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의 역사성을 배려하는 건물을 보고 싶다

[조경명사특강] 임승빈 교수의 도시사용설명서_18회
라펜트l임승빈 명예교수l기사입력2014-06-03

도시 곳곳에 분포된 문화재 건물, 구조물은 도시의 역사를 말해주는 중요한 경관요소이다. 이들은 단순히 도시와 국가의 역사를 말해줄 뿐 아니라, 도시인에게 소속감과 자부심을 느끼게 해준다.


도시의 발달과 더불어 신축 건물의 조성은 필연적이다. 새로 들어서는 이러한 건물들은 문화재 건물보다 규모가 크고, 형태와 재료도 이질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건축 재료와 구조의 발달로 새로운 재료와 구조가 도입되는 것은 당연한 흐름이다.


그러나 문화재나 역사적 가치가 있는 건물 인근에 세워지는 건물이 문화재의 품위를 손상시킨다던지, 도시환경에 부조화를 초래하는 경우도 종종 볼 수 있다. 이러한 부조화를 극복하는 것은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나라 도시들이 풀어야할 중요한 과제이다.


신축 건물이 문화재와 부조화를 극복하고 공존하는 방법으로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문화재와 유사한 형태와 재료를 사용하여 조화의 미를 이루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대비되는 형태와 재료를 사용하여 대비의 미를 이루는 것이다.


조화의 미

보편적인 형태는 조화의 미를 추구하는 것이다. 이 경우, 인접한 문화재와 조화되도록 형태와 규모를 조절한다. 형태, 재료 또는 색채가 유사해도 문화재에 비해 과도하게 규모가 커지면 문화재가 왜소해 보이므로 법규에서 따로 정하지 않더라도 적정한 규모를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서울의 세종문화회관은 한옥의 처마, 석가래, 기둥과 공포양식 등을 콘크리트와 석재로 표현하여 인접한 광화문과 조화의 미를 추구한 모범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이에 비하여 세종로의 정부종합청사는 재료, 형태, 규모면에서 광화문, 경복궁과 이질적이어서 부조화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할 수 있다.



세종문화회관_ 한옥의 처마와 기둥을 새로운 재료와 현대적 감각으로 표현하여 경복궁, 광화문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정부종합청사_ 고층으로 지어져 위압적이며, 북악산과 경복궁의 전통 건물들이 왜소하게 보이도록 만든다.


경복궁 같이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문화재에서는 외부에서 바라보는 경관만 고려할 것이 아니라 문화재 내부에서 외부로 보는 경관까지 고려해야 한다. 예를 들면 런던 시내의 하이드파크 등 주요공원에서는 공원내부에서 외부로 볼 때 공원을 둘러싸는 나무 수관위로 주변의 고층건물이 드러나지 않도록 건물 높이를 관리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문화재주변에 대한 건물 높이제한이 있기는 하지만, 문화재 보호에 충분하지 못한 실정이다. 특히 문화재 내부에서 외부로의 경관관리는 거의 이루어지고 있지 못하다. 일례로 경복궁 안에서 세종로 방향으로 볼 때 담장 밖으로 보는 경관은 난개발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외부에서 광화문을 바라보는 경관에만 관심을 기울였지 경복궁 마당에서의 경관에는 무관심한 것이 사실이다. 특히 경복궁 내부에서 볼 때 우측의 정부종합청사와 외교통상부 건물의 규모는 문화재와 공존하기에는 부적절하다. 또한 좌측에 있는 트윈트리타워 외벽의 유리재료는 전통 건축과 조화되지 않는 부적절한 재료 선택이라 할 수 있다.



경복궁 마당에서 세종로 방향으로 본 경관_ 밖에서 보는 경관과 달리 무질서한 경관을 보여주고 있다. 남측을 바라보므로 항상 역광이 되어 색채는 두드러지지 않고 건물의 볼륨이 중요한 경관요소가 된다. 우측의 종합청사와 외교통상부 건물이 과도한 높이임을 알 수 있다. 많은 정부기능이 세종시로 이전되었으므로 세종로의 상징성을 고려하여 건물 높이를 반 정도로 줄이는 것이 바람직하다.


문화재 유적은 오랜 세월동안 잊혀져오다가 후대에 와서야 보존의 필요성을 인지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개인 건물과 혼재되어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 경우 민간 건물에 대한 보상 및 철거가 바람직하지만 예산 혹은 협의 등의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사례가 많이 발생하고 있다. 차선책으로 민간 건물에 대한 리모델링 보조를 통해 문화재와 조화를 이루고 동시에 주민의 생활도 가능하도록 하는 방안이 있을 수 있다. 오랜 역사적 구조물이 많은 유럽에서는 이러한 방안을 선별적으로 도입하고 있는데, 서울의 한옥마을 북촌에서도 이와 같은 방법을 도입해 문화재와 민가가 공존하는데 있어 어느 정도 성과를 보고 있다.



