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후원 ‘존덕정’에 담긴 이야기와 특징

문화재청 창덕궁관리소 ‘창덕궁 깊이 보기’ (3)
라펜트l기사입력2021-07-27

창덕궁 후원 ‘존덕정’. 겹지붕의 육각형태이며 오른쪽에는 일영대(해시계)가 있다.


문화재청 창덕궁관리소는 창덕궁의 역사와 문화적 가치를 조명할 수 있는 분야별 전문가를 초청하는 ‘창덕궁 깊이 보기’ 행사를 지난 9일 송석호 고려대학교 조경학연구실 연구원과 함께 창덕궁 후원에서 열었다. 이날 행사는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를 지켜 진행됐으며, 해설은 무전으로 이루어졌다.


존덕정의 조영배경과 특징


인조 14년(1636) 겨울에 발발한 병자호란으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청나라 수도인 심양으로 볼모로 끌려가 심양관(瀋陽館)에서 약 8년간 생활했다. 매월 5일, 15일, 25일 궁에서 열린 조참에 참여하고, 황제가 베푸는 잔치, 정조의 잔치, 황실의 혼인, 장례의식, 심지어 황제의 사냥에도 참석해야 했다. 심양고궁(瀋陽故宮)에 자주 입궐하게 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자연스럽게 내부의 모습을 익히게 된다.


조선은 인조 17년(1639)년 왕위계승문제로 청나라에 교서를 보내 소현세자를 돌려보낼 줄 것을 요구하는데, 청나라에서는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원손과 인평대군으로 맞교환하는 조건으로 귀근을 허락한다. 두 명의 왕자는 인조 18년(1640), 인조 22년(1644) 각 2회 귀근했으며, 명나라가 몰락한 이후인 인조 23년(1645)에야 비로소 영구 귀국한다. 인조는 두 왕자의 귀근과 영구 귀국시 청나라의 궁관제도에 대해 묻고 팔각정을 후원에 조영했는데, 인조 24년에 지어진 벽하정으로 현재는 없지만 폄우사 자리에 위치했었다.


상이 팔각정을 후원에다 지었다. 처음에 세자가 북경에서 돌아오자 상이 청나라 궁관(宮觀)의 제도에 대해 물었다. 세자가 팔각정의 제도가 가장 묘하다고 대답하니, 상이 이르기를 “네가 그 모양을 그림으로 그릴 수 있겠는가?” 하니, 세자가 즉시 그려서 올리자 상이 매우 기뻐하여 그 정자를 후원에 지으라고 명하였는데, 매우 기묘하였다.

-『인조실록』 24년 병술 2월 4일 신사

주목할만한 것은 이보다 먼저 인조 22년(1644)에 존덕정이 조영됐는데, 겹지붕의 육각형태라는 점에서 심양고궁 대정전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만주족의 건축양식은 심양고궁 대정전(1625), 운남성 곤명 원통사 팔각정(1686), 북경 이화원의 곽여정(1750년경) 등이 있으며 모두 두 겹의 지붕을 갖는 단층 건물이다.


존덕정과 대정전의 공통된 특징은 ▲왕권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신수인 용이 천장에 쌍룡희주 하고 있는 모습 ▲일영대(日影臺, 해시계) ▲인근에 태청문의 존재이다. 태청문은 도교의 최고 이상향이며 근본이 되는 신으로 모든 행사에 반드시 모셔지는 삼청(옥청, 상청, 태청)과 관련돼 있다. 이는 태청문과 더불어 왕의 불로장생을 염원하는 현세적 행복성취에서 기인해 조영된 것으로 왕의 장수가 왕조의 영속성을 담보하는 필요조건이기 때문이고, 왕의 불로장생을 위해서는 현실성을 추구한 유교보다는 불교나 도교 등의 신앙체계가 원용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존덕정 천장에는 용이 그려져 있다.


문이 있던 북측3칸 구조


반면 차이점은 지당의 존재유무에 따라 건물이 수행하는 역할이 다르기에 나타나는 건축적 특징이다. 존덕정이 지당을 조망할 수 있는 정원 속 정자라면 대정전은 국가의 큰 행사를 거행하기 위해 조정을 가졌고, 월대 위에 조성된 정전이기 때문이다.


