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포럼] 21세기 아르티장과 조경(설계)의 미래

정욱주 서울대학교 조경·지역시스템공학부 조경학전공 교수
라펜트l정욱주l기사입력2017-12-14

(재)환경조경나눔연구원 미래포럼

‘조경인이 그리는 미래’ Series No.31




21세기 아르티장과 조경(설계)의 미래




정욱주 서울대학교 조경·지역시스템공학부 조경학전공 교수

/(재)환경조경나눔연구원 운영위원  




기술혁신은 세상을 급속하게 변모시킨다. 얼마 전 데뷔한 4차산업혁명이라는 미래키워드는 아직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모두의 화두가 되었다. 모바일, 스마트, 가상현실, 인공지능, 빅데이터, 사물인터넷 등등 평범했던 단어들이 우리 미래를 이끌 새로운 기술의 명패가 되어 재등장했다. 알파고 충격이후 인공지능이 공간 계획, 설계를 대행할 것이라는 예측도 존재한다. 다소 거창한 포부이기는 하지만 미래에 대한 기대와 불안이 공존하는 이 시점에서 조경(설계)의 가치와 운영을 재고해보는 기회를 갖고자 한다. 

필자는 편한 자리에서 조경설계시공 활동을 ‘low tech high culture’라고 부르곤 했다. 첨단의 미래를 앞두고 있지만 조경은 여전히 흙을 묻혀가며 몸을 움직이는 노동을 수반한다. 형식은 (설계든 시공이든) 몸 쓰는 노동이지만, 조경활동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목표는 명백히 문화적 산물로서의 공간(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뒤집어서 얘기하면, 만들고자 하는 공간에 문화적 가치와 깊이가 배어 있지 못하면 그 작업은 단순노동 정도로 치부된다는 말이다. 여기서 ‘low tech’은 결코 부정적 뉘앙스는 아니다. ‘high culture’라는 지향점은 미래에도 바뀌지 않을 기준이라고 판단하지만, 현재 수작업적 조경활동인 ‘low tech’ 속성과 미래를 지배할 ‘high tech’ 간의 연결고리를 찾아내는 것은 흥미로운 숙제인 듯하다. 