크로아티아 스플리트의 디오크레티안 궁전유적과 접해있는 호텔건물_ 색상, 형태, 규모면에서 문화재와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철거가 어려운 경우,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


대비의 미

신축건물 조성시, 문화재와 조화를 추구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필요한 경우 대비의 미를 추구하는 경우도 있다. 고건축, 근대문화유산은 대부분 석재, 목재 혹은 벽돌과 같이 불투명하고 반사율 낮은 재료로 지어졌는데 비하여 현대에는 유리, 알루미늄 판넬과 같은 반사율 높은 재료를 많이 사용한다. 이와 같은 반사율 높은 재료를 사용하면 기존 문화재와 부조화를 이루기 쉬우므로 신축건물의 형태와 규모에 특별한 주의가 요구된다.


신축 건물에 반사율 높은 유리를 외벽 재료로 사용할 경우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 효과를 의도한다. 즉 문화재 건물이 유리벽에 반사되어 문화재 건물이 두 배로 커보이는 효과를 의도하거나, 복잡한 도시에서 문화재 건물과 대비되는 배경을 제공하여 문화재 건물이 더욱 두드러지게 보이는 효과를 나타내고자 한다.


서울시 신청사의 경우에는 후자의 효과, 즉 신청사 유리벽이 일제 시대에 지어진 구청사의 배경이 되어 구청사를 두드러지게 보이게 한다. 서울광장 주변에는 많은 고층빌딩이 밀집돼 있어 4층의 구청사 건물이 고층건물에 파묻힐 수 있는 상황에서 유리벽의 배경을 제공함으로써 구청사를 한층 돋보이게 하고 있다. 신청사의 건물입면은 채도가 낮은 색상의 유리를 채택하여 배경면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또한 유리벽 상단부가 앞으로 돌출되어 한옥의 처마를 상징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이웃한 덕수궁의 전통건축에 대한 존중을 보여주고 있어 성공적으로 대비효과를 달성한 건물의 예로 들 수 있다.



서울시 신청사_ 다양한 고층 건물이 밀집된 도심에서 신청사 유리벽면이 구청사의 배경이 되어 구청사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이웃한 덕수궁을 배려한 비교적 낮은 높이와, 고건축의 처마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돌출된 상단부는 인근 문화재와의 조화로운 타협을 보여준다. 또한 잔디광장을 신청사 실내로 끌어들여 국내최대 면적의 대규모 벽면녹화를 함으로써 실내외 공간이 긴밀히 연계되도록 하였다. 신청사 외벽에는 구청사와 대비되는 유리를 도입하였으나 건물 높이, 형태, 실내녹화 등 주변의 물리적, 생태적 환경과 조화를 시도한 작품으로 평가될 수 있다.


대비 효과를 의도한 또 다른 건축물로 DDP(동대문디자인플라자)를 들 수 있다. 난개발에 가까운 동대문 의류상가 일대에서 DDP 건물은 주변보다 낮은 높이와 박스형 건물과는 대비되는 곡면을 살린 형태로 인해 시민들에게 시각적 휴식과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긍정적 측면과 달리, 부지 내에 자리 잡은 한양성곽 유구와 인근의 보물 제1호 흥인지문(동대문)과의 연계성을 고려하면 아쉬움이 남는다. 높이와 볼륨의 해석은 옳았다고 할 수 있으나, 형태에 있어서는 문화재를 배려하는 노력이 더 필요했다. 역사적 유물이 많은 장소에 유물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형태를 도입함으로써 역사적 유물을 신축건물의 들러리로 격하시켜, 부조화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건축가의 성향을 십분 이해한다고 해도 거대한 매스를 하나의 매끄러운 면으로 처리하기보다는 곡면을 살리되 분절하는 등 성곽 유구를 존중하는 자세와 더불어 역사성을 더욱 강화시키는 방안을 강구했어야한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다. 건축가 독선의 무절제한 표출이 낳은 기형아라 할 수 있다.




DDP: 전면적으로 곡면을 도입한 건물 전경(상). 부지내에서 발굴된 한양도성 유구(하)_ 한양성곽 유구는 DDP 건물에 비해 왜소해 보이며, 동시에 문화재로서의 품위유지가 어렵다. DDP 건물은 장소의 역사와 문화를 외면하고 있다. 주변의 환경을 보듬고 대화하는 건물이라기 보다는 자신의 주장을 외치고 있는 절대자의 모습이다.


