에게 이로운 부분만을 취한 ‘인공의 자연’이 필요한 것이다. 그것이 지금의 공원, 정원 등과 같은 잘 가꾸어진 조경 공간이고, 인간은 이러한 오픈스페이스에서 자연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전시장에서는 조경전에서 으레 볼 수 있는 설계 패널이 아닌 자연과 대척점에 있는 듯 보이는 인공적인 결과물부터 자연과 닮은 완성된 현실의 공간을 그대로 엿볼 수 있는 작업물까지 다양한 작업의 결과물들을 볼 수 있었다.
조경이 콘텐츠인 미술전의 실험
안동혁 조경가는 “조경 행위의 과정도 회화적으로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에 전시를 기획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일종의 조경을 콘텐츠로 하는 미술전의 실험인 것이다. 전시장에는 공간을 만들어 내기 위한 중간 작업물, 예술적 영감을 현실화하기 위한 스터디 작업물까지 디자인 행위를 통해 인공의 자연을 만들어온 조경가의 작업 과정을 담고 있었다.
설계의 과정물을 미술관에 전시하는 것이 완전히 새로운 시도는 아니다. 자하 하디드(Zaha Hadid)의 건축 다이어그램, 벌 막스(Roberto Burle Marx)의 평면도 등과 같이 해외에서는 건축가 또는 조경가의 플랜, 스케치, 다이어그램, 도면 등이 내로라하는 미술관에 전시되는 경우를 종종 발견할 수 있다. 이번 전시는 국내에서도 이와 같은 전시를 접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과 이를 통해 조경이 조금 더 대중과 가깝게 소통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안동혁 조경가의 기대감에서 시작됐다.
마침 청와대가 개방되면서 전시장에는 일반 관람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질 않았다. 이들에게 가장 많이 들은 이야기가 “조경이 이런 것도 하는 줄 몰랐어요”였다고. 실제로 조경을 통해 일어나고 있는 행위들은 훨씬 더 광범위한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조경 행위의 결과물 뒤편에서 일어나고 있는 과정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이 적중한 것이다.
RECYCLED MATERIALS for UNPLUGGED GROUND
2021, work at HLD, collaboration w/ 아름다운 길
Precast Concrete, 300㎜ × 300㎜ × 50㎜
기아자동차의 신차 EV6를 전시하는 홍보관의 정원에는 ‘Unplugged Ground’라는 콘셉트에 맞게 친환경 소재들을 위주로 적용했다. 그중 정원의 바닥포장재는 폐플라스틱을 골재로 사용한 콘크리트 블록이었다. 환경에 대한 메시지를 담으면서도 심미성까지 고려한 것이다. 이 콘크리트 블록 한 장은 일반 관람객들에게 ‘콘크리트가 예쁘다’는 평을 들었다.
BUYEO COURTYARD GARDEN
2022, work at HLD
Digital Print of Technical Drawing, 841㎜ × 594㎜
롯데리조트 부여의 중정인 ‘해담뜰’의 실시설계 도면 역시 마찬가지다. 실시설계도면은 조경공간을 조성하기 위한 설계자와 시공자의 소통 도구의 용도로 쓰이지만 이 역시 ‘동양화 같다’는 감상이 뒤따랐다. 식재의 종류와 규격, 수량 등 시공을 위한 정도를 담은 도면임에도 회화적으로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이다.
SEAFLOOR MAP of YEOCHA
2021, work at HLD
Digital Drawing, 841㎜ × 594㎜
거제도 남단에 위치한 어촌마을 여차마을의 마스터플랜을 위한 마을과 주변 바다의 지형도 역시 그렇다. 자주 접할 수 있는 육지의 지도와 달리 해저지형을 매핑한 이 도면에서 육지보다 더 굴곡이 많아 다이내믹하다. 낮아졌다가 높아지기를 반복하는 복잡한 지형은 해발고도에 따라 색이 다르게 입혀졌다. 이 지형도를 통해 해류의 흐름을 가늠할 수도 있고, 데이터적으로도 훌륭하지만 육안으로 봤을 때도 회화적인 가치가 있는 것이다.
순수예술과는 다른 조경의 예술성
조경가가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가치는 공간의 최종 이용자에 관한 것일 수밖에 없다. 안동혁 조경가에게도 이용자가 어떻게 공간을 이용할 것인지, 어떤 경험을 얻을 것인지, 어떻게 만족할 수 있을 것인지가 조경설계를 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고려하는 가치이다.