베르사이유 궁전

‘몸씀’을 내포하는 ‘low tech’, 동시대 최고의 기술을 뜻하는 ‘high tech’ 그리고 조경활동의 지향점이라고 할 수 있는 ‘high culture’을 한꺼번에 포괄할 수 있는 단서를 아르티장(artisan)에서 찾고자 했다. 아르티장은 이탈리아 북부지방의 방언인 ‘artigiano’를 어원으로 삼고 있으며 중세 프랑스 때부터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단어이다. 아르티장 주도의 수공업은 유럽의 중세와 르네상스시대 문화예술의 발달을 견인한 산업기반이었으며, 생산과 예술이 조화된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당시 수공업의 발달 배경은 아르티장의 오랜 경험에서 축적된 기술을 통해 예술적 수준으로 드러난 생산물이 활발하게 유통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런 긍정적 환경에도 불구하고 아르티장은 산업혁명의 파도 앞에서 무력화 되었다. 수공업의 해체를 계기로 생산과 예술은 분리되기 시작하였다. 분리된 생산은 효율과 대량화 기술을 수용하였고, 분리된 예술은 근대디자인의 출발점이 되었다. 오늘에 이르러 이미 구식이 된 아르티장의 개념을 소환하여 다시 활용하고자 하는 가장 큰 이유는 통합적 생산방식이라고 볼 수 있다. 현재의 분업방식으로 해결이 안 되는 숙제가 풀릴 수 있다는 기대를 갖게 하는 대목이다. 아직은 막연한 예측에 불과하지만, 위에 언급된 미래키워드들을 수용하여 기술적 결합을 이루는 작업환경을 구축할 수 있다고 기대한다. 이미 앞서가는 오피스들은 가상현실을 활용하여 설계공간을 미리 체험해볼 수 있는 기술을 도입하여 활용하고 있다. 신기술을 활용한 장인들의 생산이 도시공간을 문화예술의 반열에 올려놓을 수 있다고 기대해 본다. 미래를 대비하자면서 오래된 장인의 개념을 재정립하여 사용하자는 것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수 있겠지만, 필자는 인간의 감성과 연관되는 조경(설계)활동에서 첨단기술의 조력으로 문화 가치를 지닐 수 있는 크래프트적 생산 환경을 갖추는 것이 미래에 대한 가장 확실한 대응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의 현실은 그렇게 호의적이지 않다. 현재의 교육체계에서는 조경학 전공으로 학위를 받는다고 하더라도 졸업 직후 실제 프로젝트를 원활히 다룰 수 있는 수준에 이르기는 어렵다. 산업체계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설계사무실에서 10년 가까이 일했지만, 본인 설계가 지어지는 과정을 훤히 꿰뚫는 경우는 드물게 본다. 설계 감각은 도면까지만 도달해있고, 그 너머로 벌어지는 과정은 나의 일이 아닌 경우도 많다. 물론 이유가 있다. 조경공사는 법적으로 감리를 행하는 공종이 아니어서 설계사무실의 업무범위는 입찰도서를 제출하는 것으로 마감되기 마련이다. 또한 의례히 벌어지는 시공사의 설계변경으로 인해 설계 의도는 중요한 ‘큰 선’들 몇 개로만 남겨지는 경우도 많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이유보다 할 수 없는 이유가 훨씬 많다. 구조 탓만 하다가는 설계와 시공은 점점 분리되고 설계의도와 시공결과물의 간극은 더욱 벌어질 수밖에 없다. 설계와 시공이 분리되어 있는 것은 머리와 손이 분리되어 있는 것과도 같다. 우리 주변에서 활동하는 조경가라면 누구나 겪는 문제지만 바뀌는 것 없이 여전히 진행 중이다. 경력 20년차에도 장인의 반열 근처에도 오르지 못하는 나 자신을 바라보며 고민이 깊어가고 있다. 여러분은 어떻게 대응해볼 계획인가?
   
소극적인 대처와 적극적 대처로 나눠서 생각해보고자 한다. 먼저 소극적 대처. 당장 쉽게 바뀌는 것은 없겠지만, 조경설계가 구현되는 과정 중 부지불식간에 설계의 가치가 훼손되지 않도록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많은 설계가들이 클라이언트를 설득하여 디자인감리를 요청한다거나 타당한 시공비용이 투입되도록 노력하는 것은 이 맥락의 활동이라고 볼 수 있다. 적극적 대처는 우리 자신의 변화를 이끌어 내는 것이다. 21세기의 아르티장이 되는 방식을 찾는 것이다. 손과 머리가 분리되지 않은, 기술과 문화예술이 분리되지 않은, 그리고 설계와 시공이 분리되지 않은 장인의 수준에 도달하는 것이다. 개발시대를 맞아 수주의 걱정 없이 일 할 수 있었던 지난 20년의 분위기에 안주해 있을 수는 없다. 앞으로 20년의 활동환경이 과거와 유사할 것이라고 안일하게 생각할 수도 없다.

엄밀히 따지면 17세기 던지 21세기 던지 조경설계가가 맡아야할 임무는 동일할 지도 모르겠다. 문화적 산물로서 공간을 구현하는 점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같은 목표를 삼고 있지만, 급격한 기술발전이 예측되는 미래에는 인간다움에 어필하는 활동이 더욱 가치를 획득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모순되게도 오래전 개념인 아르티장을 개조하여 첨단미래를 대비하는 조경(설계)인의 대책으로 삼자는 의견을 피력해본다.  


라펜트는 (재)환경조경나눔연구원 미래포럼과 함께 조경의 미래방향을 모색하는 '조경인이 그리는 미래'를 매달 1회씩 게재하고 있습니다.  

 

미래는 현재의 선택과 행동을 통해 향방을 결정할 수 있습니다. 조경의 미래를 함께 고민하는 논의의 장으로서 조경인 모두의 관심과 함께 연재가 이어가기를 기대해봅니다.


_ 정욱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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