이는 건물의 공간구조에도 영향을 미친다. 존덕정의 반은 물 위에 떠 있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심양고궁 대정전이 문을 닫아 외부로부터 모든 시선을 차단할 수 있는 건묵물인 반면, 존덕정은 대정전의 제도와 유사하나 내부의 북쪽 3칸(지당 위에 떠 있는 부분)에만 문을 달 수 있고, 남쪽 3칸(땅에 있는 부분)은 평난간을 개방해 출입구로 쓸 수 있는 부분개방형 정원건축물이다.


즉, 존덕정의 조영배경에는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청국경험 영향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이를 수용하는데 있어 정원 속에 조영되는 정자의 특성, 장소, 지능에 맞도록 변용했으며 우리 고유의 문화에 습합시켜 구현된 정원건축물이다.


존덕정 동쪽의 계류와 홍예교


존덕정 동쪽으로 흐르는 계류는 홍예교를 놓을 만큼 깊지도 않고 폭도 좁다. 그러나 계류의 흐름을 서쪽으로 틀어 떨어뜨림으로써 유속을 늦추고 폭을 넓혀 의도적으로 홍예교를 축조했다. 기능적으로 평석교(平石橋)를 놓아도 되는 곳에 의도적으로 절토해 홍예교를 놓은 이유는 무엇일까?


송석호 연구원은 “이는 존덕정 일대를 성역화해 신성한 공간임을 표현하기 위한 방법이다. 본래 존덕정이 가지고 있는 위상을 한층 더 격상시키려는 당대의 상상적 조경수법”이라고 설명했다.


현장조사에서 청심점의 남측에 계단 유구를 확인함으로써 청심정에 가기 위한 동선이 채홍교(홍예교)를 시작해 존덕정의 괴석 사이를 지나 태청문으로 올라 청심정에 닿게 구성됐음을 알 수 있다.



천향각과 망춘정의 복원 가치


천향각은 『어제궁궐지』에 망춘정의 동쪽과 척뇌당의 북쪽에 있으며 효종 4년(1653)에 조영된 건물로 기록돼있으며, 『천향각기적록(天香閣紀跡錄)』에는 천향각이 본래 의주에 있던 건물로 기록돼있다.


효종이 봉림대군시절 심양으로 갈 때 의주에 들러 팔장사를 뽑아 호위하게 했는데, 박희복(1608~?)은 여기에 선발돼 9년간 당시 봉림대군과 고락을 함께 했고, 귀국할 때 명 승정제의 어람용 『춘추(春秋)』를 가져와 천향각에 보관했다고 한다.


또한 권두에 천량각도(天香閣圖)가 삽도 되어 있는데 그림은 천량각을 세간으로 나누고 좌측부터 경의각, 천향각, 읍궁각으로 나누어 그렸다. 천향각의 한 칸이 읍궁각인 것에서 송시열(1607~1689)의 화양동 읍궁암을 상기시켜 효종과 우암의 어수지교를 엿볼 수 있다. 어수당과 천향각은 효종과 송싱열의 독대로 알려진 건물인 만큼 당새 숭명배청(崇明排淸) 사상아래 우암과의 북벌 의지를 암암리에 표현한 조영배경을 가지고 있다.


이 책에 실린 기문에 따르면, 천향각은 만주(의주) 남로화동 정곡에 있는 건물로, 명 숭정제의 어람용 『춘추』를 보관한 곳이다. 선문왕(효종)을 호종하여 심양에 다녀온 팔장사의 한 사람인 박희복(1608~?)은 숭정제의 침전 옆에서 노란 비단으로 장황한 송판 『춘추』 2책을 발견하고, 귀국할 때 이를 가져와 집에 보관하였다. 천향각은 천향각과 읍궁각, 경의각의 세 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천향각은 신석우가 붙인 이름으로, 어서에 천향이 남아 있는 듯 하다는 이유로 붙인 이름이며, 읍궁각은 송시열이 은일하던 화양구곡의 읍궁암의 뜻을 따른 것이다. 경의각은 『춘추』가 고금의 상경이며 통의라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다.

-『천향각기적록』

또한 강세황(1713~1791)이 정조 5년(1781) 임금을 모시고 후원을 유람하며 당시에 보고 들은 내용을 기록해둔 『표암고』 호가유금원기 편에는 옥류천 일원의 구경을 마치고 존덕정 일원으로 내려오는 길에 왼편에 나타난 천향각과 망춘정에 대해 상세히 적어놓았는데, 천향각의 구조를 보며 ‘난갱(벽난로)를 설치한 것이 중국의 제도를 모방한 것’이라고 묘사돼 있다.