“모든 일에 있어 ‘본질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편이다. 내가 하고 있는 조경의 본질은 무엇이며 조경설계자로서 어떤 일을 해야 하고, 어떤 일을 하는 것이 보람이 있는지를 생각했을 때, 다른 미사여구를 다 제하면 결국은 ‘좋은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 ‘좋은 공간’이라는 것은 해석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결국에는 이용자들이 느끼기에 ‘좋은 공간’일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조경은 순수예술과는 다르다고 말한다. 조경은 순수예술처럼 ‘나’를 표현하는 것이 중요한 장르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조경가에게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갈증이 없다고는 할 수 없을까? ‘전시’는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다양한 플랫폼 중 하나이기도 하지만 조경가 자신을 표현하기 위한 하나의 형태가 될 수도 있겠다는 기자의 말에 안동혁 조경가는 “자신 스스로의 표현을 한계 없이 할 수 있고, 내 생각을 발표하고 누군가를 설득할 수 있는 기회가 충분한 학생 시절의 경험을 소중하게 여겼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안동혁 조경가는 회사 오픈하우스나 특강, 크리틱 등을 통해 학생들과 만나는 기회를 자주 가지려 하고, 그 때마다 위와 같은 조언을 해주곤 한다고.
이번 개인전에는 2006년부터 2022년까지 10년 조금 넘는 기간 동안의 작업물들이 전시됐다. 학생 신분으로 작업했던 거칠지만 애착이 가는 과정물부터, 뉴욕에 위치한 제임스 코너 필드 오퍼레이션스(James Corner Field Operations)에서 일하며 설계하고 완공한 공간의 사진 작업, 한국에 돌아와 DL E&C(전 대림산업)에서 디자인 디렉팅 하고 완공한 공간의 사진 작업, 그리고 현재 활동하고 있는 HLD에서 작업한 설계 과정물 및 결과물 등에 이르기까지 학생으로서의 모습과 실무자로서의 모습까지 쭉 훑어볼 수 있었다.
여기서 조경가 본인도 미처 몰랐던 자신의 디자인적 특징을 관람객들이 발견했다고 한다. 예를 들면 모든 프로젝트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나뭇잎 패턴이 그렇다. 평면으로 등장하기도 하고, 입면이나 섹션에서 등장하기도 한다. “듣고 보니 나뭇잎은 연속적이지만 정형적이지 않아 즐겨 쓰는 것 같다. 곡선을 활용하는 경우도 많더라”. 학생시절과는 달리 여러 사람의 의견을 조율해야하는 실무 프로젝트이지만 그 안에서도 조경가의 색깔이 묻어있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이 흥미로운 지점이었다. 조경가의 색깔이 제한조건이 주어진 상황에서, 실현 가능하며, 프로젝트와 관련된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형태로 세련되게 표현됐다는 점에서 조경가의 고도화된 예술성을 엿볼 수 있었다.
“조경의 작업물들이 순수미술과는 다른 형태와 양식을 보이지만, 오히려 이러한 다름을 순수미술과 조경이라는 두 영역이 상호 영감의 교류와 창조적인 확장의 기회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다”고 안동혁 조경가는 말한다.
SEUN MASTERPLAN
2007, instructor: Wookju Jeong
Digital Drawing, 841㎜ × 594㎜
NAKED GARDEN
2009, instructor: Karen M'Closkey
Digital Drawing, 841㎜ × 594㎜
NORDHAVNEN
2008, instructor: James Corner
Digital Drawing, 841㎜ × 594㎜
좋은 설계로 좋은 공간을 만드는 것
안동혁 조경가의 앞으로의 계획은 ‘좋은 설계를 통해 좋은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좋은 공간에서 이용자들이 만족스러운 경험을 하고, 더 좋은 공간에 대한 니즈가 지속적으로 생겨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해외와 국내에서 조경가로 활동한 경험, 조경 컨설턴트와 클라이언트 양쪽의 역할을 모두 수행해 본 경험이 초기단계의 기획에서부터 디자인 전개, 그리고 최종 공사의 실행까지 조경 전반의 프로세스를 넓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됐다. 클라이언트의 요구가 어떠한 배경에서 나왔고, 정확히 무엇을 요구하는 것인지 손쉽게 짐작할 수 있게 됐고, 시공단계에서의 애로사항을 고려한 디자인에 대한 생각도 하게 됐다. 조경이 일반적으로 개입하기 어려운 건축계획단계 시기에 조경이 같이 개입이 돼야 더 나은 공간이 될 수 있다는 제안을 하기도 한다. 앞으로의 경험들 역시 더 좋은 공간을 만들기 위한 것으로 귀결된다.
“저는 조경가로서 아직 거칠고 미흡한 부분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작은 전시를 열 수 있게 됐습니다. 조경도 마찬가지이겠지만, 누군가가 혼자의 힘으로 무엇인가를 이루어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무엇인가가 이루어졌다면 많은 사람들의 힘과 노력, 응원과 채찍질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인 성취에 따른 소회보다는 감사한 분들께 빚을 갚아 나갈 생각에 어깨가 무겁습니다”
- 글·사진 _ 전지은 기자 · 라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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