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판이 아름다운 가로를 걷고 싶다

[조경명사특강] 임승빈 교수의 도시사용설명서_24회
라펜트l임승빈 명예교수l기사입력2014-11-29

간판을 더 크게 더 튀는 색으로 설치하고자하는 욕망이 집합적으로 표현된 곳이 상가건물이라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상가 건물은 가로경관에 부정적 영향을 주는 주된 요소가 된다. 과대 간판의 부정적 측면에 대한 인식이 점점 높아지고는 있으지만, 아직도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의 위상에 걸맞는 간판문화가 형성되기에는 매우 미흡하다고 할 수 있다.

 

주거지역에 위치한 대부분의 상가 건물에는 간판과 선팅지가 외벽과 창문의 대부분을 덮고 있으며, 서로가 자신의 상점명과 전화번호를 소리높여 외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간판문화에 대하여 일부 학자들은 동양권, 특히 우리나라의 독특한 문화로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정도가 너무 지나치다는 생각을 하고 있으며, 따라서 광고물에 대한 규제가 점차 강화되고 있는 추세이다.

 


서울 종로구 창신길 상가_ 과대 간판(좌)과 최근 신축된 건물의 절제된 간판(우). 도로 좌우에서 서로 마주 보고 있는 두 점포의 간판이 대조적이다. 도시재생을 통해 새롭게 변신을 시작한 창신동의 변화를 읽을 수 있으며, 과거와 현재가 동거하고 있는 최근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간판은 일차적으로 업종을 알려주는 기능을 하지만 더 나아가 주변지역의 사회 경제적 변화를 알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해준다.


광고물의 크기, 면적, 위치 등에 대한 규정은 있지만 행정력이 충분히 뒷받침되지 않아 관리가 어려운 실정이다. 아래 사진의 간판들은 대부분 불법 광고물이어서 이를 공무원들이 트럭을 동원해 수거해가면 곧바로 새로운 간판이 부착되므로 365일 매일 단속해야만 하는데 이는 실로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간판정비의 문제는 행정력으로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고 시민의식의 고양을 통해 모두가 자발적으로 간판정비에 협력하여야만 해결될 수 있다.

 

최근 행정에서는 아름다운 간판 콘테스트를 개최하여 시상하고, 간판 제작비를 지원하는 등 시민의 자발적 참여를 유도하는 시책을 시행하고 있지만, 시민의식을 높이는 문제는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므로 행정과 전문가그룹이 협동하여 지속적으로 추진하는 것이 필요하다.

 


용인 수지 아파트지구의 상가건물_ 우리나라 아파트 단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상가모습이다. 건물 전체가 간판으로 덮여있다. 외벽은 어차피 간판으로 포장되므로 마감재료가 필요없을 정도이다.

 


서울 종로의 상가건물(피맛골)_ 최근에는 간판에 관심이 높아지면서 글씨 크기, 색, 위치 등을 통일하여 개선되는 경향을 보인다. 간판의 크기와 면적은 많이 줄었으나 너무 획일적이다. 상점별 개성이 표현되면서 동시에 건물과 일체화된 디자인이 필요하다.

 

인사동 쌈지길 건물에는 많은 점포들이 입주해있으나 앞서의 상가와는 달리 간판들이 보이지 않고 쌈지길 로고만 보여 가로경관에 긍정적으로 기여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 도시는 다양한 간판의 전시장이 되고 있다.

 

80년대 신도시 개발과 더불어 등장한 아파트 단지 상가의 요란한 간판부터, 디자인에 관심이 높아진 2000년대에 행정주도로 만들어진 획일적 크기와 디자인, 그리고 서구의 영향을 받아 건물과 일체화된 최근의 질 높은 간판까지 다양한 유형의 간판을 볼 수 있다.

 

쌈지길의 건물 입면은 최근의 경향을 보여주는 성공적인 사례로서 인사동의 다른 점포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넓은 벽면을 기존 점포의 크기로 분할하고, 전통적 분위기의 인사동 가로경관과 조화를 이루는 재료와 색채를 도입하였으며, 동시에 건물과 일체화된 간판을 지닌 우수한 디자인이라 할 수 있다.

 


인사동 쌈지길_ 작은 간판들이 여럿 있으나 ‘ㅆ '로고가 랜드마크 성격을 지녀 로고를 중심으로 이미지 통합이 이루어지고, 건물 입면이 작은 면으로 분절되어 인사동 길의 규모와 어울리는 휴먼스케일이 유지되고 있다.


우리가 여행을 하면서 보게 되는 유럽의 간판들은 가로나 건물의 주연배우가 아니고 조연배우로서 최소한의 역할을 한다.

 

점포마다 서로 지지 않으려고 소리높이 외치는 간판이 아니라 가로의 한 요소로서 조용히 미소 짓고 있는 모습은 더욱 친근하고 정감어린 가로를 만든다.

 

스위스 바젤의 남녀노소, 가족, 친구 등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모이는 한 식당가를 보면 간판은 최소한으로 등장하면서 액센트 역할을 하여 가로에 잔잔한 흥을 돋우고 미소를 보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간판은 가로경관의 감칠맛을 돋구는 조미료 역할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할 수 있다.