조각된 담과 채색된 건물이 길 왼쪽에 나타났다. 그 문에 들어가니 ‘망춘’이라는 정자가 있어 육각형의 원형전각으로 되어있었다. 전각 앞에 행랑 예닐곱 간을 붙여 놓고 난갱을 설치하였으니 중국 제도를 모방한 것이다. 정자의 주춧돌은 모두 백옥으로 조각하였는데, 매우 정교하였다. 

-『표암고』 호가유금원기


천향각에 어좌를 설치하였다. 대신과 각신에게 술병과 안주 그릇을 하사하면서 각자 마음대로 경치 좋은 곳에서 놀며 쉬게 하였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 상이 다시 존덕정의 서쪽 태청문 안의 막차(幕次)로 거둥하여 대신에게 이르기를..

-『정조실록』 19년 을묘 3월 10일 신유

송 연구원은 “천향각은 효종의 불모시절의 경험과 결부된 건물이며, 조각된 담이 있고, 망춘정의 주춧돌은 백옥으로 되어있는 등 위계가 높은 중요한 공간이다. 정조 또한 내각상조회를 결성하고 후원을 유람하는 과정에서 천향각에 어좌를 설치했고, 정조의 「망춘문앵(望春聞鶯)」 또한 상림십경으로 남아있어, 천향각이 후원에서 중요한 공간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들어 소실됐다”며 복원가치가 있는 건물임을 강조했다.



고종연간의 후원변용


경복궁이 중건되고 고종이 경복궁으로 이어하면서 창덕궁은 이궁으로 격하됐고, 창덕궁 후원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아울러 서구 열강의 압박과 불안한 정세 속에 화재도 빈번하게 일어나 타의적으로 경복궁 건충궁과 창덕궁 연경단 사이에서 이어와 환어를 반복하게 된다. 창덕궁에 거주할 때마다 존덕정 일원을 연경당의 후원처럼 사용하게 됐고, 외국사신들과 귀빈들의 접견장소도로 활용됐다.


주목할만한 점은 고종이 경복궁 건청궁에 거주할 당시 향원지에 향원정과 취향교를 만들고 뱃놀이를 했는데, 이것이 창덕궁에 거주할 때 존덕정 일원에서 그래도 재현됐다는 점이다. 송 연구원은 “이로써 그동안 일제에 의해 존덕정 일원이 지당이 변형됐다는 주장보다는 고종 자의적으로 자신의 성향에 맞게 변형한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보스턴 미술관에 소장된 퍼시펄 로웰의 1884년 사진에는 존덕정 북쪽에 지당이 동궐도와 같은 반월형과 방지형이 공존하고 있어 변형되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고, 동궐도에 나타난 존덕정 서쪽의 괴석 한 벌이 실존하고 있었음도 알 수 있다고 덧붙였다.


공간의 성격도 바뀌었다. 외국사신과 귀빈이 후원에 들어올 수 있을 정도로 확대되면서 조영초기의 조영의도였던 왕 개인의 심신수양 장소는 찾아볼 수 없다. 태청문과 그 일대를 위요하던 아름다운 꽃담이 소실되고 그 안에 선계를 상징하던 두꺼지가 양각된 괴석분과 괴석이 연경당 장락문 앞으로 이동된 점, 승재정을 세우면서 육각정인 존덕정 옆의 두 육각 괴석분을 승재정으로 옮긴 점, 천향각과 그 일대를 두르고 있던 화려한 담이 소실된 점, 반월지와 방지, 원지원도가 변형된 점, 반수정인 관람정에 괴석을 놓지 않은 점 등에서 조영초기의 상상환경 조성의 의미 또한 대부분 상실했다고 판단된다 전했다.


한편 이번 행사는 8일부터 10일까지 매일 1회씩 총 3회 진행됐으며, 올해는 ‘왕의 정원, 창덕궁 후원 깊이 보기’라는 주제로 후원의 권역별 전통조경의 특징과 가치를 배우는 시간으로 꾸려졌다. 문화재청 창덕궁관리소는 앞으로 해마다 주제를 바꿔 심화답사 프로그램을 확대·운영할 계획이다.



후원 깊숙한 곳에 있는 청심정 사각 정자와 빙옥지. 이번 답사프로그램에서 그동안 일반에 공개하지 않았던 답사 동선도 한시·제한적으로 개방했다.

글·사진 _ 전지은 기자  ·  라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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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j870904@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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