도시재생과 건축물

최근 우리나라에서 도시재생이 화두로 등장하고 있다. 전면 철거후 새로운 건물을 짓는 재개발, 혹은 뉴타운 대신에 기존 주민들이 그대로 살면서 불편한 부분을 고치는 도시재생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재개발, 뉴타운식 개발은 기존의 공간적 사회적 조직을 제거하고 새로운 조직을 이식하는 외과적 방법인데 비하여, 도시재생은 낙후된 부분만을 정비하여 재생시키는 방법으로서 기존의 공간적 사회적 질서를 유지시키고 강화하는 내과적 방법이다.


이러한 도시재생의 개념은 건축물에도 적용된다. 기존의 오래된 건물이 낡고 좁아서 더 큰 새건물을 필요로 할 경우, 기존 건물을 허물지 않고 보존하면서 신축건물을 덧붙이는 방법이 활성화되고 있다. 이는 장소에 대한 기억을 살려주고 도시의 역사를 풍성하게 하는 바람직한 방법이다. 앞서 언급된 서울시 신청사는 이러한 방법을 채택한 좋은 예이며 이외에도 많은 사례를 찾을 수 있다.


서울의 명동에 위치한 한국은행 본부건물은 일제시대에 지은 기존 건물을 화폐박물관으로 재활용하면서 후면에 신축 건물을 지어 한국은행의 오랜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후면의 신축 건물은 석재와 네모진 창을 도입하여 기존 건물과 ‘조화의 미’를 시도한 것으로 보이는데, 신축 건물의 과도한 높이와 박스형태가 경사지붕을 지닌 저층의 기존 건물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여 전혀 별개의 건물처럼 보이는 것이 흠이다.


세종로 사거리에 위치한 동아일보 사옥도 기존 건물을 미술관으로 재활용하고 이와 접하여 신축건물을 지어 동아일보의 오랜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배후의 신축 건물 외벽은 유리로 되어있고 고층이어서 외벽이 타일로 된 5층의 기존 건물과 ‘대비의 미’를 추구했다. 신축 건물은 인접한 우체국 건물의 유리벽과 함께 배경으로 작용하여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구 사옥을 돋보이게 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신·구 사옥을 하나의 이미지로 연결시키기 어렵다는 점은 아쉬운 부분이다.
  
한국은행본점사옥_ 전면의 저층 경사지붕인 구사옥과 후면의 고층 박스형 신사옥은 일견 석재사용을 통한 조화를 시도한 것으로 보이나, 두 건물간 과도한 높이차와 건물형태의 이질성으로 인해 동일한 그룹으로 보여지지 않는다.


동아일보 사옥_ 전면의 타일로된 저층 구사옥과 후면의 유리로된 고층 신사옥은 대비의 미를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후면의 유리벽으로 인해 구사옥이 한층 두드러져 보이는 효과를 연출하지만 신구사옥을 하나의 이미지로 연결하기는 어렵다. 두 경우 모두 구사옥을 보존함으로써 장소의 기억을 살리고 회사의 역사성을 대변하고 이어나간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구 비밀경찰본부건물_ 혁명으로 파괴된 건물의 입면을 보존시켜 재건축하여 역사성을 살리고 있다. 신축건물은 기본 건물과 대비되는 재료인 유리를 사용하고 있으나, 건물의 형태는 기존 건물과 조화되도록 하였고 높이도 주변 건물과 비슷하게 하여 전체적으로 광장의 분위기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 대비되는 재료를 사용하면서 주변 광장 입면과는 조화되는 예를 보여주고 있다.


일반적으로 건축주들은 자신의 건물이 이웃한 건물보다 두드러져 보이기를 원한다. 또한 많은 건축가들도 건축주의 요구를 감안하여 주변과 대비되는 디자인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문화재 혹은 역사성 있는 가로에 세위지는 건물은 해당 장소의 역사성을 존중하고 살리는 방향으로 지어져야한다.


도시 가로의 역사성은 도시가 지닌 무형 자산이다. 이를 지키고 이어나가는 것은 풍부한 의미를 지닌 도시를 만들기 위한 모든 도시인의 의무이자 다음 세대를 위한 투자이다. 반만년 역사를 지닌 우리나라에는 거의 모든 도시에 크고 작은 역사적 유물이 많이 존재한다. 이를 발굴하여 활기찬 도시구성요소로 적용하고 장소의 의미를 풍부하게 만든다면 역사와 조화롭게 공존하는 아름답고 살기좋은 도시가 만들어질 것이다.


가로의 역사성과 장소의 기억을 존중하는 건물을 보고 싶다.
역사가 살아 숨 쉬는 도시를 후손에게 물려주자!

연재필자 _ 임승빈 명예교수  ·  서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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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ungbin@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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