 


스위스 바젤의 식당거리_ 건물 모두가 회색을 주조색으로 하여 색채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고채도의 밝은 색 간판이 액센트 역할을 함으로써 전체적으로 편안하고 친근한 가로경관을 연출하고 있다. 간판이 가로를 점령하여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공간의 액센트로서 잔잔한 흥을 돋구는 조미료 역할을 하고 있다.

 

간판은 주로 문자를 통해서 행인과 소통하지만 문자에 더하여 업종과 관련된 도형을 도입함으로써 더욱 확실하게 소통할 수 있다.

 

몬테네그로의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인 코토르(Kotor)성에 있는 포도주 상점은 포도 조형물을 간판에 도입하고, 골동품 상점은 골동품 주전자를 간판에 도입하여 친근감을 주면서 동시에 점포의 성격을 더욱 명확하게 전달하고 있다.

 


몬테네그로 코토르성의 간판_ 포도 조형물이 있는 포도주 상점(좌)과 옛날 주전자 도형이 있는 골동품 가게 간판

 


몬테네그로 코토르성의 간판_ 시계/열쇠 상점(좌)과 포도주/기념품 상점(우)

 

슬로베니아 블레드(Bled)성에 있는 레스토랑은 건물입구의 장식과 간판, 메뉴박스가 일관 성 있게 디자인되어 이미지 통합(Corporate Identity)이 이루어졌고 오래된 성과 잘 조화되어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하고 있다.

 

이와 같이 간판은 개별적으로 디자인되기 보다는 상점건물의 형태와 색채, 업종의 특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이미지 통합의 관점에서 디자인되어야 건물과 일체화되고 해당 점포에 특화된 아름다운 간판이 만들어질 수 있다.

 


 

슬로베니아 블레드(Bled)성에 있는 레스토랑 입구(상), 레스토랑의 메뉴박스(하/좌)와 간판(하/우)_ 회색조의 벽면, 메뉴박스, 간판이 상호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빨간색의 로고와 빛가림천이 액센트 역할을 하면서 전체적으로 이미지 통합이 이루어지고 있다.

 

‘숲’까페(종로 피맛골)의 외벽 디자인과 간판_ ‘숲’이미지를 표현하기 위해 녹색을 주조색으로 하였으며, 벽면의 나뭇가지, 2층 창문의 나무울타리 그림으로 이미지 통합을 시도하고 있다.

 

서울시에서는 최근까지 ‘빼기디자인‘을 도시디자인의 주요 원칙으로 삼은바 있다. 도시경관 향상을 위하여 무엇을 새로 만드는 것 보다는 기존의 복잡한 요소를 빼서 단순화시키는 것이 우선적으로 매우 중요함을 강조한 것이다. 이는 난개발로 얼룩진 우리나라 도시경관 향상을 위한 중요한 시사점을 제시한다고 볼 수 있다.

 

사실 극도로 혼잡한 건물의 형태, 외벽재료, 색채, 가로시설물, 조명 등을 단순화시키는 것만으로도 우리나라 대부분의 도시경관은 어느 정도 수준까지는 향상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들 중에서도 상가건물의 간판은 단순화가 필요한 대표적 경관요소라 할 수 있다.

 

간판이 도시경관 연출에서 주연이 아닌 조연 역할을 하는 가로를 보고 싶다.
간판이 건물과 일체화되고 이미지 통합을 이루는 가로경관을 만들자!

 

 

연재를 마치며


지난 2년 동안 매월 연재한 ‘도시사용 설명서’를 읽어주신 독자에게 감사드린다.

 

이번 연재에서는 나름대로 두 가지의 원칙을 고수하고자했다. 하나는 보행자의 눈 높이에서 도시를 바라보고, 도시의 모습이 만들어진 배경, 현재 모습의 이해, 그리고 더욱 바람직한 미래의 모습을 그려보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교과서적 설명보다는 일반인이 쉽게 이해할 수 있으며, 사진만 보고도 글의 초점을 파악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이번 연재는 일반인들이 가로를 거닐면서 도시를 보다 비평적으로 관찰하고, 이해하고, 더 나아가 바람직한 도시의 미래를 만들어나가는데 모두가 참여하고 기여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쓰게 되었다. 그러나 필자의 부족한 능력 탓에 연재 의도가 충분히 달성되지 못한 점을 아쉽게 생각한다. 앞으로 필자가 내공을 더욱 쌓은 후 ‘도시사용 설명서2’를 쓰게 된다면 그때는 더욱 도움이 되는 글을 쓰고자 한다.

 

사실 2년 전 대학 정년을 맞아 몸과 마음이 자유로워지는 해방감과 더불어 막연한 불안감이 있던 시점에 라펜트로 부터 연재 제의를 받고 나 자신을 새롭게 추스릴 수 있는 기회라 생각되어 선뜻 수락하였다. 그동안 1년 약속을 2년으로 연장하였고, 도시의 여러 현장을 다니면서 나 자신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으며 지금까지 즐겁게 글을 쓰게 되었다.

 

그동안 졸고를 흔쾌히 실어주신 라펜트에 감사드리고, 격려해주신 독자 여러분에게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린다.

 

 

임승빈 명예교수(서울대, (재)환경조경나눔연구원 원장) 

연재필자 _ 임승빈 명예교수  ·  서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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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ungbin@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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